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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차별 혐오/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전국순회 평등버스, 13일의 기록

by 행성인 2020. 9. 21.

지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정책담론팀장 및 평등버스 공동단장)


지난 8월 17일부터 29일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평등버스가 전국을 순회하고 돌아온 지 2주가 훌쩍 지났습니다. 저는 평등버스 공동단장으로 13일의 일정에 함께 했어요. 다녀온 뒤로 며칠 여독을 풀었고 평등버스 일정에 대한 평가와 남긴 과제들을 정리 중에 있습니다. 제가 13일 동안 평등버스에 합류할 수 있었던 데는 행성인 동료 회원들의 지지와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활동이 행성인의 중요한 연대활동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활동가로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동료 활동가와 회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한편으로 지지와 뒷받침이 있었던 것은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이 성소수자 운동에 있어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평등버스가 순회하는 내내 성소수자의 존재는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차별금지법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혐오선동세력의 지긋지긋한 거짓선동이 따라붙은 만큼 동료 활동가들의 지지와 성소수자 당사자의 발언이 뭉클하고 힘차게 이어진 여정이었어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 성소수자 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 운동이 더 강력하게 힘을 모아야만 하는 이유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어요. 

한편 평등버스의 여정은 폭염이 내리쬐고 태풍이 올라오고 무엇보다 코로나19의 확산에 따라 더없이 조심스러운 여정이었습니다. 방역을 전담했던 활동가의 시름은 날로 깊어지고 지역 일정은 때에 따라 계속 수정되며 문화제에는 사람들을 초대하기가 어려웠어요. 평등버스에 탑승한 10여 명의 여정이 아니라 평등을 열망하는 모든 한 명 한 명의 여정임을 알기에 더욱 사람들이 함께 모이지 못했던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당초 행성인에서는 매 문화제마다 운영위원들이 돌아가며 문화제에 깃발을 올리기로 했었어요. 지역에서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성소수자들이 한 데 모인 작은 축제가 되기를 바랐었지요. 아쉽게도 대전과 천안에서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코로나 재확산의 상황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무탈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출발일이 며칠만 더 늦었어도 예정한 일정을 다 소화하기 어려웠을지 몰라요. 일정을 마친 지금 평등버스는 해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에 더해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고 연결하며 지역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는 데 큰 성과를 두고 있습니다. 

1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시죠? 이제 그 여정 속으로 쏙쏙 들어가 볼까요. 

대전문화제에 펄럭인 행성인 깃발


그 밤 뒤풀이는 진리였네

시작은 행성인 사무실 앞 치킨집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오랜만에 가진 뒤풀이에서 회의에서도 핫했던 차별금지법이 역시나 또 화두가 됐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더라, 차별금지법엔 성소수자들만 목매는 것 같아, 차별금지법 제정되면 성소수자들 다 뛰쳐나오지 않을까, 푸념과 꿈이 뒤섞인 그런저런 이야기들이 맥주잔을 타고 넘실대던 끝자락에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자는 말이 나왔다. 그 순간 광채가 우리를 비췄던가. 모두가 들뜬 듯 목소리 톤이 높아지며 너도 나도 한 마디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차제연에 제안해보자, 안 되면 우리끼리 모닝 타고 한강이라도 돌자! 진짜다! 진짜? 진짜! 술 먹다 말고 구호라도 외칠 기세로 다짐에 다짐을 더했더랬으니 참으로 결기 흐르는 밤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차제연에 조심스레 제안했고 차제연 내부에서도 국회 대응과 함께 국토대장정, 행진 등의 가시적인 캠페인 논의가 없던 것이 아니었던지라 마치 미리 다 알고 있었던 마냥, 마치 모두의 머릿속에 이미 평등버스가 들어있었던 마냥, 여기저기 다시 아이디어가 샘솟더니 단박에, 그렇게 순식간에, 전국 순회 평등버스는 급물살을 탔다. 아뿔싸! 진짜로 이뤄지게 생겼다.
아니, 모두가 아는대로 이미 이루어졌다.

치킨집에서 쏘아올린 공은 약 한 달여의 시간을 지나 8월 17일에 닿는다. 준비기간이었던 한 달의 시간도 쓰자면 한 바닥이겠으나 여기서는 함께 준비한 활동가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 날은 8월 17일. 평등버스가 위용을 뽐내며 실체를 드러낸다. 기자회견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한 입으로 감탄사를 쏟아낸 그 순간의 환희를 잊을 수 있을까. 어제까지도 아니, 사실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버스를 탈까 의심했던 일이, 정말로 일어날지 몰라 꿈같던 일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진다.   
이제 진짜로 평등버스가 차별금지법을 함께 말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출발한다. 과연 어떤 풍경들이, 사람들이, 이야기들이 우리를 맞이할까. 

 

8월 17일, 평등버스 출발 기자회견에 모인 행성인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13일의 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그중 가장 먼저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416 유가족 협의회 간담회 때 들었던 이야기다. 기획단에 함께 한 양한웅 동지가 유경근 위원장님께 성소수자 동지들을 위해 한 마디 부탁한다고 청했던 데 대한 답변이었다. 유 위원장은 성소수자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그들의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에 공감할 수는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유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진실을 밝히고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유가족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손수 만든 물품을 챙겨 들고 일손이 필요한 곳, 도움이 필요한 곳, 사람들이 모인 곳 어디든 달려가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유가족임을 밝힐 것 없이, 내 아픔을 드러내 보일 것도 없이 여느 일상인 듯 사람들을 만났고 어울렸고 그렇게 돌아온 밤에는 시꺼먼 속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다시 집을 나섰다. 그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점점 더 곁에 선 사람들이,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 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니 고통스러워도 두려워 망설여지더라도 용기를 내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성소수자 운동이 지금껏 해왔고 앞으로 더 해야할 활동의 방향을 핵심적으로 짚어준 말이었으나 무엇보다 평등버스의 의미를 관통하는 말이었고 그때까지 지난 10여 일의 여정을 응축하는 말이기도 했다. 평등버스가 거쳐온 장면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행사가 끝나고도 한참을 서성이던 어느 중년 여성이 있었다.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묻자, 그저 이곳에서 이런 행사를 열어주어서 너무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원주에서는 레즈비언 딸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뿌듯하다던 성소수자 부모님의 발언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점거한 네거리에 울렸고, 순천-여수-목포를 잇는 전남의 긴 여정을 휠체어를 타고 함께 한 전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와 포항에서부터 대구까지 평등버스가 달리는 길을 자전거로 함께 달리며 응원한 이도 있었다. 세월호가 누운 목포신항에서 쨍한 태양 아래 흔들리던 노란 리본의 아릿한 풍경도 잊기 힘들다. 지나가는 평등버스를 먼저 보고 연락해준 울산 장애인콜택시 부르미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평등버스를 보고 신나 하던 모습과 폭염 속에 20분을 넘게 걸어오고도 흔쾌한 미소로 기자회견을 함께 준비한 한동대 해고 투쟁 청소 노동자들의 여유,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아침 선전전을 진행하는 중에 지나가던 요구르트 판매 노동자로부터 받은 요구르트 한 봉지의 성심은 평등버스에 힘을 실어준 노동자들의 얼굴이다. 한편으로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앞의 광활함을 배경으로 매일같이 선전전을 펼치는 비정규 노동자들과 불법파견에 맞서 투쟁하는 평택의 현대 위아 노동자들, 그리고 손배소 사슬에 여전히 묶여있는 쌍용차 복직 노동자들의 분투는 노동 현장에서의 차별 문제를 절절하게 실감케 했다. 지난하고도 긴 시간의 투쟁 속에서 얻은 자기 성찰로 울림을 준 이들도 있다. 부산에서 만난 김진숙 지도는 과거 피해자였던 여성을 몰아세웠던 자신을 담담하게 성찰하며 차별은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짚었고, 풍산마이트로텍지회 해고 투쟁 노동자는 자신을 꼰대라고 밝히며 그러나 투쟁하면서 깨친 자기 경험으로부터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는 발언을 남겼다. 

이들 모두에게 차별금지법은 내 삶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연대이기도 했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는 각자가 살아낸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며 이 모든 장면에 연결되었다. 언어를 넘어 삶이 닿는 느낌이었다.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이 도돌이표처럼 찍힌다. 

 

한동대 해고 투쟁 청소 노동자들과 함께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당신에게도 필요한 차별금지법

평등버스가 가는 모든 곳에 지지와 응원만 있던 것은 아니다. 혐오세력은 포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훼방을 놓기 시작해 이후 일정의 모든 곳에 나타났다. 
기자회견 장소에서 불과 5미터도 채 되지 않는 곳에서 마주보며 피켓을 드는 것은 기본이었고 발언자가 한 마디 할 때 같이 반응하며 비아냥대거나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서로 지킬 것은 지키자고 어르기도 해 보고 무시해보기도 하고 피켓을 가려보기도 했지만 피켓을 들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훼방하거나 막무가내로 악다구니를 쓰거나 폭언을 퍼부어 댔다. 평소 그런 폭언이나 행위에 대체로 무반응으로 일관해온 나 같은 사람도 언성을 높여 대거리를 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분노와 스트레스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이 일었던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충남에서는 한 여성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참 끈질기게 소리치며 훼방을 놓던 분이었는데 발언자의 한 마디에 더욱 흥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혐오세력이라고 하지 마! 누구더러 혐오래. 난 혐오세력이 아니야. 네들이 나를 혐오하지." 진심으로 억울한 말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도 혐오는 싫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혐오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혐오하고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차별하는 것을 끊고 차별이 무엇인지 말하고 차별받는 이들이 자기 경험을 차별로서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익산에서 아침 선전전을 진행할 때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혐오세력이 함께 나와있었다. 우리는 사거리에 흩어져 피켓을 들었고 반대쪽에서도 우리와 섞여 유인물을 나눠주며 같이 선전전을 하는 형세였다. 아침 식사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사거리 신호등 앞에 섰을 때 중년의 남성이 조용하게 유인물을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반대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를 보고 웃으며 "저는 찬성하는 사람이에요." 하고 답했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왜 찬성하냐고 물었고 나는 "차별받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했다. 그는 살짝 높은 언성으로 "아가씨한테 나중에 남편이 있을 거고.." 끝까지 들어볼 것도 없이 나는 말을 잘랐다. "저는 남편이 없을 거에요. 성소수자거든요. 저는 성소수자에요."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말했다. "아니, 나는 차별 안 해요. 성소수자면 조용히 살면 되잖아. 왜 나와서 시끄럽게 해요.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살면 되잖아. 그러니까 나도 나올 수밖에 없다. 내가 차별을 받는다니까." 그는 뒤이어 설교를 못하게 된다면서 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면서 내가 성소수자라고 말했던 순간 흔들리던 동공이 떠올랐다. 통쾌했다. 

그들과 대치하는 긴장 속에 행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를 때마다 간절히 바랐다. 차별금지법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절벽 끝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법이라는 것을, 바로 그 기울어진 운동장에 당신도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때문에 누구의 존재를 부정하며 밟고 선 자유의 행사는 결국 자신의 권리도 제한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서는 그마저의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광주에서 발언 중인 지오 공동단장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 '노네임', 그리고 동지들

혐오세력의 공세에 우리가 맞선 힘은 다름 아닌 흥이었다. 그 흥의 중심에 노네임의 활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노네임은 평등버스 기획단 율동팀이다. 이들에게 처음부터 이름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준비 과정에서 문화제마다 공연팀을 섭외하기가 어려웠는데 기획단 안에 노래가 가능한 활동가가 있고 율동은 배우면 가능하니 우리가 하면 된다는 근자감으로 급히 결성한 것이었다. 그렇게 급조된 율동팀이었는데 같은 동작을 따라 하며 몸을 쓰는 행위가 주는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네임이라는 이름이 생긴 곳은 목포에서였다. 그새 6명으로 늘어난 율동팀이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우리에겐 이름이 없어. 그게 이름이야. 노네임.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유레카! 정말로 노네임이 되었다. 이후 공동단장인 진희(장애여성공감)님이 노네임 공연 때마다 의미를 확장해 갔다. 이름 없는 자들의 이름, 누구도 삭제시킬 수 없다,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자리… 아무도 남겨두지 않는다고 선언했던 평등버스 취지가 노네임이라는 이름 속에 스며들어 의미가 확장될수록 이보다 우리에게 더 맞는 이름은 없는 듯이 느껴졌다. (사실 나중에는 율동에 할애하는 만큼이나 의미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평등버스 기획단 율동팀 '노네임'

목포신항 세월호 앞, 평등버스 기획단 소주(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공연 "화인" 

노네임의 공연이 흥으로 혐오에 맞섰다면 소주(한국청소년청년감염인커뮤니티 알)의 공연은 우리 동료들을 위로하고 보듬는 것이었다. 그 위로는 힘찬 발언으로 이어졌다. 혐오에 맞선 용기로 대중 앞에서 처음 커밍아웃한 활동가는 두려움의 껍질을 깨고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자박자박 웅변했고, 나의 경우 처음으로 발언문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에 차 즉흥으로 말하기를 시도했으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보수세력의 주장에 활동가들과 시민들은 ‘우리에게는 감염인 동료가 있다. 트랜스젠더 동료가 있다’는 구호로 혐오의 마이크를 압도했다. 익산에서 내가 반대세력에 맞받아 칠 수 있던 것도 내 뒤에 피켓을 들고 서있는 내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 곁에 동지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빽이었다. 13일의 일정 동안 서로에 대한 감탄을 연발한 믿음 속에 (특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한 모금홍보팀과 라이브방송팀에 박수를 보낸다) 노네임의 무대는 인원이 많을수록 동작을 함께 따라 하는 이가 많을수록 흥이 커졌고 동료 활동가의 노래가 건넨 위로는 동지들의 용기 있는 발언을 이었으며 지역 활동가들의 환대와 격려와 응원은 일정 내내 땅 위를 떠 있는 듯한 도취감에 살게 했다. 일상에서 지지와 연대가 필요한 이유를 체감했고, 우리의 빽을 확인했다. 일상이 평등버스의 여정만 같다면 성소수자들은 매일같이 춤을 추며 살겠다.  


연대로써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연대로써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대전 문화제에서 사회를 보았던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 최명진 공동대표의 말이다. 폭우와 태풍과 코로나19를 뚫고 평등버스가 확인한 것은 사람의 힘, 연대의 힘이었다. 2주 동안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에 몸은 힘들어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더욱 힘을 낼 수 있던 것은 온전히 환대와 지지와 응원과 연대 덕분이다. 비단, 지역에서 만난 이들이 보낸 기운만이 아니다. 라이브 방송에 보내온 사연과 댓글들, 모형을 만들어준 이, 인증샷 캠페인에 함께 해준 이들과 소셜펀치 모금에 참여한 이들, 간식을 보내준 이들, 계속 달라지는 데다 빡세기까지 한 일정에도 평등버스를 자랑하며 2,000km를 운전해 달려준 이, 평등버스에 탑승한 활동가들의 빈자리를 메워준 동료들과 2주 동안 서로를 믿어준 평등버스 기획단 동료 활동가들까지 평등버스는 이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평등버스 기획단 '동지'들과 함께


그래서였을까. 평등버스를 마치고 돌아온 후 사실 며칠 동안 적응이 잘 안 됐다. 현실감각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내 세계는 전혀 달라졌는데 실상 현실은 바뀐 것이 없었다. 전주에서 차별금지 조례는 부결되었고 보수 종교계는 더욱 극성인 듯 느껴지고 여전히 민주당은 고구마 100만 개를 씹어먹은 듯 묵묵부답, 답답이다. 기획단에 함께 한 활동가들을 만나거나 평등버스 탑승기를 말할 기회가 있으면 들떴던 여정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과 남겨진 과제들이 말줄임표처럼 남았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을까.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떠났던 평등버스는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말할 수 있는 목소리에 더해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 연대의 힘을 경험한 힘까지 실어 돌아왔다. 평등버스의 경험은 직접행동에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조용히 살 수 없는 연대의 기운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더 시끄럽게 살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가진 사연에 덧대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며 당신과 내가, 이 삶과 저 삶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더 많은 사람들과 닿을 것이다. 나의 편견이 당신이 받는 차별이 되지 않도록, 나의 경험이 당신의 경험에 맞닿을 수 있도록 차별금지법은 우리를 연결하고 그 힘은 평등의 물결로 차별과 혐오의 현실을 바꿔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