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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2022 HIV/AIDS 인권운동 연차보고

by 행성인 2022. 11. 26.

 

남웅(행성인 HIV/AIDS인권팀)

 

 

양보다 무게, 생각해보니 양도 많았던 2022년

 

2022년의 HIV/AIDS 운동은 어떻게 기억될까. 이전부터 몇 년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속을 긁지만 무작정 삼켜버릴 수도 없는 까다로운 화두들이 굵직한 사건으로 현장에 던져졌고, 운동은 날을 세워야 했다. 당장 대중을 조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납득할만한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확신을 의심하며 계속해서 질문과 회의를 던지고, 응답과 보완을 거듭하며 논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HIV/AIDS 인권운동의 교훈

 

이미지출처: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연초 뉴스에 등장한 원숭이두창은 다시 한번 게이 커뮤니티에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포스트코로나 이후 재개되는 게이 파티와 성관계에서 전파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통계는 게이커뮤니티를 향한 낙인의 조짐을 짙게 드리웠다.

 

질병청의 대응은 조금 놀라웠다. 발 빠르게 HIV/AIDS·성소수자 운동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접근일지라도 당사자들의 문화를 배워보겠다는 태도는 높게 평가할 만했다. 이태원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늘었던 당시 대응했던 경험이 떠올랐을 것이다.

 

미팅을 갖고 교육을 하면서 활동가들은 방역당국에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방역을 명분으로 질병에 범죄 여부를 들이밀고 맥락을 배제한 채 성적 낙인을 씌우는 태도가 질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두려움을 키워 예방을 회피하게 된다고 알렸다. 더 이상 질병이 낙인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건당국은 성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도 제안했다.

 

이들이 제안을 받아들였을지 당장은 알 수 없다. 그래도 다행히 원숭이두창은 확산을 피했고, 낙인의 재생산 또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인수공통전염병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통제와 낙인을 경계하는 것은 예방의 기본적인 태도임을 코로나19 대응을 통해, 그 이전 HIV/AIDS 운동을 밑천으로 갱신하고 있다.

 

 

질병 예방 산업으로부터 인권을 다시 이야기할 것

 

2022년 상반기는 에이즈 예방약(PrEP)으로 알려진 트루바다 약제와 초국적 제약회사에 대한 입장과 과제를 남긴 한해로도 기억된다.

 

프렙은 낯선 이슈가 아니다. 이미 2010년대 전반부터 SNS를 바탕으로 에이즈 예방약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행성인에서도 2014년부터 프렙 세미나와 프렙 토크쇼 등을 진행하며 변화의 추이를 살폈다. HIV/AIDS 인권운동은 에이즈 예방약을 보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쉽게 외치는 데에는 망설였는데, 그 이유를 또한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프렙이 보급되어도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는 지침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반면, 커뮤니티에 프렙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약회사의 상품을 홍보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의심하는 것은, 필요보다 신념만 앞세우는 것 아닌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프렙이 보급되면 질병에 대한 낙인과 두려움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권운동은 저렴한 가격에 프렙을 보급하라고 주장해야 할까, 인권운동은 소비자 운동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결과가 좋다면 과정을 감수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까. 이러한 시나리오가 추측으로만 맴돌았던 배경에는 당시 프렙 보급이 미국과 유럽에 국한된 소식이라는 상황이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트루바다는 2018년 PrEP 요법 적응증이 확대됐고 2019년 보험 급여까지 적용됐다. 예방약에 보험 급여가 적용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하지만 홍보는 미흡했고, 한 달에 40만 원 가량 책정된 약가는 급여를 적용해도 30일 복용 기준 최소 11만 원으로 여전히 누구나 접근하기엔 문턱이 있다. 프렙을 복용하라고 커뮤니티에 요구하는 건 비현실적인 주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렙 적용 기준 또한 HIV감염인의 파트너로 한정시킨 점도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증명할 건데?) 많은 이들은 태국 등을 통해 카피약으로 부르는 제네릭을 확보하거나, 한시적인 프로모션과 지원 프로그램에 의존한다. 하지만 이는 지속적일 수 없다.

 

같은 시간 트루바다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길리어드사이언스코리아'는 국내 퀴어커뮤니티에 문을 두드려왔다. 후원과 캠페인을 지원하고, 올해는 서울퀴어퍼레이드 스폰서십 파트너로 이름을 올리며 차량을 점하기에 이르렀다. 운동은 무작정 내부에서 물음표만 던질 수 없게 되었다.

 

이미지출처: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인권운동 중에도 취약한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은 지지기반과 자원이 부족하기 태반이다. 이러한 상황에 기업의 지원은 어떤 경우 갈급함을 채워줄 샘물이 되기도 한다. 길리어드에 대해 초국적제약회사라고 경계하는 태도의 다른 편에는 여느 기업들처럼 이윤을 남기는 사업을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을 위해 사람들의 생존과 건강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은 여느 기업이 이윤을 취하는 방식과 나란히 비교할 수 없다. 연구기술을 사들여 특허권을 점하고 비싼 가격으로 약값을 취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은 건강할 권리도 없다고 문을 닫는 것과 같다. 이런 중에 이들이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기금을 지원하는 것은 기만이 아닌가.

 

물론 운동은 기업뿐 아니라 국가에도 예방의 역할을 요구해야 한다. 자신의 경제적 여건을 비롯한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질병이 있고 감염에 노출된 상황이라면 치료받고 예방하도록 하여 건강을 찾도록 하는 것이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기에 앞서 국가가 해야 하는 책무다. 이러한 상황에 국가와 기업은 제네릭을 들이지 않으면서 저렴한 약품의 보급보다 특허권의 배타적 행사를 보장하는가 하면, 기업은 약가를 낮추라고 요구하려거든 국가에 보험지원을 높이라고 요구하라는 식의 태도로 책임을 전가한다. 의료전문가들 또한 기업의 높은 약가를 지적하기보다 국가의 보험적용을 높이라는 식의 논리로 기업의 특허권에 힘을 싣는다. 이러한 상황에 예방의 주체는 소비 능력을 갖는 이들로 국한될 뿐이다.

 

안전하지 않은 섹스를 하더라도 의도치 않은 손상을 최소화하는 것, 이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처벌보다 빨리 치료받고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운동은 국가와 기업에 요구할 수 있는 주장을 선명하게 다듬고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결국 에이즈운동은 초국적제약회사에 보이콧만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기만을 비판할 수 있다고 해도 이들의 후원을 받는 다른 성소수자 운동과 HIV/AIDS 사업들까지 같은 위치에서 접근하는 태도 또한 많은 맥락을 생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를 지속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주장과 요구가 설령 명확해졌더라도 논의할 내용들은 적지 않다. 운동은 방향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많은 토론과 논쟁을 만들어야 한다.

 

 

질병의 범죄화로부터 인권을 다시 이야기할 것

 

이미지출처: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상반기동안 프렙과 초국적제약회사로 들썩였다면, 하반기에는 11월 10일 진행한 전파매개행위죄 폐지에 대한 공개변론 준비로 분주했다. 감염인이 예방 없이 섹스할 경우 징역에 처할 것이라는 전파매개행위죄는 HIV/AIDS에 성적 문란함의 비난을 포갠 가장 공식적인 문장이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HIV/AIDS운동은 19조 폐지를 주장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었다. 약을 꾸준히 먹으면 바이러스 검출이 제로에 가까워져 전파력이 사라진다고 하는 의학 기술의 성과는 에이즈 운동과 나란히 하며 U=U(Undetectable=Untransmittable 미검출=감염불가)라는 국제적 캠페인으로 확대되었다.

 

U=U의 공신력은 공개변론동안 다른 논리보다도 강렬하게 각인된 것처럼 보였다. 합헌을 주장하는 대리인단 역시 U=U는 부인할 수 없음을 전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다고 해도 감염인들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공중보건을 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잘못했으니 입건되고 바이러스 제로를 입증하여 무죄 판결을 받으라는 식의 자충수다. 치료는 치료고, 처벌은 처벌이라는 식의 억지 주장이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 또한 꾸준한 치료가 전파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는 점을 깊게 각인한 듯 보였다. 이들은 비교적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가며 질문을 했다. 다만 대개의 물음은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데 초점을 두었다. 감염인은 얼마나 치료를 받아야 바이러스 제로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어느 기간 동안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아야 유무죄를 판단할 수 있는지, 감염될 수 있음에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섹스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감염인과 섹스를 하는 것은 감염될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인지 등 기술적인 질문에 국한된 인상을 주었다. 사실여부를 판단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질문은 성적 낙인이 감염인에게 초래하는 제한된 삶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는다.

 

공개변론의 분위기는 적어도 전파매개행위죄가 쉽게 합헌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결을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예방과 관리에 초점을 맞춰 전파 여부를 따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책임의 무게를 지고, 문란하고 더럽다는 낙인이 오히려 안전으로부터 질병당사자를 배제함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의료기술이 발전했을지라도 질병에 대한 치료와 관리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쉬우며, 사람들이 치료와 검사를 회피하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도 질병이 함의한 부정적 의미와 낙인의 무게에 근거를 두기보다 개인의 무책임을 지탄하기 쉽다. 여기에는 분명 의료기술의 발전과 의약품의 보급의 요구가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인권의 빈자리가, 성적 권리의 구멍이 놓인다.

 

 

인권운동으로부터 ‘난잡함’을 실천할 것

 

프렙이 보급되고 U=U가 공인되는 조건 속에서 에이즈운동은 커뮤니티에서 사람을 만나 섹스하고 선을 넘는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안전과 건강을 챙겨 나갈 이야기들을 나누고 남겨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 이는 곧 인권의 당위적 구호들이 그간 닿지 못한 영역의 서사들을 인권운동이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만나야 함을, 만남을 지속하며 언어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운동의 형식들을 고민해야 함을 촉구한다.

 

예컨대 의료기술과 질병의 비범죄화를 주장하면서도 우리는 치료를 회피하는 이들이 안고 있는 질병의 낙인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HIV의 치료와 예방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음을, 여전히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에서는 수술과 치료, 재활에 이르는 의료서비스가 거절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을 직시함으로써 질병의 낙인이 어떻게 생존의 문제로 이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나아가 감염인의 몸이 사회적 장애의 프레임으로 다시 읽어낼 필요가 있음을, 거꾸로 장애를 기술적으로 정의하는 정책과 제도 또한 재해석하고 수정해나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는 물론 짧은 캠페인과 성명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HIV/AIDS 운동은 커뮤니티 안에서 감염인과 맺는 관계들 뿐 아니라, 질병을 고려하고 이뤄지는 성과 재생산의 일상적인 실천들에 귀기울이며 발굴하고 발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 누구라도 불완전하고 쇠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가 전후좌우를 막론하고 연결되어 있음을 체득하는 과정들 또한 필요하다. 여기에는 혼인평등을 주장하는 갈급함으로부터 모노가미 파트너십을 비껴난 가족구성 모델들을 살피고, 트위터의 뒷계와 약물에 노출된 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자원과 지지를, 안전을 취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원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까지도 고려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성적 실천이나 돌봄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운동의 태도와 방식 역시 '난잡해질' 필요가 있음을 환기한다.

 

 

덧붙여-

 

지난해 더글러스 클림프의 『애도와 투쟁』이, 뒤이어 더 케어 컬렉티브의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 출간되고 두루 읽히면서 운동사회 내부에 떠오른 화두는 ‘난잡한 돌봄’이었다. 이는 성적 실천뿐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가 완전할 수 없음을, 손상과 장애를 갖고 빈곤해질 수 있음을 인정하며 서로 간의 지지와 돌봄이 필요함을, 이미 우리가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허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돌봄은 이미 난잡함을 전제하고 있다. 돌봄은 받는 대상 뿐 아니라 제공하는 이 또한 당신에게 연루되고서야 가능하다. 당신을 도움으로써 나의 만족이 높아지거나 나의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면, 나아가 당신을 도움으로써 내가 속한 사회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재생산할 수 있다면, 더불어 나의 돌봄이 당신의 욕망과 부딪히고 협상해야 함을 깨닫고 나면, 돌봄은 근본적으로 일방적이기보다 상호부조적이거나 의존적이며 때로 불화를 품고 있음을 체감할 것이다. 하여 돌봄은 주는 자와 받는자 모두 내가 불완전하고 빈틈 투성임을 전제하여 서로의 시간과 공간에, 몸과 마음에 개입함으로써 서로 기대어 설 수 있음을 설명한다. 오히려 경계할 것은 돌봄이 난잡함에서 분리되어 정상성과 자본의 논리에, 힘의 위계에 전유되어 난잡함이 박탈되는 상황들을, 돌봄이 시혜가 되고 조롱의 명분이 되는 데 있지 않을까. 더불어, 난잡한 돌봄의 관계와 실천보다도 ‘난잡함’ 자체가 레토릭으로, 시끄럽고 번잡한 미적 실천으로만 남지는 않고 있는가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이 경우 돌봄은 현실의 맥락들을 살피기보다 돌봄 자체의 이상에 침잠하여 예의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자유로워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비약하기 쉽다. 요컨대 난잡함은 정치적 경합과 불화가, 긴장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난잡함의 지지체와 연대를 찾고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와 지향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이미지출처: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시끄러운 한 해를 갈무리하면서, 부족하게나마 체감한 ‘난잡함’은 단어의 표면적인 뉘앙스처럼 시끄럽고 번잡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그저 명랑하거나 우울하기만 한 것도 아님을 기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다름 아닌 《익선동 야간개장》에서의 〈입스파〉였다. 청수당 조용한 마사지샵 룸에 한 명씩 들어가 손님을 기다리고, 호기심과 어색함으로 찾아온 손님과 눈을 맞추고 근거리에 나란히 앉아 섹스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경험은, 운동 이전에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기술적인 태도로 접근했지만 공동체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맥을 찾는 기분이 들게 했다. 밤의 시간에, 어쩌면 골목재정비사업으로 성소수자와 가난한 이들의 터전을 차고 들어왔을 업장에, 하지만 그 또한 퀴어적 역사성의 지분을 행사하기 위해 후원과 기획을 제공한 이 복잡한 공간에 당신의 곁을 만들 수 있는 운동을 채워가는 것, 성공적인 관계의 기쁨만큼 관계가 미끄러지고 실패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포기를 하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난잡함의 방식을 찾아내는 운동, 그것이 자조적인 대화에서 나아가 공론으로, 국가와 사회에 책임과 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 확장해가는 것이 지금 에이즈운동의 과제는 아닐까를 새삼 곱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