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조되었지만, 이미 준비된 시작
준비
두어 달 전인가 정숙에게서 HIV/AIDS 인권팀 첫 모임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굳이 팀을 만들지 않았던 시절부터 동인련은 감염인 인권활동을 주력사업으로 해왔는데, 팀을 만든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리고 모임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지도 자못 궁금했다. 그렇게 찾아간 첫 모임. 우리는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나 정보들을 공유했고, 앞으로 인권팀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간담회를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건 인권팀 두 번째(세 번째였나?) 모임에서였다. 간담회라는 격식을 갖춰 일종의 ‘신고식’을 하자는 것이다(귀찮아 -_-). 새로운 행사나 캠페인을 꾸리게 될 때, 으레 총대 맬 사람이 먼저 입을 열게 된다는 불문율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임에서는 서로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얼떨결에 나도 사회를 보겠다는 말을 뱉었다.
간담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HIV/AIDS와 감염인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나눠온 데다, 이미 많은 경험과 자료들이 축적된 상태였기에 준비에 있어 막막하거나 부담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간담회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 동인련 내에서 HIV/AIDS 인권팀의 발족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인권팀의 출발에 앞서 활동이 갖는 정당성과 공감을 얻어내고, 활동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번 간담회를 통해 단순한 신고식이 아니라 목마른 인권팀의 시원한 샘물 같은 걸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바람을 고려하여, 간담회에서는 그동안 동인련에서 해왔던 HIV/AIDS 인권활동들을 소개하고 한국사회에서 감염인의 삶을 공유하는 자리를, 이어서 참석자들 간에 인권팀의 방향과 과제를 토론하는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시작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홍보와 섭외, 발표자료 준비 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 역시 사회 보면서 폐 끼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간담회 전날 몇 마디의 멘트를 준비해갔다. 간담회 사흘 전쯤 공지에는 참가자가 적을 경우를 대비하는 보충의 내용들이 있었다.(자기소개를 하겠다는 정도…) ‘소규모로 진행되겠구나.’ 라는 예감이 지나갔다. 하여 간담회장에 들어서서 시작을 기다리기 까지만 해도 편한 마음이었건만, 간담회를 시작하고 조금씩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나중에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25명 쯤 되는 참석자 속에서 시작된 간담회는 중간쯤 이르러서는 ‘자체추산’ 40여명에 가까운 참가인원들로 늘어났다.
발표
간담회는 정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시작했다. 본래 계획대로 두 가지 주제, 지금까지 동인련이 해온 HIV/AIDS 활동 소개와 감염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발표했다. 다만, 장치상의 문제로 순서가 바뀌어 두 번째 주제를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감염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는 동인련 회원이면서 동시에 감염인 인권운동의 선봉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윤 가브리엘이 해줬다. 가브리엘은 감염 이전 에이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특히 감염을 알게 된 이후 겪게 된 삶에 이르기까지 본인의 개인적인 소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우리는 투병생활과 쉼터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위축되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 중 하나였던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가졌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내가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라는 불만과 더불어 자신의 처지를 듣고 끌어안아준 친구 덕분에 고립된 벽을 부수고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소회, 그리고 이후 감염인 인권활동을 시작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은 감염인의 인권을 위해서 감염인 자신의 각성과 자부심이 필요하다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조언도 덧붙였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가브리엘을 보고 동인련 친구들을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은 감동과 힘을 얻고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감염인의 모습으로 사회에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고 있는 가브리엘의 발표는 개인사를 넘어 활동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듯 했다.
동인련 2007년 퀴어문화축제 참가단 에이즈와 연대 'AIDS & Solidarity +' 행진
두 번째 섹션으로 동인련 HIV/AIDS인권팀 활동가 정숙의 발표가 있었다. 계획에는 그동안 동인련이 해왔던 HIV/AIDS 인권활동을 정리해서 소개해주는 것이었지만, 발표 내용은 동인련의 활동 뿐 아니라 활동에 있어서 필요한 기본 정보들과 해외의 초기 활동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숙은 질병의 발생과 한국사회에서의 등장, 이후 예방사업의 성과와 한계에 이어 동인련 및 타 단체들의 감염인 인권활동, 최근 직접 거리에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감염인 당사자들의 현재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줬다. 감염인 인권운동은 길지 않은 역사를 갖는 활동이지만, 30분 동안 발표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시도이다. 하지만 정숙의 편안한 분위기 조성과 더불어 많은 기사와 광고들, 통계자료와 활동기록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게이총각의 PPT 덕분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토론
두 개의 발표가 끝나고, 참가자들의 토론이 바로 이어졌다. 사회자의 재량으로(ㅎ) 토론의 흐름은 일상생활 속 차별의 흔적으로부터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편견과 소외를, 이어서 감염인들과 어떻게 연대를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짐으로써 인권의 거리를 좁혀가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토론 초반에는 생활 속 경험으로 체감되는 편견과 차별로 점철된 매체와 정보들에 대한 지적과, 이들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먼저 보건소나 공익광고들과 같이 객관적인 척 하면서 들이대는 잘못된 정보들은 이미 질병에 대한 악의성을 함축하고 있는, 그런 점에서 일개 드라마를 보고 게이 며느리 운운하는 신문광고와 다를 바 없다는 의견이 포문을 열었다. 그런가하면 감염인임을 밝힌 참석자가 가브리엘의 경우와 달리 자신의 감염을 확인했던 당시, 기댈 대 없는 자신의 처지에 인생을 포기하고 지냈던 경험을 이야기해주자 장내가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순간 경험과의 거리가 느껴졌다. 이 거리를 좁히는 것이 사회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 참가자들 저마다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논점을 옮겼다.
사회의 차별과 배제가 있더라도 감염인들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신뢰와 연대를 유지한다면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커뮤니티 내부에서 감염인을 대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서로의 상처를 감싸주고 안을 수 있는 자세는 서로 간의 연대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계기로 연장된다. 하지만 커뮤니티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참석자들은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범이라는 편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질병과 감염인을 철저하게 타인으로 밀어내는 사례와 저마다의 경험들을 공유했다. 특히 신체접촉이 비일비재한 찜질방 등에서 감염인의 출입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사례, 이반시티 내부에서 활동하던 친구의 감염사실을 그대로 아웃팅시키고 매장시키다시피 했던 사례는 감염인을 하나의 숙주 취급하는 외부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었다.
실제적인 감염사실보다 감염을 알게 된 시점에서의 충격이 크다는 지적, 그것은 아마도 이미 만성화된 질병의 부담보다 주변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반영업소 사장들이 감염인 커뮤니티에 몰래 잠입한다던가, 악의적으로 감염인 커뮤니티를 공격하기도 한다는 커뮤니티 내부의 사례들을 들으면서, 감염인을 향한 성소수자커뮤니티의 내부적인 공격 수위는 감염인 대다수가 그들과 친밀한 관계범주에 있는 만큼 더욱 직접적이고 잔인하며 더불어 그로 인한 상처는 배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토론들과 다르게 이번 간담회는 주제가 주제였던 만큼 숙연함을 동반하는 열띤 분위기가 지속되었다는 인상이 짙다. 성소수자 내부의 다양한 경험은 차별과 편견의 분위기 속에서 상처받고 고립되는 삶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감염인과 비감염인의 삶의 온도차는 간담회 내에서도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에서 인권팀은 많은 캠페인과 활동도 중요하지만 감염인과의 만남과 연대도 중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토론 중에는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왔다. 사방 천지에 있는 광고나 인쇄물 등에 아무렇지 않게 실린 악의적인 문구들에 대해 ‘뻥치시네!’ 스티커를 배포해서 붙이고 다니자는 귀여운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다. 퀴어퍼레이드 당일 감염인 프리허그는 어떨까 하는 발랄한 의견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아이샵 등에서 검사를 받은 이후 양성판정을 받고 당장 기댈 곳이나 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 단순히 감염인들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외부의 비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 차별 사례나 인식 조사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 큰 틀에서의 정책 변화의 요구와 더불어 용어 변경이나 상황에 대한 대처방안 모색 등의 구체적인 실천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같이, 멀리 보고 실천해야 할 과제들도 주어졌다.
마무리
간담회는 두 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람들은 음주도 곁들이면서 편하게 얘기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땅만 보고 있어서, 적당한 타이밍에 끝냈다. 간담회 때 이야기가 부족(?)했던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후 뒤풀이가 그렇게 재밌었다고 한다. 일을 핑계 삼아 그 자리를 빠진 게 지금도 후회된다.
간담회 후기를 마무리하는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니, 인권팀을 꾸리고 굳이 선포까지 했던 것은 감염인 인권활동에 있어 새로운 터닝 포인트라는 표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팀’이라는 명칭자체가 거창한 훈장이나 명패는 아니더라도, 팀이라는 이름 속에 이전보다 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더불어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졌다는 생각도 든다. - 우리는 질병에 대한 정보를 습득해야할 뿐만 아니라 많은 외부 활동들을 통해 주변에 둘러쳐진 편견과 차별의 벽도 부숴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감염인들의 아픔과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연대’, ‘아래로부터의 감수성’일지 모른다. 인권팀이라는 이름 아래 모이긴 했지만, 우리의 활동범위는 인권을 넘어설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권팀 발족기념 간담회는 (발족이라는 촌스러운 억양을 대신할 ‘쿨’한 부제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만큼) 급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에게 많은 의미부여가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권팀은 간담회 이후 본인들의 어깨에 가중된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동지들을 새로 알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고 또 구체적인 실천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슴이 벅차다.
웅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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