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둘째 주 토요일, 그날의 대학로는 맑고 화창했다. 가면을 쓴 혹은 쓰지 않은 10대 성소수자들이 거리에서 "우리가 여기 있어요!" 하고 활발하게 외치고 있었다. 발언이 처음이라 좀 횡설수설했지만 그날 나는 마이크를 잡고 이런 활동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인식, 알리는 것, 의미. 그때 내가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얘기는 그런 것들이었다.
솔직히, 대학로 캠페인과 같은 알리는 활동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위를 하고, 소송을 걸고, 법 개정을 요구하는 그런 활동들에 비하면, 그것은 조금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토요일 단 하루, 종일도 아닌 불과 몇 시간동안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일이 과연 무엇을 바꿔 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발언을 준비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발언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캠페인 그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정체성을 확신한 지 겨우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넉 달 동안 나는 무수히 많은 직·간접적 호모포비아 발언들을 들었다. 나에게 화살이 되어 꽂힌 그 목소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만약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있었더라면, 그들 중 대다수는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다면, 혹은 그들 주변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징그럽다느니 더럽다느니 하고 말하진 못했을 것 같았다. 성소수자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는 상관없이, 최소한, 자신이 방금 한 그 말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우리에 대해 전혀 아는 바 바가 없었고, 따라서 자기의 말에 상처받는 이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그런 말을 내뱉은 거였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들이 '나'를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이혼율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긴 했지만, 10년 전의 시골 동네에서 이혼은 여전히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내 주변의 어른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주변에 이혼한 집 아이가 있을 거란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이라면 분명 큰 파장이 일었을 말들을, 그 사람들은 조금도 걸러내지 않고 쏘아 댔다. 그러다 이혼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그 단어가 입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사람들은 그 말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이혼이,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바뀌게 된 거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가 나의 가정환경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도 줄어들었다.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도, 어디에나 이혼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인식이 확산되고 조금씩 바뀌어가면서, 사람들이 점점 말을 조심하려 하는 게 보였다. 심지어 이혼을 죄악시하던 교회에서까지도, 이혼 가정에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결혼의 신성함을 역설하고 절대 이혼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이미 이혼한 분들은 하나님을 배우자 삼아 잘 살라는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으니까. 여전히 화가 났지만 어쨌거나 그것도 변화는 변화였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인식이 만들어 낸 변화라고 생각했다.
이혼과 동성애는 분명 여러 가지로 다른 문제이지만, 이혼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면 확실히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았다.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차별을 가하고 상처를 가하기 이전에, 다수자는 소수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다수자의 머릿속에는 소수자가 없다. 있다 해도 우스꽝스럽게 왜곡되고 일반화된 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박힌 편견을 뽑고, 우리는 당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언제나 당신의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놓는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인식개선의 첫걸음이 바로 알리는 활동이라는 걸, 발언을 준비하면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_ 사진 출처 _ 연합뉴스
결국, 그런 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일도 느리지만 다른 방식의 투쟁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우리를 비정상적인 극소수로만 여기는 그릇된 사고에 맞서 반격을 가하는 게 바로 대학로 캠페인과 같은 알리는 활동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알리는 것과 싸우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알리는 것이 곧 싸우는 것이며 때로는 싸우는 동시에 알리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그 둘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떼어 생각할 수 없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결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를 돌리는 힘은, 자긍심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아웃팅의 공포를 이기고 대학로 인파 한복판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건, 우리에게 자긍심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대학로를 행진하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혹시나 아는 얼굴이 보일까 열심히 좌우를 살폈다. 그러나 보이는 건 '저게 뭐야?' 하는 표정을 지은 낯선 얼굴들 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 소리 질렀다.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상관없을 것 같단 위험한 생각을 잠깐 했다. 어디선가 들려온 '동성애자래' 하는 말에, 그냥, 웃었다. 바뀔까, 바뀔 수 있을까를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 모든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상관없이, 그날의 대학로는 맑고 화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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