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차별 혐오/동성애 혐오

‘사랑’은 살아 숨 쉬는 생명,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입니다.

행성인 2010. 10. 19. 15:12

이 글은 2010년 10월6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렸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비난하고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연합’, ‘참교육 어머니 전국모임’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차별없는 세상을 여는 기독인 연대’ 방랑돌고래님의 발언문입니다.

 

10월 6일 혐오 조장 규탄 기자회견 _ 사진 출처 _ 일다



우리는 ‘보수기독교 집단’이 동성애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청소년 동성애자 중에는 교회에서 동성애 혐오 발언을 듣고 자괴감에 빠져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혐오발언을 멈추지 않고, 심지어 신문에 광고를 내지요. 이들은 성서가 ‘억압과 불의, 탐욕,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성(Sexuality) 특히 ‘동성애’를 희생양 삼아 그들의 도덕적 불의를 감추려 듭니다.

 

스스로 의로운 척을 하며 이웃의 아픔은 느끼지 못하면서, 세속적 성공과 물질 숭배만을 좇으며, 우익 정치에 경도되어 약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구 기독교의 ‘참담함’은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닙니다. 로마의 국교가 된 이래, 기득권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전쟁과 살인, 도둑질을 정당화해왔죠. 왜 그들은 이처럼 불의를 행하면서 그들이 신의 편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은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고, 인간이 이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은 인간을 심판하고 벌을 내린다. 그래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으니까. 신은 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관을 이야기 하면서, ‘성서’를 내밉니다. 실제로 성서에는 ‘불과 물로 심판하는 신’, ‘전쟁과 살인을 명령하는 신’이 등장합니다. 마치 동성애 혐오를 일삼는 보수 기독교인들 처럼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의 신’이 ‘살인’을 즐긴다니요. 또 그들은 신이 초월적 존재라서 우주의 흐름을 거스르는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동성애자를 치료하여 이성애자로 만들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이러한 오류가 성서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신’은 그 문서가 쓰여 졌던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꼈던 ‘신’. ‘고백의 언어’로서 기록된 '신'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제하는 신에 대한 기록이라고 믿기 때문에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성서에는 각 시대에 따라, 글을 쓴 저자에 따라 다양한 신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1성서, 사무엘서의 묘사를 살펴보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사 49:15-16)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니”(사 66:13)

 

‘어머니’의 따듯한 모습으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신에 대해 읽고 있으면 어느새 제 마음도 따듯해집니다.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서는 이러한 ‘자상한 부모’의 모습을 한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상한 부모는 자녀를 보살피고, 아낍니다. 자녀의 마음을 공감할 줄 아는 이 신은, 자녀가 이 세상과 하나임을 느끼기 원하며, 성장하여 이웃을 돌보는 주체가 되길 바랍니다. 신은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상을 통치하려 들기보다, 우주의 보편적인 질서 안에 끊임없는 창조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모습을 저 멀리 하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찾으려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성(Sexuality)'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봅시다.

 

성서에는 동성애 관계를 묘사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등이 그것입니다. 룻기에는

 

“나더러 당신 곁을 떠나라고 하지 마세요. 당신의 겨레가 내 겨레입니다....(룻기 1:16)”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서구 문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레즈비언 로맨스’입니다. 이 부분은 결혼을 축하하는 예전에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가 상대방의 무릎 또는 가슴에 누워있는 자세, 이것은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애인 간의 육체적 친밀감의 표시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언자들의 상상에서는 하나님이 ‘남자 이스라엘’을 여자처럼 입혀서 그와 결혼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시 예언자들은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나 봅니다. 그리고 이 동성 애인들이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쯤하면 나오는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이죠. 성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이방인에 대한 폭력, 약하고 궁핍한 사람을 냉대한 죄’라고 여러 번씩이나 반복해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학대하는 죄’,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학대하는 죄’이지요.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동성애 혐오는 인간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신성’에 대한 모독이자, ‘성서’에 대한 모독입니다.

 

사랑은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나일 수 있게 해주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살아 숨 쉬는 생명, 바로 우리 본연의 모습입니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무슬림, 불교신자, 유대교신자, 우리 모두에게 말이죠.

 

방랑돌고래 _ 차별 없는 세상을 여는 기독인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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