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울 것 같은 눈꺼풀을 뜨고, 듣기 싫은 아침 모닝콜 소리가 나는 곳을 손으로 뒤지고 나서 알람을 끈 뒤 기지개를 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게이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게이입니다. 저는… … 게이입니다.
눈이 떠지고 일어나면, 평범한 학생과 다를 것 없이 화장실로 가서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밥을 차립니다. 밥을 다 먹고, 약을 먹습니다. 저는 환자입니다. 그냥 조금 평범한 환자입니다. 단지 아침에 꼬박꼬박 약을 먹어야 해요. 잊어먹을까봐 늘, 아침에 체크를 하죠. 약은 내 친구입니다. 평생을 함께 해야하니깐요. 어차피 평생 먹을 거면, 익숙해지는게 나으니깐요. 어둠이 내린 집안에 깨어있는 건 저 밖에 없습니다. 고등학생 그렇습니다. 회사원보다, 공무원보다, 아침을 일찍 시작합니다. 모두가 아직 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시간에 아침을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2년 동안 지겹게 입었고, 또 앞으로 1년을 더 입어야 할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향합니다.
저는 아침을 1시간 더 일찍 시작합니다. 학교는 버스를 타고도, 1시간 거리나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먼 거리를 통학하는게 힘들었지만, 이제는 적응되어서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밖을 나서면 어두운 밤 같습니다. 새하얀 입김을 불며, 버스정류장에 서서 파란 버스를 기다립니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고, 하늘을 쳐다보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다짐, 회상, 잡생각 등등.. 그러다보면 익숙한 파란 버스가 도착해 나를 싣고 출발합니다. 버스를 타면,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귀에는 익숙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이어폰을 꼽고 또 생각에 빠집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생각을 하고 천천히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많은 여학생들이 버스를 탑니다. 아마 이 버스는 종점이 어떤 여학교인 것 같습니다. 종점에 다다를때 쯤에는 늘 여학생들로 가득 찬 버스가 되어버리니깐요. 가끔은 이 버스의 종점이 남학교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저의 학교 가는 길이 조금은 즐거웠을까요. 그 버스가 여학교인 종점에 다다르기 전에 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중간에 내립니다. 내릴때 쯤에는 하늘이 아까보단 밝아졌습니다. 이제 슬슬 해가 뜨는 모양입니다. 다시 익숙한 버스를 기다리고, 그 익숙한 버스를 타고 학교를 향해 갑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가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합니다. 넥타이도 제대로 매고, 와이셔츠도 조끼 안으로 바짝 집어넣고.. 아침 등교시간도 선생님과 학생들의 전쟁입니다. 조금이라도, 안 혼나려고 몰래 들어가려는 학생들.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고 혼내려는 선생님들. 그렇게 교실로 들어가면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고, 반가운 인사를 하고, 내 이름이 조그맣게 적힌 자리에 앉아서 수업준비를 합니다. 조회시간에는 담임선생님의 잔소리 같은 말들이 한껏 지나가고, 종소리가 들린 후 수업을 시작합니다. 수업을 하면 모두가 기계 같습니다. 하얀 종이위에 검은 글씨와 알록달록 색색의 볼펜으로 필기된 글씨들. 그것들만 바라보고, 그것들만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기계들.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빽빽이 적어나가는 공책은 이미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러다가, 잠에 덜 깨서 졸고 있는 학생을 보면 선생님은 또 깨우고, 선생님 몰래 떠들다가 들킨 학생들은 또 혼나고. 수업은 이렇게 계속 반복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수업. 기계들. 학생들.
1교시가 지나고, 2교시. 3교시. 4교시가 차례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수업들이 한차례씩 지나가면 점심시간입니다. 그나마 학생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 하루에 한끼, 2,600원이라는 급식비를 내고, 밥을 먹지만 먹을 때 마다 드는 생각은 별로 2,600원짜리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불만을 툴툴 뱉어도, 그래도 먹습니다.
북적거리던 점심시간이 지나가면, 또 한차례의 수업들이 대기중입니다. 잠의 유혹을 버티기 힘든 5교시는 꾸벅꾸벅 졸면서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휙 하고 지나가버리죠. 그렇게 6교시. 7교시. 8교시가 지나간 후에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합니다. 환자라는 이유로 야자를 뺀 저는 책가방을 들고,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고 교실을 나섭니다.
담임선생님은 처음에 환자라는 이유로 야자를 빼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정신력으로 버텨라’ 라는 둥으로 고3이 무슨 야자를 빼냐고 설득하셨죠. 야자요? 네, 물론 할 수 있어요.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 것도 아니니깐요. 저는 겉으로는 환자도 아니니깐요. 그렇지만, 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10시까지 저 진절머리 나는 학교에 남는다면 제 머리는 이미 미쳐버릴것 같았거든요. 결국 몇 번의 설득 끝에 담임선생님을 이기고, 정규수업만 마치고 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익숙한 파란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조금씩 멀어져가죠.
어떻게 보면, 평범한 고등학생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입니다. 어쩌면 조금은 특별할 수 도 있죠.
학교가 끝난 뒤, 집에 가서 쉬거나 혹은 미리 약속을 잡아놓은 스케줄을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집에 오면, 어느새 6시가 넘어갑니다. 그렇지만 저의 하루는 이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종로를 갈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할 수도 있겠죠. 교복을 던져버리고, 깔끔하게 갈아입은 옷으로 나가면, 반가운 얼굴들이 보입니다. 그 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보면 솔직해지고, 학교에서 말 못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죠. 혹은,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힘들 때 함께 고민해주고, 같이 웃어주는 저에겐 새로운 식구 같은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회의도 하고, 앞으로의 대해 이야기도 해봅니다.
때로는 혼자 길거리를 걸으면서, 돌아다닐 때도 있습니다. 조그마한 카페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글도 쓰고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죠.
그리고 하루가 다 지나가서, 집에 와서 잠을 청하고 아침이 오면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죠.
정말 평범할 수도 있는 하루하루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는 약을 먹는 환자이고 버스에 탄 여학생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고등학생 게이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고등학생'게이의 하루는 어떤가요. 꼭 저 같은 하루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벽장속의 게이라면 아직 사람만나는 것이 혼란스러워 밖에 나오는 것을 꺼릴 수 잇죠. 어쩌면 학교를 안 나가고 종로바닥에서 늘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일 수도 있죠.
저는 또 환자입니다. 누군가가 10시간을 일하고 50%의 피곤함을 느낀다면, 저는 똑같이 10시간을 일하고 70%, 80% 또는 100%의 피곤함을 더 빨리 느끼는 환자입니다.
처음에는 하루를 간단히 스케치하는 글을 쓰려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그냥 길거리에 지나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입니다. 그렇지만, 그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죠. 쓰다 보니 전해지는 내용이 없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꼭 모든 청소년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겠죠. 그냥 저는 대한민국의 한 게이 고등학생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고등학생의 게이는 어떤 모습인가요?
류찬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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