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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성소수자 인권포럼

제 10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중 '성소수자 부모들의 커밍아웃 스토리' 후기

by 행성인 2018. 3. 1.

일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부모모임, 웹진기획팀)

 

 

10회차를 맞이한 올해의 인권포럼에서,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았던 기획으로 세션에 참여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부모모임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민 끝에 우리는 ‘커밍아웃을 받은 부모가 겪는 6단계’를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부모모임 정기모임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6단계’, 이는 Tom Sauerman이 PFLAG Philadelphia(미국 필라델피아 지부의 성소수자 부모, 가족 모임)과 함께 처음 발표한 것으로, 충격-부정(거부)-죄책감-감정 표출-결단-참된 용인으로 구성된다. 암에 걸렸음을 알게된 환자가 이를 용인하게 되는 단계와도 닮아 있다고 한다(6단계를 거치는 시기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며, 이미 거쳐 온 단계로 퇴보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부모모임을 방문하여 이러한 ‘6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약간 놀랐는데, 커밍아웃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안 받아들여지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의 단계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의 소통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과정’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준비하는, 혹은 성 정체성/지향성 문제로 가족과 갈등을 빚고 있는 다른 성소수자들 역시 이에 대한 이해가 미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부모모임의 운영위원 부모들이 각 단계를 어떻게 거쳐왔는지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세션을 준비했다. 부모모임의 대표이자 게이 아들을 둔 엄마인 하늘님께서 ‘충격’ 단계를, 역시 게이 아들을 둔 지인님께서 ‘부정(거부)’ 단계를,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라라님께서 ‘죄책감’ 단계를, 행성인 회원 빗방울의 엄마인 비비안님께서 ‘감정 표출’,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지월님께서 ‘결단’,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 자녀를 둔 나비님께서 ‘참된 용인’ 단계를 맡아 이야기해 주셨다.

 

칼바람이 부는 추운 날이었지만 강의실에는 60명 가량이 모였다. 성소수자 인권포럼과 같은 행사에 대한 니즈(Needs)가 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지인님께서 ‘많은 성소수자들이 부모님께 커밍아웃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지만, 커밍아웃을 받은 이후 부모가 어떠한 감정 상태를 거치게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해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주지하며 앞서 언급한 6단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세션을 시작했다.

 

하늘 (촬영: 성소수자 인권포럼 기획단)지인 (촬영: 봉레오)

 

하늘님과 지인님은 각각 10년 전, 5년 전 자녀에게 커밍아웃을 받았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적잖은 충격을 받고, 자녀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 힘들어했던 이야기부터 ‘네가 동성애자일리 없어, 그냥 헷갈리는거야’라고 상처주는 이야기를 했던 경험까지. 부모모임에 참여하는 많은 당사자들이 ‘저 부모님들은 어떻게 저렇게 자녀를 잘 이해해 주실까, 왜 우리 부모님은 저러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하늘님과 지인님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참된 용인’ 단계에 이를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님과 지인님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아래를 클릭

[커밍아웃 스토리] 2. 나를 성장시켜준 아들

[커밍아웃 스토리] 3. 공짜로 얻은 내 큰아들에게

 

라라 (촬영: 봉레오)

 

이어 라라님은 그간 진행되어 온 부모모임에서 나누었던 부모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죄책감’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내 아이가 성소수자라니, 내가 잘못 키운 탓은 아닐까’하는 죄책감부터 ‘내가 내 자녀를 혼자 힘들어하도록 방치했구나’라는 감정까지, 그간의 부모모임 대화록에서 발췌한 내용을 분석하여 들려주시던 라라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라라님의 커밍아웃 스토리는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성소수자의 엄마입니다

 

비비안 (촬영: 봉레오)

 

‘감정 표출’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비비안님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시작하셨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충격-부정-죄책감의 단계를 거친 이후, 혹은 거치는 동안 부모는 자녀에게 본인이 겪은 감정들을 내보이게 된다. 비비안님의 경우 게이인 아들의 커밍아웃을 받은 후,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여 아들에게 ‘엄마가 힘든 삶을 살게 낳아줘서 미안해’라고 문자를 보내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 때문에 오히려 아들이 오랫동안 마음 아파했음을 늦게야 알게 되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설사 그 감정이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우선은 정돈된 말로 표현하는것이 부모에게나 자녀에게나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녀가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지금 부모님이 6단계 중 어느 단계를 지나고 계시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월 (촬영: 봉레오)

 

그쯤 되니, 부모들뿐만 아니라 세션을 들으러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거나 진행을 보조해주는 인권포럼 스태프 분들까지 울고 계셔서, 아예 두루마리 휴지를 비치해 두고 이후 순서를 진행했다. 앞선 4단계를 거치고 나면 부모는 어떤 방향으로든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결단은 ‘나는 내 자녀를 변함 없이 사랑해야겠다’일 수도 있고, ‘나는 내 자녀가 성소수자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일 수도 있으며, 번복 가능하다. 지월님께서는 해외에 떨어져 살던 자녀가 호르몬 치료를 시작한 이후에 커밍아웃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빠른 시일 내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비 (촬영: 성소수자 인권포럼 기획단)

 

6단계의 마지막이자 목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참된 용인’, 모든 부모가 이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나비님께서는, 자녀가 레즈비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가슴과 성기 수술을 원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느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자신은 이전에도 자녀를 용인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저 ‘내가 불편하지 않은 것만 괜찮아’라는 생각일 뿐이었다는 것.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 ‘내가 불편한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느꼈다.

 

 

촬영: 봉레오

 

인터뷰며 정기모임, 언론보도 등 여기저기에서 참 많이 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패널들은 이번에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듣는 사람들 역시 울고 있었다. 이어진 질문 시간에서는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고민하는 당사자, 이미 커밍아웃을 했는데 부모님께서 6단계 중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다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커밍아웃을 받았는데, 이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커밍아웃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묻는 부모도 있었다. 세션이 생각보다 길게 진행되어 짧게 질의응답을 마치고 나니 강의실 밖 부스에 찾아와 질문을 하는 분들도 계셨다. 인권포럼에 발제팀으로 참여하는 것이 나는 처음이었는데, 참가하신 분들이 다들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해 보여서 나에게도 정말 많은 힘이 되고, 활동 뽕(?)을 열심히 충전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성소수자 부모모임은 ‘성소수자와 가족’을 주제로 강연이나 교육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당사자와 가족들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허프포스트코리아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다. 올 5월경에는 비슷한 주제로 단행본 역시 발간할 예정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 닿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성소수자 부모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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