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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촛불의 바다 속으로 뛰어든 무지개 _ 6월호

by 행성인 2008. 6. 21.

 

나라 _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활동가

 

  5월 초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시작된 운동이 6월 10일 1백만 개의 촛불로 성장하면서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시작은 미 쇠고기 수입 반대였지만 처음부터 의료보험 민영화, 학교 자율화, 대운하, 공공부문 민영화를 반대하는 요구가 함께 터져 나왔다. 이렇게 이명박이 추진하려는 온갖 재벌천국 서민지옥 정책에 대한 반감과 국민의 목소리에 군홧발과 몽둥이로 화답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가 운동을 거대하게 성장시킨 진정한 ‘배후’였다.


  운동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명박은 운동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면서 촛불을 끄려는 꼼수에만 골몰하고 있다. 운동은 우익들의 공격뿐만 아니라 향방을 둘러싼 여러 물음들에 직면하고 있다. 촛불을 지지하고 함께한 이들은 저마다 촛불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그 속에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성소수자로서, 성소수자들과 함께 촛불 속에 있었던 경험과 감상을 나누고자 한다. 그러나 운동은 계속될 것이고 계속돼야 하며, 무지개도 끝까지 함께하길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과는 별개로 이명박에 맞선 이 운동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길 바란다.

 

촛불 바다 속 무지개 깃발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는 성소수자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사회운동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왔다. 그래서 이전에도 반전집회, FTA 반대 집회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미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에도 동인련은 회원들과 함께 5월 3일부터 꾸준히 참여했다. 5월 17일에는 무지개행동 발족식 뒤에 청계광장에서 벌어진 집중 촛불문화제에 참여해 동성애혐오 반대의 날을 알리고 이명박에 반대하는 내용의 리플릿을 배포하기도 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동인련 참가단은 적극적으로 ‘성소수자 차별 반대, 이명박 반대’를 외쳤고 퍼레이드 뒤에 시청광장 촛불집회에 깃발을 들고 함께했다. 촛불집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동인련은 이전과는 또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촛불집회에는 운동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속에는 당연히 사회의 일부인 성소수자들이 존재했다. 동인련은 좀 더 많은 성소수자들과 만나기 위해 무지개 깃발만 들고 집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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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동상 앞에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



 아무 글씨도 없는 여섯 색깔 무지개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값진 경험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경로로, 대체로는 자발적으로 촛불 집회에 참가한 많은 성소수자들이 무지개 깃발을 보고 우리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성소수자들은 뜻밖의 무지개 깃발을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했다. 개인적으로 참가했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함께 행진을 하기도 했고, 촛불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아는 얼굴, 모르는 얼굴 하루에도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이 이삼십 명을 훌쩍 넘는다.


 우리가 만난 이들도 무지개처럼 다양했다. 정체성도 나이대도 직업도 사는 곳도 심지어는 국적도 다양한 LGBT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지개 깃발이 촛불 속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성소수자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회를 살아가며, 이명박에 맞서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을 무지개 깃발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무지개 깃발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어느 단체 깃발이냐, 무슨 뜻이냐 하는 질문이 집회와 행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처음 무지개 깃발을 들고 나간 날 질문 공세에 시달린 다음에는 성소수자에 대해 바로 알리는 내용의 리플릿을 준비해 가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기도 했다. 단연 눈에 띄는 무지개 깃발은 행진 속에서 이정표 구실을 했고, 동인련 회원들이 만들어 간 알록달록한 ‘이명박out' 머리띠 선전물은 인기만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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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인련은 이명박을 봉헌합니다, 이명박 OUT 등 다양한 머리띠로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에게 무지개 깃발 아래 우리들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사실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데, 자생성이 넘쳐나고 규모가 큰 촛불집회의 성격 때문에 행진을 하다보면 집회 참가자들이 자연스레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누가 동성애자인지, 누가 이성애자인지, 바이섹슈얼인지, 트렌스젠더인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실,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며,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부당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무지개 깃발 바로 뒤에 유모차를 끌고 가는 이성애자 부부가 서는 재미난 광경이 흔히 연출된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는 이런 식이 아닐까? 우리는 다르다. 그런데 사실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한다.


 1백만 명이 행진한 6월 10일 촛불대행진에는 무지개행동 차원에서 성소수자 참가단이 꾸려졌다. 워낙 광범한 지지를 받는 운동이기 때문에 집회 참여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동인련이 적극적으로 집회에 참가하면서 많은 성소수자들을 만나고 지지받았던 경험 때문에 성소수자 운동이 자신감 있게 1백만 행진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 참가단 대열은 1백 명을 넘었고, 참가단이 만든 무지개 팻말도 매우 인기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쓴 1백만 촛불 속에 함께한 무지개 행렬은 한국 성소수자 운동 역사에서도 멋진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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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 행동'(http://www.lgbtact.org) 이
 6월 10일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나눠준 손 피켓



 

촛불과 함께 나아가자

  50일 넘게 계속되고 있는 촛불 속에서 우리는 그 일부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성소수자와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 모두를 말이다. 이런 경험을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는 운동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여전히 우리를 신기한 듯, 당황한 듯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우리는 우리대로 아직 성소수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조심스럽다. 그래서 ‘동성애자’ 또는 ‘성소수자’라는 글자 대신 무지개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도 부담스러워 멀리서만 지켜보기만 하는 성소수자들이 훨씬 더 많다. 차별과 편견이 여전한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나 무지개가 촛불 속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경험 자체가 성소수자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행동이었다. 당면한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을 분리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강화, 경쟁이 아니라 연대가 중심이 되는 세상은 성소수자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성소수자들이 이 운동에 함께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오는 이유와 같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고, 이명박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 대다수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입시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 취업 걱정을 하는 대학생, 피곤한 직장인들이다. 여고생들이 불붙인 촛불에 감동하고, 경찰폭력에 분노하고, 귀 막은 이명박이 너무 짜증난 사람들이다.


 촛불이 만들어낸 광장은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큰 자유를 선사했다. 매일매일 무지개 깃발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휘날렸다. 촛불 속에서 새롭게 저항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만났다. 성소수자 운동을 통해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지 모르는 갖가지 사람들과 우리가 한편에 섰다


 동인련은 촛불 운동의 경험이 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성소수자 해방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꾸준히 연관 맺으면서 대화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이 운동의 발전에 기여하고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을 꾀하자. 촛불 속 무지개와 함께하면서 나 자신부터가 많은 고민을 하게 됐다. 우리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대해, 성소수자 운동이 성소수자 대중과 만나는 방식에 대해, 성소수자 해방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들도 함께 풀어가 보자.


 기억하자.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반란이 승리했을 때,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사회적 권리가 확대될 때 성소수자들의 운명도 전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촛불이 앞으로 나아가고 승리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촛불은 계속돼야 한다. 그 속에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여섯 색깔 무지개도 계속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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