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행성인 HIV/AIDS인권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저의 내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선 놀라지 마세요. 실은 제가괴물을 좋아합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구요? 여러분도 아는 바로 그 괴물이요. 악당이죠! 악의 편에 서서 괴이하고 무서운 모습을 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그런 존재 말입니다. 하하하, 제가 너무 뜬금없었나요?
저는 아주 독특한 성적 페티시를 갖고 있는데요, 여러분은 혹시 지구용사 벡터맨이라는 공상과학물을 알고 계신가요? 그보다 조금 전 세대라면 후뢰시맨, 바이오맨, 마스크맨을 보거나 들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런 영상들을 다른 말로 ‘특촬물’(특수촬영물의 약어)이라고도 하는데, 지금도 케이블 채널이나 OTT에서 가면 라이더와 파워레인저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쪼그만 아이였을 때, 저의 부모님은 자영업에 종사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일터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저는 하나뿐인 남동생과 집에 단 둘이 있을 때가 많았고,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자주 빌려보았어요. 애니메이션도 보았지만 특히 후뢰시맨, 바이오맨 같은 특촬물을 많이 보았습니다. 바로 그 경험이 지금의 성적 페티시가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특촬물에서는 몸에 딱 붙는 형형색색의 쫄쫄이 옷을 입고 헬멧을 쓴 히어로가 주인공이지만, 묘하게도 저는 악당이 더 멋지게 보였답니다. 적 간부나 대마왕 같은 악당 역할의 배우가 입은 의상은 히어로의 그것보다 훨씬 기괴하고 독특한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죠. 아주 멋있었어요. 게다가 매 에피소드마다 새롭게 등장했다가 결국 히어로가 구사하는 최후의 일격을 맞고 스러지는 괴물, 괴수들은 무섭고 괴상한 모습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듬뿍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성적으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너무 어린 나이였거든요.
저는 더 커서 어느덧 2차 성징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그 즈음부터 성적 지향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성보다 동성에게 이끌린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마침 TV에서는 국산 특촬물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지구용사 벡터맨 시리즈가 시작되고 있었고, 저의 특촬물 악당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후 저의 관심은 특촬물의 고향이자 종주국인 일본으로까지 넓어졌죠. 마치 야동을 모으듯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특촬물을 조사하고,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성인이 된 이후에 갑자기 모종의 외로움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군 전역 후 게이로 정체화하고 나서 만난 동성과의 첫 연애로도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저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성적 페티시를 가진 다른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그 때까지 괴물에 대한 성적 페티시는 제게 아주 은밀하고 부끄럽고 변태적인 것이어서 결코 외부에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트위터 ‘일계’(성적 지향이나 취향을 공개하지 않는 계정)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던 중이었고 가끔 저와 같은 페티시를 가진 일본인의 존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의 성적 페티시를 드러낼 ‘뒷계’를 새로 만드는 걸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저는 트위터 ‘일계’의 추천 친구 목록에서 온 몸에 밀착된 검은색 고무 슈트를 입은 사진과 함께 한국어로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들을 소개한 트위터 계정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온라인 상에서 성적 페티시와 관련하여 누군가에게 연락을 시도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 내어 DM을 보냈어요. 그렇게 2013년 12월에 종로 컬컴 카페에서 그를 만났고, 마치 한풀이 하듯 각자의 페티시 서사를 무려 네 시간 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날 서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대학생 학업 이외에 동성애자 인권연대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저는 ‘그런 단체가 있다’고만 알았던 동인련 가입을 결심하여 2014년 4월부터 현재까지 10년째 행성인(구 동인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삶에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준 행성인과의 인연을 제 독특한 성적 페티시가 이어준 셈이니 생각할수록 묘하고 재미있습니다. 당시 트위터를 통해 만난 행성인 회원 코코샤넬과는 지금도 아주 소중한 동생이자, 친구이자, 아끼는 동료로서 지내고 있지요. 2014년 미술비평도 하는 남웅 활동가에 소개받아 전대물 히어로 캐릭터로 미술작업을 하던 장지우작가의 전시 《지우맨- 지우맨의 탄생》을 보기 위해 행성인 친구들과 미술신생공간이었던 영등포 커먼센터를 방문해서 작가를 만나 얘기 나눈 경험은, 페티시와 미술이 조우한 이상하고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2014년 행성인에 가입할 즈음 저는 트위터 뒷계를 만들었는데, 저와 비슷한 성적 페티시를 가진 사람이 일본인 중에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소개를 일본어로 자세하게 적고, 오직 일본어만 사용하여 저의 취향을 소개하는 게시물들을 올렸습니다. 초기에는 일본인 몇 명이 직접적인 관심과 공감을 표시했지만 점차 대만, 홍콩, 유럽, 미주 등 소수이긴 해도 세계 각지에서 소통과 교류 의사가 들어왔고, 만으로 9년이 지난 현재 팔로워가 2,300명을 넘었어요. 솔직히 저도 신기해요.(웃음) 또한 저의 성적 페티시와 다른 종류의 페티시 사이에 굉장히 많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양한 성적 페티시를 가진 사람들을 현실 세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트친을 직접 만나거나, 한국에 출장 온 트친을 국내에서 만난 적도 있어요.
그리고 2023년 7월 21일, 행성인 HIV/AIDS 인권팀 주최로 아무PT대잔치 ‘문란할 권리 - 성적 페티시와 BDSM’ 행사를 통해 저의 성적 페티시즘을 청중들께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행성인 가입 이후부터 언젠가 꼭 다루고 싶다고 마음먹은 주제를 9년만에 이야기한 이번 발표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저의 성적 페티시즘이 형성된 계기와 제가 어떤 요소나 설정, 상황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지 이야기하고, 이후 다양한 성적 페티시즘들을 접하면서 제가 갖고 있는 페티시가 BDSM의 가학/피학, 지배/복종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퍼리(Furry)나 본디지(Bondage)와는 어떤 교집합이 있다고 느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괴물 페티시’라는 표현에서 ‘복장 페티시의 일종으로써 괴물 의상 페티시’로, 이후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이 연기하는 것’으로 저의 성적 페티시즘의 정의가 시간이 지나며 변한 것도 이야기도 했죠.
어쩌면 그야말로 ‘안물안궁’일 수도 있는 한 개인의 내밀한 성적 페티시즘 서사를 다수의 청중들에게 낱낱이 소개한 이유는 개인이 자신의 성적 페티시즘을 인지 및 정체화하고, 이러한 감정의 근원을 고민하고, 주변인이나 외부 세계를 대상으로 한 포지션이 변화하고, 관계성을 탐구하는 과정이 성적 지향의 그것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예요. 더 나아가서 저의 성적 페티시즘은 저만의 것으로 존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연한 기회였지만 저를 성소수자 인권활동과 커뮤니티로 안내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성적 페티시즘이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 할 무엇인 것이 아닌 취향의 영역이지만 성적 소수자라는 사실이 비정상이나 범죄가 아니듯 성적으로 끌리거나 흥미롭다고 느껴지는 어떠한 물건이나 상황이 있다는 사실도 비정상이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근원을 천천히 탐구해 보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를 통해 저처럼 새로운 기회를 얻거나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고, 섹스 라이프를 포함한 나의 삶이 지금보다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안전이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충분한 대화를 통해 원하는 행동의 방식과 수위, 관계를 설정하고 존중과 안전의 바탕 위에서 행해질 때 아무리 자극적이고 하드해 보이는 페티시 플레이도 폭력이 아닌 즐겁고 만족스러운 관계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저는 괴물을 좋아하는 게이입니다. 한 때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죽을 때까지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말을 별 것 아닌 것처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도 궁금하군요. 행성인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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