회원 이야기

[회원 에세이] 2025년 서울퀴어문화축제 퍼피 프라이드 플래그 행진 후기

행성인 2025. 6. 22. 13:47

마루 (행성인 HIV/AIDS 인권팀)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트위터 지인을 통해 펍마스크의 귀엽고 섹시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2024년 10월 대만 퀴어 퍼레이드에서 대규모의 펍마스크 행진단 틈에 끼어 행진한 경험은 충격과 감동이었다. 나도 한국에서 퍼피 프라이드 깃발을 들고 행진하리라 다짐했다. 혼자서 다짐만 하면 흐지부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성인 웹진에 행진 참여를 독려하는 글도 실었다.

 

국내 최초로 퀴퍼 행진에서 퍼피 프라이드 깃발을 들고 행진한 사람이 되겠노라 야심차게 결심했지만 당장 깃발을 주문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해 행성인 상근활동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덕분에 그가 추천한 장투지원단 뚝딱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사이즈의 깃발과 5M 길이의 깃대를 어렵지 않게 주문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든 깃발 아래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진하도록 홍보하는 것이었다. 작년 서울퀴퍼에서 펍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진 않았기 때문에 아는 지인들 위주로 참여를 독려했다. 그러던 중 약 60여 명의 펍마스크 동호인들이 속한 단톡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방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주저해 단톡방 멤버로 있는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렸다. (좀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드디어 2025년 서울 퀴어문화축제의 아침이 밝았다. 인쇄 잉크 냄새가 물씬 나는 ‘따끈따끈한’ 퍼피 프라이드 깃발과 펍마스크를 챙겨 집을 나섰다. 서울퀴퍼가 열리는 을지로입구 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반.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장 입구에 들어섰다가 행성인 운영위원장인 지오를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더니 물었다. “그런데 오늘 깃대가 안 보이네요?” 맙소사. 깜빡하고 깃대를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집에 다녀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2시간. 4시 반에 대오에 합류하려고 계획했으니 아직 늦진 않았다. 깃발은 내년으로 미룰까 잠시 생각했지만 퍼피 행진에 함께 해 달라고 행성인 웹진 글까지 실었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서울퀴퍼 부스를 빠르게 둘러본 후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지만 약올리듯 지하철과 버스의 배차 타이밍이 도와주지 않았다. 행진을 함께 하려고 온 지인의 언제쯤 도착하냐는 연락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무더위에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두고 온 깃대를 챙겨 다시 을지로입구 역에 도착한 시간은 4시 30분.

 

서울퀴퍼 행사장 안에서 대오를 만들어 행진 출발을 기다리는 사람들 무리 사이를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펍마스크를 쓴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보였다. 지인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준비해 온 펍마스크를 허겁지겁 쓰면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깃대를 길게 뽑고 준비해 온 퍼피 프라이드 깃발을 묶으려 하자 펍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하나둘 도와주기 시작했다. 순간 묘한 동지적 감정을 느꼈다. 고마웠다.

 

붉은색 뼈다귀가 그려진 퍼피 깃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서서히 행진이 시작되었다. 많이 늦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평소에는 맨 얼굴로 하던 행진을 펍마스크를 쓰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애당초 펍마스크 가시화에 대한 욕구로 기획한 행진이라 부끄러움이나 쑥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퍼피 깃발을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깃발이 말리지 않도록 깃대를 더욱 신경써서 들었다. 펍마스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릴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기를 바랐고,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펍마스크의 매력을 느끼길 바라며 다른 참가자나 인도에 있는 행인들의 시선과 표정을 살피며 걸었다. 함께 행진하던 다른 참가자가 펍마스크와 퍼피 깃발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멋지다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행진 코스의 길이가 짧지 않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행진하려면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한지라 중간에 행진을 그만 두는 사람이 많으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했다. 하지만 8명 정도가 끝까지 행진을 마치고 출발했던 퀴퍼 행사장으로 돌아왔다. 국내 퀴어퍼레이드 최초의 가시적인 퍼피 프라이드 깃발 행진을 마친 뜻깊은 순간이었다.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우연한 기회로 접한 펍마스크와 대만 퀴어 퍼레이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다짐한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국내에서 열리는 비수도권 퀴퍼에서도 퍼피 깃발 행진을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퍼피 깃발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행진을 함께 해줘서 고맙고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끝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퀴퍼가 끝난 후 펍마스크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X(트위터)에서는 스무명이 넘는 펍마스크 ‘댕댕이’들이 모여서 찍은 단체사진이 올라왔다. 그제서야 이번 2025년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상당히 많은 펍마스크 댕댕이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년보다 훨씬 많고 조직적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에서 펍마스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고 느꼈다. 매우 기쁜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다. 내가 깃대를 두고 오지 않았다면, 더 많은 시간을 퀴퍼 행사장에서 보냈다면 다른 펍마스크 동호인들과 인사 나누고 친분을 쌓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스무명이 넘게 모여 찍은 그 펍마스크 단체사진에도 들어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피 깃발 행진을 함께 하자고 홍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경험은 곧 자산이다. 이번 서울 퀴퍼에서 펍마스크를 쓰고 퍼피 깃발을 들고 행진한 우여곡절 섞인 경험이 다음에 더 재미있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앞으로가 기대된다. 올해를 시작으로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펍마스크를 쓰고 퍼피 프라이드 깃발 아래에서 행진하면 좋겠다. 가능하다면 비수도권 퀴어문화축제에서도 펍마스크 ‘댕댕이’들이 함께한다면 더 좋겠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