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차별 혐오/동성애 혐오

국립국어원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한 한국어를 만들라!

행성인 2014. 5. 26. 13:43

학기자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2014년 1월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의 뜻을 이성애적으로 재개정했다. 보다 포괄적이고 평등하게 정의되어 있던 '사랑'의 뜻을 퇴행적으로 개정한 것이다. (인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퇴행의 뜻은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앞선 시기의 과거로 감"이다. 말 그대로 국립국어원의 행태는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먼 과거로 가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국립국어원의 퇴행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사랑의 뜻에서 배제된 성소수자들과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 합리적인 시민들은 국립국어원을 비판하고 재개정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은 지난 4월부터 사랑의 뜻풀이 재개정 철회 서명운동을 벌여 5천명 넘는 시민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했고, 5월 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아이다호, IDAHO,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Biphobia and Transphobia)을 하루 앞 둔 지난 5월 16일에는 국립국어원의 행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은 시민들과 인권단체의 요구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사랑'의 뜻을 개정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지난 5월 16일 열린 국립국어원 규탄 기자회견 출처: 비마이너(http://beminor.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4&no=6855)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의 정의는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로 되어있었다. 사랑의 주체를 서로 다른 이성, 오직 남 녀로 한정한 것이다. 이에 일부 대학생들이 "이성애 중심적인 언어가 성소수자 차별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사랑의 정의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국립국어원이 받아들여 드디어 2011년 11월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의 뜻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때 '사랑' 뿐만 아니라 '연애', '애정', '연인', '애인'의 뜻도 같이 바뀌게 된다. '남 녀' 또는 '이성'으로 되어 있던 부분이 '두 사람', '서로'로 전부 수정된 것이다. 


2012년 11월 변경된 '사랑'의 정의 출처: 동아닷컴 (http://news.donga.com/3/all/20121206/51348811/1)


하지만 채 2년도 되지 않아 2014년 1월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뜻풀이에 '남녀'라는 표현을 다시 끼워넣었다. '사랑', '연애', '애정'의 3개의 단어 정의를 이성애적으로 바꾼 것이다.(나머지 두 개인 '연인'과 '애인'의 뜻은 사랑의 정의에 따라가기 때문에 그대로 뒀다.) 지난 3월 31일 여러 언론사를 통해서 이런 사실이 알려졌고 이에 국립국어원은 "재변경 이전 뜻풀이는 한쪽에서 보면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 돼 전형적인 쪽을 기준으로 바꾼 것”이라고 해명했다. 



보수기독교 세력의 성소수자 혐오에 굴복한 국립국어원의 말도 안되는 해명


사랑의 정의가 개정된 후 보수기독교 세력은 국립국어원에 사랑의 정의를 이전으로 되돌릴 것을 요구했다. 한국교회연합은 지난해 10월 국립국어원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 사랑의 뜻을 개정한 것을 두고 "의미를 모호하고 왜곡시키는 것으로 동성애를 조장, 방조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수정을 요구했고,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는 국립국어원 항의 캠페인을 꾸준하게 벌였다. 보수기독교 세력의 동성애 혐오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점차 조직화되고 노골화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다수의 보수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동성애가 문제라니... 호모포비아들은 참 문제다!)를 만들어 성소수자 이슈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사랑의 정의 재개정 요구를 비롯하여 서울시학생인권조례 개정, 차별금지법 재정 반대, 군형법 개정 반대, 6.4 지방선거 성소수자 친화적인 후보 낙선 운동 등 한국사회에서 동성애 혐오 및 성소수자 차별을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국립국어원의 사랑의 뜻 재개정의 1차적 원인은 보수기독교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보수기독교 세력에 혐오 공세에 쉽사리 굴복한 국립국어원이다.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정의 재개정에 대해 “사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런 전형적인 쓰임이 사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라고 해명한다. "여러 의미를 묶어서 제시하는가 아니면 나누어서 제시하는가의 제시방법이 다를 뿐이지 특정의미를 누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뜻풀이에는 특정집단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없다"고 말하며 "특정집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오해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친절히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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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전형'은 "기준이 되는 형",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기준이 되는 사랑이나 연애, 애정이란 게 있기나 한 걸까?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애인과 연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국립국어원은 사랑의 기준과 본보기가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만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만큼 저마다 다른 수많은 사랑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공식 트위터에서 "사전의 뜻풀이 수정은 전적으로 언어 및 사전학적 기준에서 결정"된다며 "국가 기관으로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호모포비아 세력의 편에 서있으면서 외적으로 구색을 맞추는 것도 우습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소수자 이슈를 사회적인 논란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각 국가별로 상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성소수자의 인권은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차별 해소와 제도적 인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어의 세계화'를 내세우는 국립국어원이 오히려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고 있다.) 이런 해명이야 말로 국립국어원에 인권의식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국립국어원은 스스로 "균형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척 포장을 하고 있지만 이는 뻔뻔한 위선이고 단지 이성애는 '정상'이고 성소수자의 사랑은 '비정상'이라는 편견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립국어원, 하지만 성소수자의 존재가 없는 <표준국어대서전>


국립국어원은 표준어나 맞춤법을 제정하는 기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국어 교육, 번역, 국어 정보화 사업 등 방대한 사업을 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어문 정책 종합 기관으로 국내에서 '한국어' 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관여하고 있다. 언론이나 출판, 방송, 교육 등에서는 국립국어원이 제정하는 어문 규정이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여 공적 언어를 통제하고 있고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순화운동을 벌여 실생활 언어에도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이 어문 규정을 변경했다는 것은 큰 뉴스거리가 되고 실제 언어 사용이 바뀌기도 한다. 본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얼마전에는 국립국어원 공식 트위터에서 '노동자'를 '근로자'로 순화하여 써야한다고 권고하여 큰 논란이 됐다. 담당직원이 착각한 것으로 밝혀져 국립국어원의 공식적으로 사과도 있었지만 이 사건은 국립국어원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정치적 편향과  맥을 같이하여 국립국어원은 한국사회의 이성애중심적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성소수자(LGBTIAQ)의 존재가 희미하고 고의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라는 말은 등록되어 있다. 동성애자가 동성연애자라는 편견 어린 구닥다리 말과 동의어로 안내되고 있지만 다양한 사용례를 안내해야 하는 국립국어원의 정책상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동성연애자를 동성애자로 순화하자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국립국어원이 이런 훌륭한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외에 성소수자를 표현하는 말은 전혀 없거나 오히려 편견을 조장하고 있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무성애자'('무성애', '에이섹슈얼'(Asexual) 모두 미등록), '퀘스처너리'(Questionary)를 포함하여 성적소수자를 모두 일컫는 대표적인 말인 '성소수자'와 성정체성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말인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간성'('인터섹슈얼'(Intersexual)은 미등록)은 "암수딴몸이나 암수 딴그루인 생물의 개체에 암수 두 가지 형질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일. 생식 능력이 없으며 발생 중에 성 결정 유전자 작동의 잘못으로 생긴다. 흔히 가축에 있다”고 안내하여 인터섹슈얼을 가축으로 오도하고 있고, '성전환’은 “암수딴몸인 생물에서 암수의 성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는 현상”이라고만 안내하여 트랜스젠더에 편견을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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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표준국어대사전>은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른말 고운말을 쓰자"는 국립국어원이 소수자가 사용하는 언어를 등록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국립국어원의 윤리헌장에는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소통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언어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없는 다원적 언어정책 수립에 노력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 윤리헌장에 맞게 국립국어원은 소수자 언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계집애', '미망인', '귀머거리', '절름발이', '벙어리', '검둥이' 등 여성과 장애인, 인종 차별적인 말들은 등록되어 있다. 문제가 있는 단어들도 실생활에서 쓰이고 있다는 이유로 사전에 등록하면서 소수자가 사용하고 소수자를 표현하는 말을 등록하지 않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차별적 언어가 낳는 혐오와 폭력, 국립국어원은 '언어 속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2013년 '종북게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보수세력이 성소수자 친화적인 진보진영을 공격하여 사회분위기를 보수화시키고 성소수자 인권을 후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신조어를 만든 것이다. '종북게이' 선동은 성소수자들은 물론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친북적인 빨갱이'로 몰고 반사회적인 세력으로 공격했다. 또한 지난 3월 말 ‘마약파티한 동성애자들’이란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됐다. ‘마약파티한 이성애자’란 표현은 없다는 점에서 명백히 차별적인 표현이었지만 언론에서 버젓이 쓰였다. '종북게이', '마약파티한 동성애자' 모두 차별적이고 비논리적인 말이었지만 일부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기독교세력, 일베 등 보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이면서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를 부추겼다. 편견과 혐오가 만나 만들어진 차별적인 언어가 또 다시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한 것이다. 


이처럼 <표준국어대사전>이 사랑의 뜻을 이성애로 제한한 것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강화시킬 수 있다. 언어는 의사소통하는 도구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드러내기고 때로는 통제하기도 한다. 차별적 언어가 강제하는 차별적 인식은 언제든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평등한 언어는 각계각층사이의 갈등과 불신을 해소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만 차별적 언어는 소통을 막고 차별고 혐오를 부추긴다. 국립국어원은 표준', '전형' 이라는 겉만 번지르르한 말로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지 말고 보다 포괄적이고 평등한, 소수자 친화적인 한국어를 만들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