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엄마가 식탁 위에 놓아둔 리더스 다이제스트 크기의 작은 잡지를 보았다. 교회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 길래 무심코 집어 내용을 쓰윽 훑어보았다.
(엄마는 나와 다른 교회를 다닌다)
잡지의 마지막쯤에 자리한 기사를 읽고는 가슴이 두근거려 서둘러 책을 던져버렸다.
"인권이라는 허울을 쓰고 동성애를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매우 위험한" 요즘, 그래서 다른 시선으로 동성애 사역을 하는 왠 미국인 기사를 실어놓았는데, 그 기사의 내용이 참으로 전형적이라 하품이 나올 지경이면서도, 한 존재의 자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내용이기에 머리끝까지 바짝 곤두선다.
그 친구는 성공회 신부 부모 밑에서 자란 게이 청년인데, 성정체성의 혼란이 와 고통 받다가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이제는 "가여운 동성애자"들을 사역하러 다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이다.
이렇게 지루할 수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독교는 이렇게 동성애자들을 대한다. 어쩌면 아예 사탄의 무리 취급보다는 조금 나은 취급인지도 모르겠다만.
*
나는 교회를 다니는 성소수자다.
그것도 매우 열심히 다니고 있으며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10년 정도 전에 교회를 스스로 때려치우고, 유물론자로 살기로 작정했으나 10년 쯤 지나니 유물론과 괴로운 대립 없이도 예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간 나의 그녀가 삶의 마지막 고비에서 주님을 받아들였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 분의 위로 속에 상처를 회복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서울의 작은 민중교회다. 대안교회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이 교회는 중심보다는 변두리를 지향하며, 경제, 문화, 인종, 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나는 이곳이 편하다.
물론 교회의 지향은 그렇다 치고, 그에 속한 사람들마저 지향과 일치하리라는 생각은 순진함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지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믿고 가볼 만하다는 몇몇의 조언에 여전히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신하게 되었다. "다른 그리스도인"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 중 한 명으로서 교회에 함께 다니는 동무와 지난 주, 극장에서 영화 <밀크>를 보았다. 그는, 기대 이상의 감상평을 보내주었다.
"밀크와 예수는 같다. 스스로 소수자로서 그 자신이 되어 싸웠던 사람."
난 그 한 줄의 감상평에 다시 예수를 그리워해본다.
예수는 우리를 내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기꺼이 그 치욕을 함께 하고 그 스스로 성소수자가 되어,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을 사람이다. 그가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왔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스스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분명히 예수는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
13년 전, 나의 열아홉 살 일기 속 가장 큰 화두였던 "하나님이 날 버리셨는가?"와 더불어, 2003년 4월 25일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육우당과, 그새 열아홉의 고통을 잊어버린 채 옆에 있으면서도 육우당의 아픔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못난 나를 돌아보며, 오는 4월 25일에 거리에서 펼쳐지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용감무쌍하고 자유로운 행동에 다시 새 마음으로 함께 하려 한다.
사랑하는 동생 육우당, 예수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분의 무한한 사랑을 모욕하는 기독교의 잘못된 독선과 오만 앞에 기죽지 말자.
나는 “다른 그리스도인”이다. 동성애자를 돌로 쳐 죽이고 4대강 생명을 빼앗으며 전쟁을 일삼는 오만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 낮은 자였던 "예수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 싶다.
육우당이 사랑한 예수도 아마 "그" 였을 것이다.
이경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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