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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에세이] 섹스를 하면 사랑이 나와

by 행성인 2023. 9. 22.

미역(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안녕하세요, 미역입니다. 오늘은 한창 만남어플을 사용했던 시간의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만남어플을 통해 만난 소중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와는 아름다운 연애를 하기도, 어떤 이와는 오랜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남은 제가 저를 스스로 상처입히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쉬운 만남을 위해 스스로를 여성으로 미스젠더링해야 했고, 막상 만나보니 섹스가 내키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내키지 않는 섹스를 내키는 척, 해버리고 나면 이것도 일종의 자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정말 그만해야지’하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날이 저물면 ‘아무라도 괜찮아’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습니다. 이 글은 ‘이제 정말 그만해야지’하는 다짐을 한 제가 왜 그렇게 만남어플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나 매일 같이 섹스를 했어야 했는지 떠올려 보며 쓴 글입니다.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아무라도 괜찮아’라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도 부디 가볍고 즐겁게 읽어 주시길.



사진: 남웅

 

언젠가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섹스를 하면 사랑이 나와.” 

 

나는 섹스를 사랑과 동일시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오직 나에게 집중하는 순간, 그 순간이 사랑이라고 느꼈으니까. 나는 늘 사랑을 원했다. 언젠가 애인과 헤어진 후였을까, ‘여기서 인연을?’하는 마음으로 어플에서 사람을 만나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쉽게 사람을 만났던 걸까, 너무 쉽게 마음을 내줬던 걸까, 아니면 너무 순진했던 걸까, 대부분의 만남은 원나잇으로 끝나 버렸다. 어플로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원나잇은 섹스였고 섹스를 하면 사랑이 나왔으니까. 그리고 낯선 사람을 만나 잠깐 동안 사랑을 느끼는 것은 너무 쉬웠다. 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패싱되었던 나의 특권이었달까. 그저 적당히 호감 가는 상대를 고르고 대화를 이어가다 집으로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일단 집으로 불러 맥주를 적당히 마시면 그다음은 자동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욕망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삽입과 사정과 오르가즘이 아니었으니까. 섹스를 하기 전 친밀한 대화와 적당한 긴장감, 로맨틱하게 스킨십으로 넘어가는 순간, 너무 짧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애무와 삽입 후 나의 반응을 살펴주는 것, 사정 후에도 변치않는 다정함. 첫 만남에서 이런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섹스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때의 나는 두 사람이 서로 만족스러운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대화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고, 한 번 섹스를 하고 실망하고 연락을 끊어 버리길 반복했다. 그렇게 차단한 연락처 목록만 길어졌다.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심심하고 무료하다고 느낄 때면 어플을 켰다.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요?’, ‘밥은 먹었어요?’, ‘날씨가 춥네요’같은 말들을 쉼 없이 반복하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알람이 쉬지 않고 울리고, 답장할 메세지가 쌓여 있고, 내가 원할 때 누구든 만날 수 있다면 외롭지 않았다. ‘누구든 상관없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우리 집 침대는 모텔보다 못해, 모텔은 시트라도 갈아주지.”

 

농담처럼 친구에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한 사람이 왔다 갈 때마다 이불 빨래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매일 같이 원나잇을 했으니까. 하룻밤 사이에 세 명인가 네 명이 다녀간 적도 있다. 자취를 하냐는 말에 그렇다고 말하면 다들 반가워했다. 게다가 나는 당연하게 남자에게 모텔비를 내게 하는 여자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텔비를 같이 부담할 돈도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이 있는데 굳이 모텔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은 남자들에게 ‘혼자 사는 여자애(엄밀히 따지자면 아니지만 편의상 말하자면)’의 집주소를 알려주고도 불미스러운 사건사고가 없었던 게 참 운도 좋았다 싶다. 

 

사랑을 믿었다. 소울메이트를 믿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같은 관계를 꿈꿨다. 불우한 성장사를 나누고, 서로의 단점을 모두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어 주는.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런 기대 없이 섹스만 하기 위해 어플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름 기준도 있었다. 힙합이나 발라드(누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나는 힙합과 발라드 빼고 다 듣는다고 말한다)나 멜론 탑 100을 듣는 사람은 패스. 하지만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도, 오래된 락을 좋아하는 사람도 결국 결말은 같았다. 취하기 전엔 멀쩡하게 재밌게 음악 이야기를 하며 음악을 듣다가도 취했다 싶으면 어김없이 아무 배려 없는 섹스를 시도했다. 거절하는 법이 없었던 나는 섹스를 하고 실망하고 그 사람을 차단해 버렸다.

 

문득 질문해 본다. 섹스가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할 때, 외롭지 않다고 느낄까? 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 사람, 나쁜 꿈을 꾸다 눈을 떴을 때 나를 안아 줄 사람, 아침에 일어나 같이 커피를 마실 사람. 그럴 사람이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런데 누군가와 그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까지는 지난한 연애(가 아닌 다른 식의 관계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시간을 견디는 건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어플을 했는지도 모른다. 첫 만남에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또는 그 희망이 비현실적인 꿈이란 걸 알면서 하룻밤의 편리하고 간단한, 얕을 수밖에 없는 애정을 느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