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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4월 행성인 추모 주간] 추모의 정원

by 행성인 2023. 4. 25.

남웅(행성인 미디어TF)

 

 

행성인의 역사는 애도의 역사다

 

'육우당'은 이제 상징적인 이름이 된 것 같다. 현석이 아니라 육우당을 계속 부르는 것은 아마도 그의 아호가 이미 친구들을 품고 있어서일 것이다. 육우당만 언급하기 미안할 정도로 많은 동료들이 곁을 떠났음에도, 4월은 육우당 추모의 달로 행성인 너머 시민사회운동 안에서도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매년 4월이면 행성인은 추모주간을 갖고 이런 저런 행사들을 기획했다. 10주기부터는 규모를 키워 대중행사를 진행했다. 집회와 캠페인을 하고, 두 차례 문학상을 진행하고, 기도회를 하고, 코로나 직전까지는 장애운동과 연대문화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내부 추모행사에 집중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많은 이들이 행성인을 찾았고 활동을 시작하며 동료가 되었다. 육우당뿐 아니라 고인이 된 다른 친구들을 모르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바깥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새로 행성인 활동을 시작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좀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지난해부터는 바깥에 차리던 추모 테이블을 교육장에 설치하고 내부 이야기모임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 추모공간을 만들기 시작한 건 육우당이 떠나기 5년 전,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오세인을 추모할 때부터였다. 이제 말하지만 육우당을 말하면서 눈에 밟힌 다른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발목을 잡은 건 오세인이었다. 그당시 프린터로 급하게 뽑은 것 같은 해상도 낮은 흑백 이미지에 중절모로 보이는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사진이 아직도 액자유리도 없이 보관되어 있다. 적어도 떠난 이들 중 대부분 직접 관계를 맺거나 건너 건너 전해들은 경험들이 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오세인은 정말 이름과 얼굴만 알고 있던 것이다. 해서 미디어TF는  당시 활동을 시작한 정민석(정욜) 활동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그가 들려준 오세인의 이야기는 대동인과 동인련, 행성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탈가정하고 사무실에서 잠을 청하던 그에게는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유독 많았다고 한다. 혈연가족이 주관하는 장례식장에 방문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위해 대동인은 사무실을 추모공간으로 운영했다. 애도받을 자격만큼이나 애도할 자격마저 쉽게 얻지 못했던 이들에게 인권단체의 공간은 어떻게 자리를 내어줘야 할지를, 사람을 환대하는 것 만큼이나 떠나 보내는데 어떤 의미부여를 해야하는가를, 이 단체는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군가 사무실에서 세상을 떠날 때마다 쫓겨나듯 공간을 옮겨다니고 모금을 하고 추모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면서 활동이 만들어지던 시절, 행성인이 장소를 옮겨다니며 공간을 일궈온 궤적은 단체 설립부터 애도와 함께 했음을 새삼 느낀다. 행성인의 역사는 애도의 역사다. 

 

 

 

추모의 정원

 

올해는 다른 때보다 추모 테이블을 꾸미는 데 신경 썼다. 테이블 하나에 빼곡하게 사진만 이어붙이던 것을 이번에는 유품까지 전부 꺼내 널직하게 펼쳤다. 당신들을 기리며 동료가 남긴 메모와 그림, 헌정 물품과 더불어 행성인의 크고 작은 깃발을 같이 배치했다.

 

사진 위치는 다른때보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만약 살아있다면 누구와 잘 어울렸을지, 당신에게 누구를 소개시켜주면 이야기가 잘 통했을지 고민하면서 자리를 배치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트랜스젠더/젠더퀴어 무리와 운동권 무리로 양분되는 인상이 없지는 않았지만...그게 또 행성인의 역사겠거니 생각한다. 

 

추모테이블을 장식하면서 작은 정원을 꾸미는 기분이 들었다. 이강승작가가 추모와 연결의 의미를 강조하며 기억했던 영국의 퀴어 영화감독 데릭저먼의 정원이 애도와 만나면 이런 느낌일지, 최장원 작가가 PL(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몸을 체화하며 제단처럼 꾸며낸 장식물 가득한 테이블이 추모의식과 만난다면 이런 모습일지, 멀리는 HIV/AIDS 퀼트를 광장에 펼치면서 에이즈 위기 세상을 떠난 동료를 기리는 마음이 이러했을지 사진과 유품들을 디스플레이하면서 생각했다. 매년 행성인과의 인연을 언급만 하고 지나갔던 임찬혁과 이도진, 전나환의 사진을 따로 주문했다.  

 

 

일주일을 앞두고 미디어TF는 작은 모임을 공지했다. 번개라기엔 추모의 무게가 있어 이야기모임으로 바꿔 부른 자리에 삼삼오오 행성인 회원들이 자리를 채웠다. 함께 활동하고 웃고 울던 동료와의 기억을 나누고, 사진 하나하나를 살피며 이야기를 나눴다. 참여한 이들은 눈으로 추모테이블을 거닐며 사진 속 얼굴들과 인사하고 양초와 향을 피워놓고 음악을 틀었다. 창문과 현관을 살짝 열어두어 잠깐 앉았다 가기를 청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며 술 한모금을, 쉽게 떠나보내지 않기 위한 마음을 간직하며 또 한모금을, 세인, 현석, 희영, 영훈, 키디다, 크리스, 찬혁, 느루, 도진, 은용, 희수, 기홍, 신엽, 나환, 그리고 김무명씨까지 부르며 마지막 한 모금을 함께 나눴다. 

 

 

덧:

1. 5월 첫 주까지는 추모테이블을 설치해둘 계획이다.

2. 추모물품을 한 박스에 담자니 혼자 들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졌다. 두 박스로 나눠야할지 고민인데, 고민으로만 끝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