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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에세이] 논바이너리 걸프렌드

by 행성인 2023. 8. 22.

미역(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안녕하세요, 미역입니다. 저는 논바이너리입니다. 어쩌다 보니 시스헤테로 남성과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상하죠? 그는 헤테로이고 저는 논바이너리이니까요. 애인은 제가 논바이너리라는 걸 알고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연애를 시작할 때 저는 그가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잘 모르는 것이니 천천히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자니 그에게 저의 논바이너리라는 성별정체성과 성소수자 인권 활동은 개인적인 취향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씹었을 때 비릿한 맛을 견딜 수 없어 잘 먹지 못하는, 그러나 누군가 저의 생일을 챙겨준답시고 끓인 국에 들어가면 억지로 조금은 먹어야 하는 미끌미끌한 해조류, ‘미역’의 이름을 빌려 애인의 뒷담화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저의 상담사도 인정한 바이지만 저의 특기는 비아냥거리기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저의 다사다난한 연애사를 질겅질겅 씹어보려 합니다. 부디 가볍고 즐겁게 읽어 주시길.

 

2021년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에서 트랜스가시화주간 캠페인으로 제작한 이미지 '논바뭘봐'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애인이 물었다. 이 질문이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졌다면, 나는 이 사람을 덜 좋아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젠더의 역사와 정의를 설명해야 할까?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하지만 나의 서사는 나는 여자애였지만 파란색을 좋아했고... 같은 서사가 아닌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걸 그냥 알고 있었고 마침내 ‘논바이너리’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냥 이게 나라는 걸 알았는데. 여성과 남성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 온 사람에게 그밖에 제3의 성별이 그냥 원래 존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애인은 말한다. 너의 재능을 성소수자 정체성으로 한정 짓는 게 아까워, 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여성으로 패싱되고 싶지 않고, 그냥 사람 한 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은데. 그러려면 나는 “아, 근데 저 여자 아닌데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당연하게 첫눈에 성별을 패싱하고 패싱한 성별에 따라 첫 대화 주제를 정하고 그 이후에도 스몰토크의 주제가 달라지는지 이 사람은 모르는 걸까. 애인의 머릿속에서 나는 그저 ‘논바이너리’라는 취미를 가진 ‘여자친구’일 뿐인 걸까.

 

정체화를 하고 활동을 시작하고 머리를 밀고 그 이후로 우연인지 인과관계가 있는 건지 연애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2년 만에 생긴 애인이었다. 처음엔 그가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다. 편견이 없다는 것은 무지와 같을 수 있다. 때때로 혐오는 무지에서 나오기도 한다. 나는 그런 애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냥 당신 편할 대로 생각하시길, 하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맥주를 마시며 농담처럼 탑수술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애인은 후에 “너 농담할 때 진지한 표정인 거 알아?”라고 말했다). 애인은 안 하면 안 되냐고, 꼭 해야겠느냐고, 자기는 무서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이 상처가 되었다. 당장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인의 심정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애인이 생겨서 활동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덜 외롭고 싶어서 활동을 하는데 애인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인과 나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하고 아마 나는 활동을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 언젠가 애인과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지. 영영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애인이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아니 조금은 알게 된다면, “'논바이너리 걸프렌드'라는 밴드가 있는 거야. 이름 너무 웃기지.” 하는 농담을 나눌 수 있을까?

 

 

NONBINARY GIRLFRIEND - Okay (Live on KEXP)

https://youtu.be/6d59ZV4JB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