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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문수의 지구여행기

[문수의 지구여행기] #2. 서울, 게이 생활

by 행성인 2025. 3. 25.

 

문수(한국HIV/AIDS감염인인권연합 KNP+)

 

연재의 말

게이들은 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의 삶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참…이 나이에 글을 쓸 줄이야, 가 아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 보는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내 삶을 솔직하게 기록해 본다.

 

 

1981, 스무 살이 되었고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대형 소갈비 집에서 웨이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강남 개발이 한창이어서 신사동 옆 반포나 잠실은 땅을 고르는 중장비 트럭들로 넘쳐났다. 분주함에 덩달아 마음이 들떠서인지 시골 게이의 서울 상경기는 잠깐의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순탄했고 즐거운 날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갈비집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만 나면 동대문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춤을 추러 다녔다. 80년대에는 동대문, 영등포, 신촌, 천호동 정도가 번화가였고 강남은 유일하게 신사동 사거리만 뜨고 있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다니던 곳은 동대문이었고, 쉬는 날에는 꼭 동대문에 놀러 가곤 했는데, 하루는 그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동대문 이스턴호텔 뒤쪽의 신발 상가 안쪽을 가 보니 극장이 하나 보였다. ‘청계극장이라는 삼류극장이었다. 홀리듯 그곳에 들어간 나는 뒤 쪽에 않아 영화를 관람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내 옆에 앉더니 손을 내 무릎 위에 올리고 슬금슬금 내 그곳을 향해 다가왔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그는 과감하게도 나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발기한 나의 그곳을 입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나의 그곳을 입으로 애무 당한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극장을 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 그 극장은 문을 닫은 것으로 안다.

 

 

 

82년도에 갈비집을 관두고 서울 서쪽에 있는 대학가 앞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했다. 당시 서양식 레스토랑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특히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커피를 주문하면 토스트 식빵을 함께 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더욱 많았다. 가게에 지배인이 손님과 싸우고 갑자기 그만두면서 내가 덜컥 지배인이 되었다. 나는 입담이 세다는 이유로 레스토랑에 오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연말이나 행사 때는 학생(동아리 멤버)들에게 가게를 통째로 빌려주면서 그들과 더욱 친해졌다.

 

83년도는 전두환이 버마(미얀마)에 국빈을 방문했다. 아웅산 사태가 터진 해였다. 우리나라 장차관 20여 명이 사망한 대규모 테러였다. 그 여파로 안기부에서 대학가 사찰에 나섰고, 안기부 직원이 나에게 세 번이나 찾아와 학생들 동향을 물어봤다. 아는 게 없었던 나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내게는 82년에 마이클 잭슨이 빌리진으로 세계적인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국내에서는 윤수일의 아파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2년 후, 1984년에 고향 면사무소에서 6개월 방위를 마친 나는 서울로 돌아와 목욕탕 드라이기 관리업무를 하는 동ㅇ실업에서 일했다. 일하다 만난 세신사가 나에게 선데이 서울을 보여주었는데, 그 잡지에서 ‘P극장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며칠 후 혼자서 찾아가 보았다. 종로3가 일대를 한참 헤매다가 파고다 공원 뒤쪽에서 드디어 P극장 즉 파고다극장을 발견한 나는 주저없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극장 안은 컴컴했고 비릿한 냄새와 야릇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1층과 2층에 수백 개의 관객석이 놓여있었는데, 특히 2층에는 의자에 앉지 않고 뒤쪽에 서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 수많은 남자가 있었다. 그렇게 파고다극장은 당시 게이들의 만남의 창구이자 욕정의 분출구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얼마 후 파고다 극장에서 만난 남자를 따라 충무로에 있는 극동극장으로 진출했다. 그 당시 충무로, 극동은 그야말로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여서 고등학생부터 대학생과 직장인들로 넘쳐났다. 극동극장은 일반인들도 오는 극장이었지만 게이들이 이미 극장 안을 점령하고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매점 아주머니는 단골 언니들과 농담으로 너 식성 왔더라. 오늘 하나 건졌니?” 하며 낄낄대곤 했다.

 

극동극장 이외에도 그 당시 서울 시내의 삼류극장은 게이들의 크루징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 청계천의 바다극장, 신당동의 성동극장, 종로의 화신극장 등이 대표적인 크루징 장소였다.대부분 극장안에서도 유사성행위가 많이 이루어지는데 화장실이나 극장안 뒤쪽에서 대담하게 행위를 가지곤 하였다 종로 화신극장은 내가 들은 바로는 화장실벽에 구멍이 뚫린 최초의 극장이라고 한다.한번은 청계천 바다극장에서 어떤친구가 나의 그곳을 입으로 애무 해주었는데 끝나고 보니 지갑을 털리고 말았다. 하필 그날이 월급날이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카드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지갑에 남은 월급 10여만원이 그대로 들어있었는데 통째로 없어진 거였다. 서너달 뒤에 바다극장에서 다시 그놈을 만났다. 바로 잡아서 경찰서로 가자고 하니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서 그냥 참았다. 알고 보니 그는 그곳 소위 죽돌이 소매치기였다.

 

충무로 극동극장은 영화가 비교적 일찍 끝났고, 종로 파고다 극장은 늦게까지 영화를 상영했다. 모든 극장이 문을 닫는 새벽에는 두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한쪽은 종로 M사우나, 다른 쪽은 충무로 L사우나로 가서 2차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당시 두 사우나는 게이들의 크루징 독점 사우나라 할만했다. 주말마다 그야말로 박이 터졌다.

 

사우나 갈 돈이 부족한 학생들이나 새벽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파고다 공원 뒷골목에 있는 돌담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들을 일명 탑돌이또는 길녀라고 불렀다. 그들과의 섹스는 아주 쉬웠다. 첫차가 다닐 시간까지 장소만 제공해도 섹스가 가능할 정도였다. 당시 만났던 길녀 중에 기억에 남는 이는 필리핀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친구인데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충무로 극동극장을 주로 이용했는데 그곳에서 첫 애인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는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전문대에 합격해서 입학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울 ㅇㅇ동에서 하숙을 했던 그는 귀엽게 잘생긴 친구였다. 나는 그와 주말마다 데이트했고 입학식날에는 학교까지 가서 교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사랑을 키워가던 어느날, 그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새로 생겼는데 사법시험에 합격한 검사 지망생이라고 했다. 1987년 가을이었다. 연 초 서울대학교 박종철 열사의 사망 사건이 있었고, 그해 여름에는 민주화운동으로 6·29 직선제가 선언되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실연의 아픔을 핑계로 섹스에 빠져 살았다. 당시 88올림픽을 계기로 여러 사회제도가 자유화되기 시작하였고 게이 전용 휴게텔 속칭 찜질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이들이 많이 몰리는 일반사우나도 유행이었는데, 남영동 C사우나, 신사동 G사우나, 가락동 K사우나, 강남 ㅇ사우나 등이 게이들의 크루징 핫플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사우나와 휴게텔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사우나 생활에 지친 나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서 원양어선을 타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알아보니,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은 먼저 국내 오징어잡이 배부터 타면서 배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배를 타기로 한 친구와 함께 오징어잡이 채낚기 선을 타게 되었다. 하지만 목표는 원양어선. 채낚기 선을 타기 전에 원양어선 선원 교육을 받고 출국 준비까지 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