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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

[소수자 난민] 이주민과 연대하기 위해 더 고민할 것들 - 소수자 난민 운동의 관점에서

by 행성인 2024. 11. 24.

남웅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행성인)

 

해당 원고는 2024 11월 26-27일 진행한 제 3회 전국이주인권대회 프로그램 '여전히, 그러나 새로운 길, 함께 걷다 II ' 에 발표한 토론문과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제3회 전국이주인권대회, 사진: 화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활동가

 

 

 

“주변에 나와 같은 무슬림 LGBT를 만나고 싶어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이에서

 

 

사무실에는 종종 성소수자 난민들이 도움을 청한다. 더러는 사무실에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들 중 몇몇은 언어가 통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일 먼저 얘기한 건 그가 자신과 같은 국가 사람은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다. 난민으로 온 것이기에 금방 소문이 나기 쉽고, 들키면 커뮤니티에 배제되기 쉽고 추적당하기도 쉬우며, 본국에 돌아가면 금방 불이익과 위협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본국 주변에 있는 퀴어들을 소개시켜달라고 한입처럼 요청한 것이었다.

 

만나고 싶어요/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이 갈팡질팡은 딜레마로 보이지만, 기실 자신의 욕망과 성적 지향에 기반한 일상을 나누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면서 최소한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은 다들 비슷할 것이다.  미등록 이주민이나 난민과 같이 체류국에서도 취약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커뮤니티 의존도가 높아지고, 다른 기댈 곳이 없게 된다. 체류지 내 본국 커뮤니티는 그들의 생계와 관계를 구성하는 바탕이기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소문이 되고 관계에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따른다. 그것이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의 경우처럼 의료와 보험, 체류자격과 영주권 등 기본적인 권리에서 제외되기 쉽고 의존할 데라곤 지인과 자국 공동체 정도라면 불안도 커진다.

 

단지 무슬림 국가 출신이고 본국의 인권감수성이 낮기 때문인 것이 문제였을까. 다른 문화권의 커뮤니티이고 게토라고 하더라도 같은 지역에 살아가는 이상 항상 닫혀 있을 수는 없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일을 하고 교육을 받고 한국 뉴스를 보면서 활동하다 보면 다른 환경에 의존하고 돌봄을 요청하며 개입과 조율의 과정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곧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더불어 젠더규범과 질병혐오적 관점이 오랫동안 박힌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라면 더욱 차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환기한다. 이를 그저 무슬림 국가의 성소수자 범죄화와 낮은 인권 감수성만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한국의 낮은 인권 감수성과 미진한 인권 기반 정책과 노동 제도를, 질병에 대한 혐오가 어떤 사회적 활동과 치료받을 권리를 박탈하고 있는지 살필 책임을 숨기기 급급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들이 체류국에서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본국의 자원이 아닌) 커뮤니티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이 사회가 성소수자와 HIV감염인, 난민과 이주민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슬림 난민과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의 필요에 반대하는 것은, 이들과 자리를 나누며 공존을 거부한다는 배타적 태도의 포석이 된다. 이는 그들이 낙후되고 반인권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본국의 정주민이 공인된 시민이라는 위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인종주의적 태도를 합리화한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행하는 사회적 차별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위해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재생산하는데 이바지한다. 무엇보다  무슬림 사회에 극도로 편향된 의식은 본국의 퀴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맥락을 지우며, 이주민과 정주민의 시민권에 위계가 제도로 고착되어 있고 이주민과 성소수자 혐오 분위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커뮤니티는 체류 국가에서 게토화 되고 고립 되기 쉽다. 생각하고 보니 이는 사회가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논리와 비슷한 것도 같다. 성소수자의 입지와 난민의 입지를 교차하며 생각하게 되는 배경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구원을 위한 파괴는 없다

 

돌리지 말고 얘기하자.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 동성애자를 처벌하고 사형시켰다는 소식을 종종 본다. 그런 배경에서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일이 생길 수 있고 난민을 신청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사형시키지 말라고 요구하고 범죄화에 반대해야 할까...물론 그래야 한다. 하지만 모든 무슬림 국가가 동성애를 범죄화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중에 코란을 문자주의적으로 읽어 차별과 폭력이 이뤄지는가 하면, 범죄화하는 나라에서도 음지의 만남을 묵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무슬림 사회의 성소수자 차별적 태도가 현실일지라도 그것이 그 나라를 침략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곳의 폭력을 슬퍼하고 규탄하는 것과, 범죄화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목숨을 위협하기에 다른 국가가 무력행사의 당위와 명분을 얻고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을 학살하는 것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주장은 완전히 다르다. 사실 이 글의 시작이자 전제는 몇몇 무슬림 국가의 성소수자 혐오와 범죄화는 문제 아닌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밖에 없는 걸 안다. 그럼에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질문을 거울 삼아 한국사회를 보고, 무슬림과 난민을 비난하는 이들을 비추자는 것이다. 

 

한쪽의 입장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배경과 맥락을 삭제하고 단순화해야 한다. 그건은 전쟁과 침략, 지배의 국면에서 두드러진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의 경우, 오랜 위계와 일방적인 침략이 학살과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 이스라엘은 문명의 수호자로 자신의 이미지를 세워가는 중이다. 팔레스타인은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반인권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논리인데, 이는 이스라엘 군인이 파괴한 팔레스타인의 폐허 앞에 ‘사랑이 이긴다’는 문구가 쓰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이미지를 당당하게 내걸 수 있도록 한다. 이스라엘을 위시한 서구의 렌즈에서 팔레스타인은 언제고 성소수자가 숨어 살 수밖에 없고, 율법에 의해 범죄 낙인을 씌우는 곳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자유와 다양성, 인권을 존중하며 ‘극악무도하고’ 억압적인 사회와 싸우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서구사회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는 공식석상에서 ‘빛의 아이들과 어둠의 아이들 사이에, 인간성과 야만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각주:1]  

 

팔레스타인 퀴어는 극악무도하고 억압적인 중동 사회의 성원이자, 폭압에 피해당하는 이들이라는 상반된 위상이 겹친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이들을 구원하고 인류와 민주주의를 성찰하는 구도로 온갖 문화적 재현물을 만들지만, 그것이 파괴와 침탈의 방법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은 줄곧 생략한다. 성소수자인 당신을 구원할테니, 당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병원과 학교를, 집과 터전을, 가족과 친구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서구의 수장들은 침략을 당장 멈추라는 이야기보다 인도주의적인 해결을 바란다는 식의 회피적인 언사를 보이며 거리를 두고 손익계산을 놓지 않는다. 몇몇 진보적 사상가들은 네타냐후만큼 하마스도 폭력집단 아닌가를 물으며 평화를 요구하면서도 거리를 견지한다. 두 집단에 대한 비판을 균등하게 나눌 수 있는가. 이러한 입장의 문제점은 팔레스타인 퀴어와 여성을 둘러싼 복잡한 현실과 입장들을 앞서 상반된 위상에 재차 단편화되는 효과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희생자로 고착하면서도 언제든 침입하고 속일 수 있으며,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무슬림 팔레스타인 사람들로 틀지어진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퀴어에 대해 희생자 취급을 하며 구원서사의 홍보도구로 이용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당신의 신원을 공개하겠으니 원치 않으면 스파이가 되라는 협박과 회유의 현실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이스라엘 국기와 십자가 깃발을 휘두르면서 동성혼 반대와 차별금지법 반대를 주장하는 풍경을 떠올려보자. 이스라엘의 핑크워싱과 어긋난 메시지처럼 보이는 풍경은, 난민과 성소수자를 침입자이자 반체제분자인 동시에 불쌍하고 손상된 이들로 (하지만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타인으로) 호출하며 극우정치를 세력화한다는 점에 다르지 않다. 중동과의 전쟁을 지지하면서 성소수자 친화적 메시지는 모르쇠하는 한국 보수기독교의 논리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홍보하는 성소수자 친화적 이미지가 얼마나 도구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난민과 이주인권운동이, 성소수자와 HIV/AIDS인권운동과 만나야 하는 이유

 

누가 어떤 이의 이동을 강제하고 난민을 만드는가. 선택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난민 되기를 선택하는 이들, 침략과 지배의 국제정세로부터 운신의 폭이 낮고, 언제라도 생명을 박탈당할 수 있는 이들이 난민 신청을 할 것이다. 어린이와 장애인, 노인 등은 그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전쟁은 자원과 영토, 헤게모니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협상이 이뤄질 수 없을 때 발생한다. 물리적 힘의 우위가 극단적으로 행사되고, 불안정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성원을 단속하고 제한할 것이다. 전쟁과 침략, 지배는 현실의 계층 계급적이고 인종적 위계를 극단적으로 재생산하며 경계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양산된다.

 

이스라엘은 무슬림의 성소수자 혐오를 구실 삼아 성소수자 친화적 이미지를 양산하고 주입하는 '브랜드 이스라엘' 전략을 이어간다. 이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성소수자 친화적 마케팅을 ‘핑크워싱’이라 부르며 불매와 보이콧운동을 이어왔다. 이것이 그저 담론 차원의 운동은 아니다. 당장 한국의 경우, 침공과 폭력에 의해 본국의 주민은 난민 되기를 강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을 야만과 반인권의 얼굴로 덧씌우며 침공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한국의 성원들로 하여금 난민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도록 한다. 무슬림과 성소수자, 난민에 대한 단편적인 인식은, 현실에서 무슬림 국가 출신의 성소수자 난민이라는 위치를 고착하고 고립시킨다. 그는 언제고 테러 가능성을 일으킬 무슬림이 되고 언제라도 여성을 성폭행할 소지가 다분한 무슬림 남성이 되며, 가짜 성소수자거나,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가짜난민 행세를 하고 일자리를 축낸 이로 재차 자리매김당한다. 소위 가짜 난민과 가짜 성소수자의 프레임은 안보를 명분 삼아 가난과 다른 인종을, 성소수자와 종교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재촉한다.

 

법무부의 난민심사절차는 이러한 인식이 난민당사자의 생사여탈권을 쥐는데 결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래왔다. 성소수자 난민이 자신의 박해사실을 증언해야 할때, 난민 심사는 복잡한 정세 속에서 그가 난민 되기를 선택해야 했던 맥락을 헤아리기보다 그가 분명히 박해받았다는 증거를 요구한다. 난민들은  그출신국의 동성애혐오를 반도덕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입증해야 한다. 폭력집단 무슬림과 그들로부터 성소수자 박해의 논리가 당사자의 증언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난민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니까. 이는 난민심사과정과 사례들이 극우 이민담론과 신인종주의 담론을 재생산할 수 있음을 환기한다.[각주:2]   

 

난민을 인정 받기 위해 당사자들은 성소수자임을 드러내야 하지만, 많은 경우 현실에서는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만천하에 드러내고 활동하지 않기가 다반사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다. 현실에서는 종종 성소수자로 정체화 하면서도, 혹은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고민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상태로 가족의 요구에 맞춰 결혼과 임신, 출산을 한다. 난민심사에서 당사자의 이야기에 기반하여 박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난민심사가 진짜/가짜 난민과 성소수자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며, 무슬림 성소수자 난민이 그저 단일한 정체성과 서사를 가질 수 없음을 전제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성소수자 박해사실이 확인되어 난민으로 인정하더라도 그가 체류국에서 임신이나 이성결혼을 하게되면 난민지위를 박탈했으니까.

 

미등록 이주민과 난민은, 우리에게는 위기에 처한 도움을 갈급하는 타인이 출현하는 일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낯선 이들이 나타나 운신할 자리를 내어달라 곁을 요청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을 단지 국가와 개인의 운신 문제로만 보는 것은, 무책임은 차치하더라도 울타리 안의 사고로 머물기 쉬우며, 안보를 위해 시설화를 옹호한다는 점에 문제적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이야기를 그저 시론으로만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비영어 언어를 사용하는 퀴어들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내다볼 수 있는 시간도 설 공간도 마뜩치 않은 이들에게 자국 커뮤니티가 적지 않은 자원과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때, 그들이 무리해서 성적 지향이나 질병사실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선택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어려움은 애당초 한국에서 성소수자로서 살아갈 권리를 보장할 제도가 미흡한 환경에서는 더욱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해 한국에서 발생하는 HIV 감염인 비율 중 외국인이 20%를 훨씬 상회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는지, 그들 중 미등록 외국인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면, 상황이 녹록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여 성소수자와 HIV/AIDS 인권운동은 이주와 난민인권운동을 만날 필요를 인지하며, 그 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난민과 이주민을 지원하는 운동은, 쉽게 일방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서비스만 가리킬 수 없다. 동등한 관계를 지향하더라도 정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인도주의 활동에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다만) 이들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어떻게 우리 곁에 왔는가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설령 그들이 언제까지 머물고 떠날지 몰라도, 우리는 이들의 연고를 박탈하고 이동을 강제하는 전쟁과 학살에 저항하는 운동에 관심을 갖자고 제안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들이 살면서 가장 기본적인 환경을 가질 수 없는가를 물어야 한다. 국민의 이해를 이유로 들며 성원의 경계를 한정하고 무슬림이고 성소수자여서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국민의 기준과 경계를 물으며 치안과 안보를 명분으로 그들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이 사회와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아가 내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자원와 영토를 독점하고 역사를 침탈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를, 바깥을 경계하는 정책과 여론이 내부의 시민들을 계층과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할 것을 남겨둔다. 난민과 이주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박해를 피해 온 이들을 환대하며 공존을 모색하는 활동은, 종국에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에, 인종주의를 반대하고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는 침략과 수탈에 반대하는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1.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퀴어의 외침 요약본, 김보영, 허주영 옮김, 2024. 6. 아래 링크를 통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64oSjImWS8JHI_eO-wc3YOX-Dv2xzUBI/view [본문으로]
  2.  이 부분은 다음의 연구도 참고할 수 있다. Mengia Tschalaer, Between queer liberalisms and Muslim masculinities: LGBTQI+ Muslim asylum assessment in Germany,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ume 43, 2020 - Issue 7,  Pages 1265-128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