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

[회원에세이] 그래도 BDSM은 폭력적이지 않나요?

by 행성인 2023. 8. 22.

남웅(행성인 HIV/AIDS인권팀)
 
 
『섹스할 권리』에서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성매매에 대한 복잡한 정치적 사정을 이야기한다. 성매매가 젠더 폭력에 바탕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에 반대하면서 성매매 지구를 단속하고 없애야 하며 법적으로 성매매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성노동자의 권리는 얼마만큼 보장하거나 고려하는지 묻는 것이다. 그는 반성매매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어떤 주장은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성노동자의 삶이 비참해진들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에 우려를 표한다.[각주:1] 제 정치적 신념을 위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개별의 희생을 감수하라는 주장은 누군가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사항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른 분야의 운동들 또한 예외일 수 없다. 하여 그는 페미니스트들에게 현실주의자가 되자고 말한다.
 
 
이원론적인 구조와 교조주의 너머
 
제목과 상관 없는 인용을 굳이 앞에 끌고 온 것은 '젠더 폭력'이라는 구조가 엄연히 한국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세부적인 장면들에 일방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7월 HIV/AIDS인권팀에서 진행한 〈아무PT 대잔치〉에서 BDSM과 관련한 이야기 모임을 가진 이후 한 동료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합의를 전제하더라도 BDSM은 젠더 폭력을 전제하지 않아?" 이 대화는 구체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젠더 폭력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며 세부의 실천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그의 우려대로 BDSM은 ‘폭력’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를 기정사실화하려면 먼저 BDSM의 폭력성이 사회의 위계와 위력이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한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BDSM의 기본적인 성격 중에 하나는 폭력을 구성하는 상황과 태도를 분석하면서 예의 기술과 장치를 일종의 플레이로, 이른바 ‘플’로 고안한다는 점이다. 하여 플은 어느 정도 연출과 상연의 성격을 갖는다.[각주:2] 자신의 몸이 타인에 의해 손상되거나 변형되는 과정을 전시하고, 여기에 수반하는 수치심과 모멸감을 쾌락의 코드로 연결 짓는다. 여기에는 세속의 부정적인 감정을 일종의 주체적인 정동으로 전유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러한 문턱은 곧 BDSM의 핵심이 '계약'과 '동의'를 전제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나와 상대가 어떤 위계에 합의하고 어떤 역할을 맡으며, 서로 간 어느 지점까지 개입하거나 개입당할 것인가를 조율하면서 관계의 처음과 끝을 함께 정하는 것이다.
 
물론 상호 동의와 합의의 과정은 비단 BDSM 행위와 관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속의 성애적 만남들이 타인의 개입과 우연성에 변형되거나 예측을 빗겨나기 쉽고, 만남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거절에 대한 부담이 결국 만남을 비의지적으로 회피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BDSM은 사적 관계에서 보다 첨예한 '동의의 항목'을 전제하는 차별성을 갖는다. 이러한 계약이 '플'이라는 비교적 무겁지 않은 뉘앙스의 행위로 이어지면 행위자들은 적어도 플하는 동안만큼은 지배든 복종이든 수치든 능욕이든 사전에 동의한 항목들을 충실하게 이행하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트위터와 퀴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BDSM 언어가 대중화되고, 예의 관계를 행하는 이들이 눈에 띌만큼 증가하는 경향이 어떤 인과적 맥락에서 기반하여 작동하는가는 좀 더 살펴볼 일이다. 하지만 퀴어 커뮤니티에서 종종 진단하는 '거절의 문화'에서, 턱이 높은 연애의 기준에서 섹스와 연애를 포기하거나 그로부터 무심해지고 체념하는 선택들이 빈번한 경향을 고려할 때, 돔과 섭의 관계는 피상적으로는 극단적인 위계와 권력에 동일시하는 변태성욕으로 보일지라도, 실질적으로 상호 합의한 계약에 의거하여 성립한다는 점에 자신의 성애적 실험을 실행할 수 있는 인상과 함께 매력적인 관계의 실험으로,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렇게 위계의 플레이를 감행하는 만남은 집단적 경향이 되고 문화로 자리잡는다.
 
그렇기에 단순히 BDSM 관계를 젠더 폭력의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단정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이는 일찍이 게일 루빈이 섹슈얼리티를 젠더 억압의 파생물처럼 취급하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비판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분석적으로 분리하자는 요구를 어느 정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각주:3]

하지만 일련의 논리를 성적 자유주의로 곧장 연결할 수는 없다. 설령 BDSM이 폭력을 의식적으로 가공하고 활용한다고 해서 실재하는 젠더 폭력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폭력을 의식적으로 해체하고 쾌락적 코드로 수용하자고 합의했을지라도 실제로 일어나는 둘 이상의 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고 주도권을 행사하기 쉽다. 젠더 위계뿐 아니라 경제적 자원과 지식, 개인의 매력과 외모 또한 권력으로 작동하여 관계의 우위에 개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 BDSM의 관계에서 폭력은 합의를 빌미로 선을 넘기 부지기수다. BDSM을 수행하는 실제 상황에서 젠더화된 탑과 바텀, 깁과 텍을 전제한 단편적인 위계를 그대로 밀어붙여 실재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말 그대로 디엣(domination과 submission 관계의 약자) 관계를 직독직해하여 합의를 무시하고 타인에게 다짜고짜 무례하게 굴거나 위협을 가하는 경우들이 있고, 합의되지 않은 개입과 괴롭힘을 일상에서까지 행하면서 명백한 성폭력과 스토킹에 가까운 상황들이 발생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BDSM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폭력상황에서 피해자의 경험은 제대로 언급되거나 인정받기 어렵다. 가령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폭력을 문제제기하면서 사전에 본인이 맞는 것을 좋아해서 가해자와 합의했다는 상황을 진술할 때, 또는 신상 노출에 대한 수위를 합의했지만 예기치 못한 망신과 불이익에 당면해 문제제기를 해야할지 고민할 때, 피해자로서 공론화를 결심하는 건 지극히 어렵다. 특히 BDSM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경찰이나 공론장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객관화하고 의미부여할 때 그는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까. BDSM 자체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 더불어 합의된 행위와 바깥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의 낮은 이해도는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 2차 피해를 양산하기 쉽다.[각주:4]
 
하지만 그것이 BDSM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직접적인 비판의 명분이 될 수 있을까. BDSM 커뮤니티에서도 이들을 ‘변바(변태 바닐라)’라는 호칭을 붙이며 강하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이러한 비판의 단순한 논리는 다음의 반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젠더 폭력이라는 원론적 구조는, 젠더 자체를(설령 그것이 ‘성’의 문제일지라도) 폭력의 구조로 읽으며 BDSM뿐 아니라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성 간 관계(만)를 부정하는 논리로 비약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건 BDSM 관계의 폭력성을 단편적인 구조로 프레이밍하기 이전에, 이들이 고안해온 약속과 문화를 공유하고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며 언어를 나눌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어갈 커뮤니티의 역할을 재고하는 것은 아닐까. 
 
 
BDSM이라는 질서 혹은 변칙 
 
BDSM은 기존의 구조와 위계로 정박된 관계의 습속과 권력의 코드를 따르면서도 그와 의식적으로 과잉 동일시하거나 동일시하는 척 하는 등 거리를 두면서 관계의 양태를 변형하거나 교란하고 역전시켜 이들을 쾌락의 씨앗으로 삼는 합의의 과정들을 만들어낸다. 
 

BDSM 플래그...라고 한다.

 
HIV/AIDS인권팀에서는 최근 눈에띄게 많아지는 BDSM과 성적 페티시 인구가 복잡한 성향의 언어와 문법을 공유하고 학습하는 모습들을 보면서,[각주:5] 더불어 근거리의 동료들이 알음알음 성향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퀴어 섹스를 좀 더 확장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취약함과 낙인의 가능성을 감수하는 퀴어 섹스에서 HIV/AIDS를 비롯한 손상과 질병이 BDSM과 성적 페티시에 어떻게 결부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 행위들에서 어떤 관계의 변칙과 가능성이 보이는지, 여기서는 어떤 취약함이 재생산되거나 오용되고 혹은 역전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다.[각주:6]
 
개인의 경제적 자원과 외모는 권력이 될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질병과 노화, 손상과 장애,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는 개개의 외양과 목소리를 비롯한 각종 지표가 관계에서 미끄러지고 탈락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미끄러지는 수치심을 쾌락의 요소로 고안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면서도 이를 감싸고 끌어안을 수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BDSM과 성적 페티시의 취향과 문법들은 일상의 관습화된 관계들에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의 모델을 제공하며 관계에 대한 확장된 이해의 가능성을 연다. 
 
자신의 페티시와 성향을 고백하며 치부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경계를 급진적으로 내려놓는 이들은, 그저 ‘합의된 폭력’으로만 점철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감정을 관리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관계와 주체 모델을 고안한다. ‘복종’하고 다뤄지기 위해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의탁하는 이는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상대에게 자신의 비밀을 관리해줄 것을 바라거나, 그에게 자신의 몸이 선호하는 고통과 쾌락을 세밀하게 발견하고 개발할 수 있는 집행자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청한다. '주인'으로 불리며 ‘지배’를 요청받는 입장에서는 플의 과정 중에도 상대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며 살뜰하게 돌보고 챙겨야 하는 위치를 기대받기 쉽다. 쉽게 말해 당신이 '일방적으로 다뤄주실 분'이 된 순간부터 그에게 가하는 행위는 더이상 일방적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BDSM의 관계도 얼굴과 체형, 나이의 기준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행위와 계약이 주요 키워드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문턱은 느슨해지거나 다른 취향의 기준에 우선순위를 내어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섹스할 때 남자답고 운동을 하는 이를 선호하다가도 경우에 따라 자신의 커다란 몸을 가지고 놀면서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작고 끼스러운 이를 찾는다. 연애와 번개를 할 때면 동년배 상대를 찾았던 누군가는 '조련 받는' 상황에서 중노년의 상대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원하는 몸을 만나기 위해 그런 몸이 되려고 운동한다'는 이의 처지가, '누구에게나 성적 대상화가 되기 위해 몸을 가꾼다'거나 '잘 다뤄주면 다 괜찮다'는 이의 요구와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가를 살펴야 한다. 
 
여러 성향의 복잡성이 있겠지만, 이를 전부 설명하거나 섣불리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성향자들이 복종과 속박, 수치와 능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본답시고 서투르게 추측하는 유사해석의 시도들과도[각주:7] 거리를 두고 싶다. 요점은 신체와 사물을 활용한 스킨십 너머 각종 심리게임과 역할극, 각종 기술과 장치들로 쾌락을 매개하고 신체를 개발하는 관계가 상호 신체성을 확장하고, 더러는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모노가미 연애를 위해 우선순위로 두는 조건과 기준을 벗어나는 상대를 찾고 성적 지향 너머의 관계까지도 모색하는 경우들이 빈번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다음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관계는 때로 플과 평소 일상을 분리하거나 섞는다. 주종을 맺는 이들은 플할 때만 특정 컨셉을 잡지만, 더러는 플 외의 시간에도 서로 주종을 유지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수직적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민주사회의 평등한 시민임을 자각하며 둘 사이 긴장을 관계의 기술로 엮어내야 한다.[각주:8](물론 적지 않은 갈등과 에너지가 들 것이다.) BDSM과 페티시에 집중하는 이들은 정체성의 닫힌 관계 너머 지향하는 성별 바깥의 이들을 만나며 다른 도전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타인과 지극히 성사되기 어려운 로맨스와 배타적인 모노가미에 대한 필요와 강박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기주도적으로 관계를 운용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변형된 관계들과 태도들을 세공한다. 당연히 쉬울 리 없는 과제 앞에서 다양한 전술과 시나리오가 소개되고 공유된다. 트위터의 계정은 전시의 성격 말고도 미디어와 이미지를 활용한 자기 소개 프로필로 기능한다. 몸과 마음의 경계를 다루는 관계인 만큼 자기선전적 텍스트는 허구와 성적 판타지로 가득하다.(물론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행하다가는 현타와 거절을 맞기 십상이다.) 성적 페티시와 BDSM 궁합이 맞는다면 그에 해당하는 소재들은 특정 감정과 신체적 자극을 유발하기 위한 도구이자 신체의 연장으로 적극 활용된다.[각주:9] 
 
 
(비)자발적 취약함과 위태로움으로부터 취해야할 신중함
 
BDSM의 질서와 문화가 기성 관계의 습속에 개입하면서 여러 변칙을 열어낼 수야 있겠지만, 이러한 설명은 관계에 또 다른 고난과 과제를 열어낸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의탁하는 관계는 취약함에 스스로를 노출하고 다소 간의 손상을 자처하는 만큼 자신이 커버할 수 있는 범주 바깥의 위력과 우연성에 개입당한다. 문턱을 극단적으로 낮춘 만남은 호기심으로 시작하지만 현타와 함께 일회적으로 끝나기 쉬우며, 그 일회적인 만남마저 목전에서 무산되거나 중단되기 쉽다. (그마저 안전하게 중단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BDSM은 높은 문턱의 만남에 대한 일반적인 섹스와 다른 갈래의 만남의 모델이자 새로운 기술일지 모르지만, 이를 행하는 이에게는 충분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와 충분한 소통은 물론,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안전장치 또한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부족한 상황들이 출현한다. 가령 비밀보장은 BDSM관계에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되지만, 그것은 더러 신상공개 자체가 종속의 쾌락과 극단적인 수치플의 일환이 될 수 있는 동기로 작동한다. 자신의 요청으로 연락처와 실명, 얼굴이 타인의 계정에 노출되고 그것이 수십 수백 번씩 리트윗되는 상황에서, 관계 바깥에 있는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경계를 내려놓고 시도하는 강도 높은 노출과 손상의 행위는 부정적인 후과를,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상처를 남기기 쉽다.[각주:10] 혹은 몸을 '개발'하거나 변형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정신적인 부담을 내려놓기 위해서 약물 등의 유혹과 (강압적일 수 있는) 제안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은 또다른 후유증과 위험부담을 남기며 취약성을 가중시킬 수 있다. 
 
누군가는 위계를 전유하고 그 상황들을 상연하는 BDSM의 정신적 구조를 분석하면서 ‘자신들의 제도적 위치를 인식하는 자들이 자신이 처한 권력을 혐오하거나 권력을 넘어서는 어떤 유토피아를 상상하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정의하여 그곳에서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권력과 유희를 즐기는 것’[각주:11]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BDSM의 정치적‧미학적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접근으로 유효성을 갖지만 다분히 근대 주체 남성의 문학작품에 국한한 해석이기도 한데, BDSM을 문학적 시나리오나 '유희'로만 가둬둔다면 현실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권력의 양상을 컨트롤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를 누락할 여지를 남긴다. 서로 간 긴장과 조율 속에 관계가 고안되고 돌봄과 속박, 존중과 폭력이 합의의 리스트에 나란히 오르내리는 상황을 단순히 '해방'의 관계로 단정하는 것 또한 사방에 놓인 위계의 요소들과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을 간과하는 처사다. 그렇다고 그것을 '폭력'의 구조나 '변태적 섹스 행태'로만 몰아가는 것 역시 성원들이 현실에서 고안하는 세부적인 처세와 협상의 기예를 놓치거나 배제할 수 있다. 기존의 섹스와는 다른 언어와 코드들이 관계의 체제에 개입하고 정체성에 자신의 몸을 가두지 않으며 몸을 재편하고 이전과 다른 연결들을 가능케 하는 현실은 호락호락하게 프레이밍 되지 않는다.
 
이러한 복잡성은 관계의 양상뿐 아니라, 주로 당사자들이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채널의 속성과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 단적으로 트위터의 뒷계는 변형된 몸과 섹스의 장면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채널로 작동한다. 그것은 노출과 전시라는 특성을 갖지만, 노출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점은 트위터의 운영방식 자체가 안전장치로도 활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지금의 ‘X’가 되어버린 트위터는 문제가 많다.) DM을 보내 상대와 합을 맞추고 직접 만남을 갖지만, 협상은 결렬되기 쉽다. 이 경우 대개의 플랫폼에는 ‘블락’과 ‘차단’이라는 아름다운 만큼 잔인한 장치가 작동한다. 말인즉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젠더를 비롯한 각종 위계의 양상을 읽기 위해서 필요한 건 세부적인 관찰이고, 그에 기반하여 질문을 더 쪼개는 작업이어야 한다. 어떤 자원과 정보를 가지고 힘을 행사하거나 그에 방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지금 어디서 어떤 질서들이 고안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공동체로서 인권단체의 자리
 
이상적인 가치를 주장하며 현실의 상황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수렴시켜 보는 태도는 인권·사회운동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해방’과 '평등'은 선언처럼 언급될 수 있지만 복잡한 맥락을 빠뜨릴 수 있고, 확신의 강도만큼 현실의 불투명한 회색지대를 갈라치기 쉽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행위를 두고 ‘젠더 폭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이들이 감행하는 위험과 안전 사이 급진적이면서도 자기보위적인 줄타기를, 협상의 기예를, 하여 구성되는 이상한 관계의 가능성들을 젠더 폭력이라는 깔대기에 구겨 넣을 수 있다.
 
기실 폭력과 위계는 퀴어 섹스를 이야기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이 저만치 있는데 질문은 세공되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젠더의 제도와 문화적 표현들, 젠더를 가리키는 생물학적 습속을 동일시하면서도 발생하는 교란들은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현장의 언어를 듣고 세부의 관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조 위에서 어떻게 변형되거나 제 자리를 이탈하는지, 실험적인 관계들 속에서 무엇이 합의되고 합의를 거스르는지, 합의된 위험에서조차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취약한 관계에 스스로를 던지고 상대의 취약함을 기어이 끌어 안는 이들을 만나며 정보를 공유하고, 위험을 택할지라도 안전에 대한 감각을 붙잡아줄 수 있는 동료와 공동체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고안해내는 것이 인권단체의 역할은 아닐까를 새삼 생각했다. 그것은 퀴어 섹스를 이야기하면서 페미니즘을 고려해야만 하는 동시에, 현장의 복잡한 사정과 선택들을 고려하며 페미니즘의 방향을 갱신하는 실천을 요청한다.
 
하여 이 글은 자주는 아니어도 매번 이야기할 때마다 진전 없이 흐려지는 대화를 나눠온 동료에게 우정의 마음으로 집어든 마이크다. 더불어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아직 낯선 성적 실천들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서툰 시도기도 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을 감각하고 접근하는 우리의 시선은 엇갈리지만, 타인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기울어진 행위의 주객을 의식적으로 선택할지라도 관계에서의 평등을  감각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고 다음의 논쟁을 위한 글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1.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 김수민 옮김, 창비, 2022. p.265. [본문으로]
  2. 이건 그리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은 『성의 정신병리학』에서 이미 마조히즘의 핵심이 고통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복종의 '드라마'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하여 마조히즘은 문학적인 비평과 분석의 소재로, 자율적인 '개인'이 등장하는 근대 주체를 분석하는 담론적 모델로 접근되기도 했다. [본문으로]
  3. 게일 루빈, 「성을 사유하기」, 『일탈: 게일 루빈 선집』, 신혜수, 임옥희, 조혜영, 허윤 옮김, 현실문화, 2015. p.350. [본문으로]
  4.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성폭력추적단 불꽃이 2022년 2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단독 고발...청소년까지 노리는 BDSM '변태 바닐라''를 참고할 수 있다. 링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02927&SRS_CD=0000014655 [본문으로]
  5. 단적으로 최근 BDSM 성향을 구별하는 다양한 테스트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MBTI 류의 성격검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은 여전히 수평과 평등을 지속하기 어려운 관계의 환경 속에서, 적어도 관계의 권력들을 코드로 삼고 이를 취향으로 변형시켜 타인을 이해하고 취향과 성격을 맞추며 관계를 만들기 위한 캐주얼한 장치는 아닐까를 생각한다. 구글링으로 찾은 테스트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https://bdsm-test.info/ , https://bdsmtester.com/bdsm.siso , https://bdsmtest.org/select-mode. 이는 십수년 전 퀴어 커뮤니티에 다양한 정체성과 성적 지향의 이름들이 물밀듯 등장하고 소개되면서 이를 집단적으로 학습하고 정체화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본문으로]
  6. 사족인데 최근 다른 동료에게 요즘 HIV/AIDS인권팀이 에이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적잖이 허를 찔려 당황하고 동시에 황당하게 웃기는 상황이 있었다. 그 친구의 코멘트 의도는 HIV/AIDS 운동이라고 질병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본문으로]
  7. 관계가 어려워서, 현실이 각박해서, 사회위계가 강력해서 등등의 이유는 굳이 BDSM이 아닌 다른 상황들에도 얼마든지 적용이 가능한 알리바이다. 폭력적인 환경에서 성장해서,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각인되어서 등의 이야기는 개연성이 있더라도 환원론적 분석으로 남기 쉬울 뿐더러 BDSM 성향자에게 편협한 프레임을 씌우기 쉽다. [본문으로]
  8. 그런 점에 2022년 넷플릭스에서 출시한 영화 〈모럴센스〉(박현진 감독, 서현, 이준영 주연)는 반쪽의 관계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펨돔과 멜섭이 직장에서 갖는 사무적 관계와 둘 사이 파트너십의 긴장 외에도 디엣 관계 중에 발생하는 로맨틱한 무드를 비교적 캐주얼하고 섬세하게 보여주지만, 실상 더 중요한 것은 둘이 연인 관계를 맺고부터 돔과 섭의 역할을 동시에 가져가는 긴장과 협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약관계 아래 사귀기 어려운 두 인물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로맨스를 시작했다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본문으로]
  9. 그리고 한편에서는 만남을 지속하거나 굳이 갖지 않더라도 동류의 감각을 구성하는 특정 행위가 문화적 현상으로, 유행이나 밈으로 번져나간다. 밈이 되어버린 몸의 정동은 변칙적인 행위 가능성을 만들기도 한다. 근래 소소하게 관심을 받는 밈 중에 ‘빙글빙글 돌기 챌린지’는 본인을 빙글빙글 도는 게이로 소개하는 이의 계정에서 파급된 유행이 되었다. 트위터 유저 whiwhirl은 자신이 올린 동영상에서 시작한 빙글빙글 도는 행위에 대해 페티시 외에도 스트레스 해소와 기분전환을 위한 것으로 소개하며 남자들과 도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힌다. ‘빙글좌’로 불리는 그의 행위는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재미로 따라하지만, 성적 의미에 걸쳐 있으면서도 섹슈얼리티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유행처럼 번지는 행위는 더러 어떤 스침과 만남의 자리를 성사하기도 하는 모습이다. [본문으로]
  10. 그만큼 플을 협의하고, 플을 진행하며 그 이후까지도 서로의 물리적이고 심적인 안전을 확인하며 마음을 헤아리고 돌보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사전 합의했다고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본문으로]
  11. 닉 맨스필드, 『마조히즘-권력의 예술』, 이강훈 옮김, 동문선, 2008. p.21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