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최근 사이클 선수 나화린씨는 '성전환 수술 없는 성별정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트랜스젠더 동료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고 실망하기도 했는데요, 한편으로는 감정적으로 개인을 규탄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9월 웹진에서는 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원들이 저마다 에세이를 쓰면서 수술 여부에 따른 성별정정의 입장을 짚고 나아가 트랜스젠더가 동료로서 어떻게 이야기를 건넬 수 있을지 고민을 곱씹어보았습니다. |
무나(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
“안녕하세요. 저는 논바이너리, 비수술 트랜스젠더입니다.” 한때 이 문장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랬던 문장이 지금은 새삼 이걸 또 굳이 말해야 하나 싶은 문장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변치 않는 것도 있지만, 변화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혐오의 의미에서 사용되었던 ‘퀴어'라는 단어가 지금은 자긍심의 의미로 쓰입니다. 저에게 중요한 단어가 되어버린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도 처음 그 단어가 등장했을 때보다 점점 더 다양한 정체성을 의미하는 쪽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그 변화를 세세히 이야기하자면 그 단어로 저를 정체화하고 있는 저에게도 한참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제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자면,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이 느끼는 자신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정의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설명하기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는 저를 여성이나 남성 어느 쪽에도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논바이너리’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었고, ‘비수술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단어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저를 설명할 수 있는, 제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단어를 만났으니까요. 그러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이런 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 자르듯 잘리지 않는 세계를 어렵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에게 저의 존재는 끊임없이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이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판단하려 합니다. 그 판단에 따라 대화의 주제가 정해지고, 함께 하는 일이 달라지고, 관계의 양상이 달라지죠. 그런데 그 판단이 일반적이지 않으면, 겁을 먹고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단절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조금 다른 존재일 뿐인데요. 그래서 저는 가끔 상상하곤 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자신과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당연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사회라면, 나에게 당연한 것이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인 세계라면, 우리가 마주한 상대방을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상대방과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것도 아니면서 아랫도리에 무엇이 달려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그냥 모든 게 해결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상상은 아무래도 너무 순진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너무나 당연하게 건강보험, 병원진료, 본인인증 등 사회를 살아가며 꼭 필요한 순간에 이분법에 따른 지정성별 정보를 요구합니다. 지정성별 정보는 비밀로 지켜져야 할 정보로 취급되기는커녕 공공연하게 공개됩니다. 또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혼인신고 시 남편(부)과 아내(처), 출생신고 시 부와 모의 자리에 각각 특정 성별만이 특정 역할을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정성별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며, 둘 중 하나인 성별만이 기재 가능한, 특정 성별 간의 관계만이 법적으로 인정받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그러니까 너무나 성별이분법적이며 시스젠더 헤테로 중심적이어서 우리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트랜스젠더를 괴롭히는 것은 법과 제도뿐일까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MTF다운’ MTF이 지나치게 트랜스젠더를 대표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MTF뿐만 아니라 FTM도 존재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트랜스젠더라면 MTF 아니면 FTM이어야 할까요? 트랜스’남성'도 트랜스'여성’도 아닌 성별(sex)과 성별정체성(gender)이 존재하고 있는데요. 또, MTF은 MTF다워야 하며, FTM은 FTM다워야 할까요? 특정성별다워야 한다는 교육은 성별이분법적이며 시스젠더 헤테로 중심적인 사회로부터 이미 지겹도록 받아오지 않았나요? 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당신을 보고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트랜스젠더답지 않다고 말할, 성별정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 저의 친구들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이런 문제를 따져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기까지, 당신의 삶이 어땠을지 상상해 봅니다. 당신은 당신을 증명해야 했던 힘겨운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 올린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주장해야 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저는 당신이 당신과 조금 다른 우리를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트랜스젠더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트랜스남성과 트랜스여성과 그 이외의 성별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트랜스젠더, 그리고 어떤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다른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말입니다. 당신 모르게 당신 곁에 존재하고 있을, 당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말입니다. 그들의 존재를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논바이너리, 비수술 트랜스젠더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런 제가 당혹스러운 존재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다양한 트랜스젠더 친구들이 저의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장 당신과 같지 않으면서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우리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당신과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상성’에서 빗겨 난 존재들이라는 점 아닐까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닮아 있지 않나요? 당신과 저와 저의 친구들이 트랜스젠더가 더 살만한 세상, 우리가 상상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로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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