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조건
섯버 (살롱 드 에이즈 참가자)
나는 박 타는(섹스하는) 것을 좋아한다. 찜방(게이 찜질방)과 DVD방에 자주 간다. 나는 하루에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성기를 애무하고, 빨고, 빨렸고 박을 탔다. 박을 탈 수 없을 때에는 자위를 한다. 주로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데, 내가 보는 영상은, Treasure Island Media사의 작품들이다. 바텀 한 명을 수십 명의 탑이 콘돔 없이 박아대는 포르노. 항문에 흥건하게 정액을 싸고, 그걸 다른 탑이 젤 삼아 제 성기에 문지르며 바텀을 박아대는 영상을 보며 흥분한다.
나는 노콘(콘돔을 끼지 않고 하는) 섹스를 좋아한다. 만남 어플이 지금처럼 대중화되지 않았고 경쟁업소 수도 적었던 시절, 찜방에서 보낸 토요일 밤은 상당히 뜨거웠다. 관전도 좋아하고 그룹 섹스도 좋아한다. 일요일 오전엔 파트너와 함께 종로 모텔을 대실해 이반시티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을 불러 박을 타기도 했다. 여러 명의 탑에게 연거푸 박히며 정액을 줄줄 흘려 축축해진 바텀의 항문만큼 나를 흥분시키는 게 또 있을까?
몇 달에 한 번씩은 성병에 걸렸다. 요도염에 걸리고, 곤지름에 걸렸다. 요도염에 걸리면 가만히 있어도 요도 깊숙한 곳까지 간지러워 쇠젓가락 따위를 넣어 후벼 파내고 싶을 정도였다. 오줌을 눌 때마다 쇳조각이 빠져나오는 듯이 따끔거렸다. 얼마 후엔, 요도에서 분비물이 나오고 속옷 앞섶은 누렇게 젖었다. 오줌이 나도 모르게 울컥 흘러나온 것 같아 화장실에 가 확인하면 속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정도가 되면 비뇨기과에 가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 나았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으면 더 독한 약을 처방받았다. 주사를 맞아 뻐근해진 엉덩이를 문지를 때마다 다음엔 콘돔을 끼고 할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곤지름에 걸리자 처음엔 좁쌀 크기의 돌기가 요도 안쪽에 돋아났고, 얼마 뒤 성기 기둥을 따라 닭벼슬같이 새하얗고 아주 작은, 부채꼴 모양의 돌기가 돋아났다. 처음엔 무시할 만한 크기였지만 방치할수록 자라났다. 딱히 아프진 않았다. 다만, 육안으로 확인할 정도가 되니 더이상 오랄을 받을 수도, 박을 탈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대 위에 올라가 마취 주사를 맞았는데 꽤 아팠다. 요도염을 치료하느라 맞았던 항생제 주사와는 사뭇 다른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주사를 맞기 전 수술대 위에 얌전히 누워 있을 때의 내 성기는 초라했다. 그것은 즐거움을 약속하고 바텀들을 신음하게 하는 성기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저 의료적 처치를 앞두고 위축된, 자그마한 살점이었다. 마스크를 쓴 의사가 장갑을 끼고 수술대 옆 의자에 앉았을 때, 그리고 그의 옆에 놓인 금속 메스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장비들을 보며 나는, 왜 그랬을까, 왜 이렇게 막 살았을까 후회했다. 다시 치료받으면 이젠 꼭 콘돔을 끼고, 세이프 섹스를 해야지, 다짐했다. 딱,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 그랬다.
남자화장실에는 하단에 파리가 그려진 소변기가 있다. 오줌이 소변기 밖으로 튀어 지저분해지는 걸 막으려 고안한 것이다. 나는 파리 맞추기를 좋아했다. 성기를 세워 파리를 조준하고 시원하게 오줌을 내갈길 때의 유치한 만족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곤지름 수술 이후 나는 그 파리를 정확히 조준하지 못한다. 요도 속에까지 자랐던 돌기들을 레이저로 태우느라 요도 입구를 조금 절개했기 때문이다. 치료 부위는 아물었지만 전과 같은 건 아니었다. 요도 입구가 찢어져 자꾸만 옆으로 새는 오줌 줄기를 볼 때면 가벼운 한숨이 나기도 했다. 어떤 일을 겪고 나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어서다.
나는 늘 ‘잠재적 양성’이라고 생각해왔다. 언제 판정받는지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일부 감염인들은 자기가 양성임을 사람들에게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누가 자기 병 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냐며. “만약에 네가 당뇨라고 생각해봐, 그거 사람들한테 말하니? 말할 필요 없어.”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불쾌했는데, 그 불쾌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 태도가 ‘커밍아웃을 왜 하니, 사서 고생하는 대신 일반인 척 지내. 종태원 나오면 충분히 이쪽 생활 하며 살 수 있잖아’ 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강요할 필요 없는 당사자의 선택이다. 현실적 여건이 안 되어서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테고. 가시화되지 않은 동성애자로 사는 것도 나름의 재미와 이익이 있을 것이다.
내게 ‘나는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주는 재미는 제법 짜릿했다. 나의 약점, 모자람 등을 변명하는 꽤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되었다. 나 자신에게는 말이다. 다른 이들은 보고 있고 알고 있으며 속지 않더라도,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그렇게 지냈다. 찜질방에서, 공원에서 게이들을 만나며 성욕을 해소했다. 낮에는 학생, 알바로, 밤에는 성기를 세우고 바텀들을 찾아다니며 박을 탔다. 당연하게도 이 정체성들은 대립하는 것도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다, 라는 판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 찜질방에 갔을 땐 변태성행위를 한다는 죄책감을 느끼려 애썼지만 곧 사라졌다. 그냥 성행위였다. 나는 남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며 쾌감을 느끼는 남자인 것이다. 그게 다였다. 그렇게 가치 판단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커밍아웃은 겁이 났다.
커밍아웃이란 타인에게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행위이지만, 그전에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를 먼저 승인해야 한다. 이게 ‘나’일까? 이렇게 생활하는 나를 ‘나’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커밍아웃 전에 나 자신에 대한 합의를 먼저 이루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게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그것은 나는 밤새 남자들의 항문에 성기를 박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남자들의 성기를 빨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가 아닌 나 자신에게 말이다. 나는 현실에선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그런 내 행동과 모습이 언어화되거나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모습도 분명히 나였고, 누군가는 그 모습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그게 내가 혼자인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딱히 커밍아웃을 할 계기가 없었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누군가를 나의 동반자로 소개하거나, 자 이들이 내 친구들이야! 라고 소개할 수 있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커밍아웃을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찜질방에서 하룻밤 만나고 얼굴도 모른 채 헤어지는 사람들, 화장실 구멍 너머로 오랄을 주고받은 사람들, 그들만이 내 주위에 ‘동성애자’라는 집단으로, 정확히는 경멸을 띤 언어 ‘호모새끼’에 더 가까운 익명의 무리로 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커밍아웃을 할 수 있도록, 즉 나 자신을 인정하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찜질방에서 처음 만나, 나를 바꾼 누군가와의 연애였다.
산으로 가고 있는 이 후기, <살롱 드 에이즈> 후기를 쓰기로 했을 때 손쉽게 쓸 줄 알았다. HIV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에 만나던 사람이 PL(감염인)이었기 때문이고, 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이런 모임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건 괜찮은 방법이었다. 나는 내가 찜방에 다닌다든지, 노콘 섹스를 좋아한다든지 하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최소한 지금의 내게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읽고 싶은 글도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이 PL이었건 아니었건 그와 상관없이 나는 HIV/AIDS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잠재적 양성’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헤어졌고, 혼자가 되었다. 내 주위엔 다시 찜질방과 화장실과 공원을 배회하는 게이들이 남았다. 나를 윤리적 인간으로 만들어주며, 문란한 성생활의 결과로 HIV를 얻은 게 아니라, 한 파트너를 포용하는 사랑의 과정에서 HIV를 얻었다, 라는 이야기를 쓰려던 의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다. 바뀐 건 없어 보였다. 나는 일요일 종로의 한 모텔방에서 여전히 그룹 섹스를 하고 있었고 그건 여전히 재미가 있었다. 거리에 혼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다. 여태까진 이렇게 살아보았다, 조금만 다른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이 생각이 나를 모임에 오게 만들었다.
주변에 친구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인격적으로 정체화할 수 있는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다만 남자와 섹스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가 양성이 된다면 어떨까? 애초에 혼자였던 사람, 토요일 종로의 포차거리를 보면서도 술 한잔할 사람 없이 공원 등을 배회하다 찜질방으로 향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지난 8월, 인권재단 ‘사람’에서 무지개청소년스페이스 후원을 위한 한여름 밤의 상영회가 있었다. 첫 주엔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씨의 선거운동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영화에 사로잡혀버렸다. 최현숙씨가 어떤 발언을 하던 중에 ‘나는 친구가 없어, 친구가 없어’ 하며 엉엉 우는 장면에서였다. 나는 내가 왜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약 보름의 유세 기간, 그동안 펼친 전략에는 잘된 것도 있었고 잘 안 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어한 것은 어떤 정치적인 성과가 아니었다. 낙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그 선거운동본부에 모인 사람들의 짐작할 수 있는 동기들과, 최현숙씨의 외로움에 대한 응답이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감독은, 혼자이던 최현숙씨에게 친구들이 생긴 것처럼 이야기를 완결해주었다. 나는 그 점에 깊은 감동을, 연출된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감동을 느꼈다.
전부터 생각해왔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데 할 수 없다면 왜 그런 걸까? 그에 앞서,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행위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꺼린다면 무슨 이유에서일까? 내가 만난 PL들은 게이공동체에 나름 잘 어울리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이태원 클럽에서, 종로 거리에서,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보이는 대로 보고 싶어하는 타인의 욕망을 존중해주며) 자기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도 잘 있다. 그들은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잘 들어 있는 듯하다. 그 결말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품지 않음을 연기하는 사람들의 태도, 그 침묵이 나는 밉다. 양성인 게이의 수가 결코 적지 않은 듯한데, 주변에서는 왜 찾아볼 수가 없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마치 내가 혼자인 것처럼 느끼도록, 나만 고립된 것처럼 느끼도록. 그냥 치과 가듯이, 감기가 심해져 병원에 가듯이, 감염내과에 간다, 이러면 안 되나? 에이즈 모임 관련 후기에는 ‘나와는 상관없을 테니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등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있다. 일회성을 띤 봉사활동처럼. 나는 그게 싫고 밉다. 너희는 언젠가 감염될 것이며, 양성인 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도 된다. 그거 별일 아니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다. 염려로 침묵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아니어서, 말할 필요 없는 침묵. 그런 침묵을 기다린다.
내가 양성 판정을 받는다면, 그 다음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병원은 어디로 가야 하고 어디에서 어떤 상담을 받아야 하며, 정보들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지 정리해 매뉴얼을 만들 것이다. 나는 HIV 예방에 별로 관심이 없다. HIV에 감염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도 그다지 없다. 어느 편이든 상관없다. 나는 별로 살아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이후의 삶이다. 이 ‘다음엔 무엇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