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인 2015. 10. 13. 18:56

북경여성대회가 열린 95년에 태어난 쥬리

 

테마송♪ - Glorious (The pierces)

 

10월 10일 대한문에서 개최된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는 6명의 연사들이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외쳤습니다. 행성인 웹진에서는 이들의 발언을 게재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세대, 다양한 성적지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 연결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봅시다. (무대에서 발언 당시 각각의 연사마다 테마송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테마송을 들으며 발언문을 보면, 연사들의 발언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위 테마송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노래의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스케치 바로가기

 

세상은 변할 수 있습니다.

 

인사


안녕하세요, 저는 북경여성대회가 열렸던 95년에 태어나 한국에서 여성이자 성소수자로 살아오고 있는 쥬리입니다. 저의 오늘 발언 제목은 ‘사랑만으론 부족해’인데요, 이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는 차차 발언을 진행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사랑 인트로


오늘은 제가 성소수자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려야겠죠? 보통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분들은 첫사랑을 하면서 자신의 성적지향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던데,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 때 저는 전학을 했습니다.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이 있었겠죠.

 

 

 

그러던 와중 계속 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반 여자 친구였습니다. 이상하게 계속 마주쳤고, 일부러 마주치려고 제가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6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죠.
 
교환일기


혹시 친구들과 교환일기를 써 본 적이 있는 분이 계신가요? 노트 하나를 친구와 돌려가면서 서로에게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는 걸 저는 했었는데요, 그 애와는 쓰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과 썼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 때 썼던 교환일기를 봤더니 온통 그 애에 대한 이야기뿐이더라고요. 주로 걔가 저한테 잘 안 해줘서 서운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너는 왜 그렇게 그 애한테 관심이 많냐, 너무 집착이 심하다, 친구 사인데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이야기들을 저한테 써두었더라고요.
 
연애 인 듯 연애 아닌

 

 

제가 좋아했던 그 친구랑은 점점 가까워져서, 나중에는 그 애 집에 매일 놀러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 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낮에는 집이 비어 있었거든요. 우리는 꼭 연애를 하는 것처럼 설레어하고 질투하고 서운해 했어요, 우리가 하는 게 연애나 사랑 같은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 때 제가 느끼기엔 동성애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동성애를 할 수 있다고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저는 그 애가 왜 이렇게 좋은지 스스로 이해가 안 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움보다는 그 애가 좋은 마음이 훨씬 커서 매일 같이 놀았죠.
 
이별1

 

그러다가 키스를 하게 됐어요. 제가 너무나 간절히 원한 키스였고, 우리 관계가 보통의 친구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서로 그 이상을 바란다는 것을 확인했던 소중한 순간이었어요. 저는 그 소중했던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엄마가 그 일기장을 보았죠. 엄마는 학교에 찾아와서 그 친구의 어머니랑 만나 우리를 어떻게 떼어놓을지 의논했고, 우리는 서먹해졌습니다. 저는 제가 다 망쳐놓았다고 느꼈어요. 제가 여자인 친구를 좋아한 것도 잘못이고, 그걸 들킨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했죠. 그 친구와 저와의 관계가 담임교사에게까지 알려졌었는데, 그 사람은 저에게 ‘아직 어려서 친구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다’라면서 ‘나중에도 계속 여자가 좋으면 외국으로 이민을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만남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중학교에 진학했고요, 그 애는 전화번호를 바꿨고,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2년 후였죠, 중학교 2학년,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우연히 우리는 연락이 닿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저한테 이제 정식으로 연애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동성애임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애인이 되었어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이별2


행복한 나날은 짧았어요. 어느 날 휴대폰으로 전화가 와서 받아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쌍욕을 들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그 친구는 어머니로부터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헤어졌고, 얼마 못 가 다시 만났다가, 또 얼마 못 가 들키고 헤어지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청소년으로서 부모의 감시 하에 놓여 있었고,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만날 시간을 내려 해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학원가는 시간에 맞춰서 학원 건물 옥상에서 기다렸습니다. 학원 수업에 들어가기 전 몇 분가량을 만나곤 했어요. 내 삶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언제 들킬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며 일 년을 연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심한 불안 증세와 우울증을 앓았고, 솔직히 너무나 힘들었고요, 저는 더 이상 그런 연애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해1


네, 저는 사랑만으로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혹독하게 배웠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감정을 알고 인정할 수 있는 환경과,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자기결정권과, 주변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이후에 저는 남자와도 연애를 했습니다. 남자와 연애를 하니까 세상이 굉장히 달라 보였어요. 거리에 들리는 모든 가요들이 이성애를 노래했고, 텔레비전에서는 이성애가 나왔고요. 세상은 이성애에 대해 말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있었습니다. 인터넷만 봐도 여자가 남자와 연애할 때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조언을 주는 자료가 수두룩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남자친구를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내 남자친구’라고 칭할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제가 빼앗겼던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청소년이고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관계를 유지할 자원을 빼앗겼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동성애를 하면서도


이후에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숨어서 동성애를 하느냐, 숨지 않고 이성애를 하느냐 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인권운동을 하고 다른 성소수자들을 만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성애를 하면서도 숨지 않을 수 있고, ‘내 애인’이라고 남들한테 소개할 수 있고, 길거리에서 뽀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제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건 인권운동을 하면서 제 주변 환경이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고 커밍아웃해도 불이익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환경이 갖추어진 곳은 인권운동판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성소수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이 숨지 않을 수 있도록 세상이 바뀌어야 숨고 있는 성소수자들도 자기 자신 그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애의 기준


저한테는 연애상대에 대한 기준이 있는데요, 다른 것도 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 사람이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연애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자신의 삶에서 결정권을 갖고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독립된 사람인가, 또 성소수자 차별하는 세상을 바꾸는데 동참하고 있는가가 제게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저는 우리 관계가 이성애가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숨어야 한다고 의식하면서 연애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이 관계를 유지해나갈 힘과 자원이 없으면 관계를 유지하기 힘드니까요. 저는 모든 성소수자가 그런 힘과 자원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세상도 더 좋아지고, 제가 연애할 수 있는 사람도 더 많아지겠죠.
 
사랑만으로는 부족해2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길거리에 나가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요구하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지들끼리 사랑하면 되지 왜 남들에게 성소수자를 인정하라 마라 하냐?’ 고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만으로는 사랑이 안 되니까, 행복하게 살 수가 없으니까 그런다고요. 사실 동성애자, 양성애자들 중에서도 ‘우리 연애만 잘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사회 문제나 인권운동에 관심 없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는 제도 변화도 필요하고, 사람들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고, 우리의 사랑을 노래하는 노래도, 성소수자가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도 필요합니다. 사랑 고민을 이야기할 상대도 필요하고, 고민 상담할 인터넷 게시판도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여성가족부 규탄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기본조례의 성소수자 관련 조항 삭제를 요구한 것은, 우리의 사랑과 삶을 더 낫게 만들 책임이 국가에 없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존중받아 마땅한 구성원이라는 것, 국가가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민이라는 것, 그리고 여성가족부가 옹호해야 할 여성들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역사 이래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위해 강자들이, 다수자들이, 권력자들이 대신 싸워준 적은 없습니다.
 
마무리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합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는 분명히 이전보다 여성과 성소수자가 살기에 더 편한 시대이긴 하지만, 힘을 모아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약해지고 개개인 각자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느라 여념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각자 스펙만 쌓으면 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의 제도와 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소수자로 잘 살기 위해서, 사랑도 잘 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사귀면 되는 게 아니라, 성소수자에게 좋은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세상은 우리가 불러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첫사랑을 했던 초등학교 시절, 저는 네이버에 동성애라는 단어를 검색해보곤 했습니다. 그 때와 지금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의 양과 질이 천차만별입니다. 저는 우리가, 여러분들이 변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여성가족부가 이번에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삭제를 요구한 일은 부끄러운 역사로 남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