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코코넛의 눈코입귀

[코코넛의 눈코입귀] 당신 눈앞에 퀴어는 풀만 먹습니다. 버티세요

by 행성인 2025. 3. 25.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평소에 술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다. 일주일에 8번 정도 술을 마신다는 게 과장은 아닐 거다. 학교 수업과 알바와 집회 등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하고 나서 밤에 사람들과 함께 소주 마시는 게 삶의 몇 안되는 낙 중 하나인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사소하게 걸리는 게 하나 있다. 5년째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있어서, 일반 술집에 가면 생각보다 안주로 먹을 게 많이 없다는 점이다.

 

보통 메뉴에 가지튀김이나 감자튀김 같은 메뉴가 있으면 그걸 일단 시키고 본다. 감자튀김에 소주는 생각보다 많이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빈속에 술을 마시기에는 좀 그러니까 뭐라도 시킨다. 한국은 생각보다 비건 프렌들리하지 못한 나라이고, 그나마 식사를 할 때는 들깨수제비나 콩국수, 비빔밥 같은 메뉴를 찾아보기 쉬우니까 나은 편인데 술집에 가면 곤혹스럽다. 소주에는 국물 요리가 국룰인데 보통 술집에 있는 국물 메뉴가 부대찌개나 해물누룽지탕 같은 메뉴다 보니 국물 요리에 소주를 마시려면 집에서 요리해서 먹는 편이 제일 낫다. 다행히 나는 요리를 즐겨 하는 편이지만,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집에서 요리해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술주정뱅이 비건의 오래된 고민이다. 가장 마음 편한 해결책은 감자튀김과 소주가 궁합이 잘 맞는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이다.

 

퀴어 커뮤니티보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훨씬 일찍 만나서 얘기해볼 기회가 많았고, 첫 사회운동도 성소수자 인권활동이 아닌 동물권 활동이었다. 비거니즘을 지향하게 된 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년 이상 동물성 식품을 아예 먹지 않으려 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보통 동물권을 가장 우선적인 이유로 꼽는다. 동물을 착취하거나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과 착취에 대한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비거니즘 식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몇 년째 건강에 아무 문제 없고, 단백질 수치와 간 수치도 정상이고, 헬스를 하면서 하루에 110그램 정도의 단백질을 섭취하며 근성장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증거로 나의 가장 최근 인바디 수치를 제출하고 싶다) 원래 고기를 많이 좋아하는 편이어서 비거니즘을 지향하기 직전의 겨울에는 살면서 다신 없다 싶을 정도의 고기를 먹었는데(진짜 살면서 다신 없게 되었다) 고기를 안 먹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까 점점 그 맛을 잊고 생각나지 않는 것 같다. 위장이 약해서 고기와 유제품을 먹을 때는 급성 장염 때문에 일년에 한두 번씩 꼭 응급실을 갔는데 동물성 식품을 끊으니까 그런 일도 없어지고(실수로 모르고 유제품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 배에서 바로 반응이 왔다) 후각을 비롯한 감각도 더 예민해진다고 느낀다. 외모지상주의적인 발언은 하기 싫지만, 야채와 곡물로 영양분을 섭취하니까 체중 조절도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건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려 신경쓴다는 걸 전제로 했을 때이다. 감자튀김도 비건이고, 두부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아무튼 동물성 제품을 안 먹고 안 소비하는 생활이 딱히 나쁜 점도 없으니, 앞으로 계속 유지하리라 예상한다.

 

AI로 비건 퀴어 이미지를 요청해보았다.

 

퀴어 커뮤니티 밖에서 온, 오프라인 상으로 비거니즘에 대해 무지하거나 혐오적인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 꼭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 전반을 향해서 별의별 혐오발언을 하고, 되도 않는 논리로 악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극초반에는 그런 말을 듣고 보며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익숙해져서 오히려 퀴어 커뮤니티에서 각종 혐오 발언을 듣고서도 상처받지 않는 연습에 도움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확실히 정체성에 상관없이 비거니즘에 혐오적이거나 무지한 사람이 훨씬 적다는 것을 느낀다. 애초에 인권운동 쪽의 퀴어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비거니즘에 대한 감수성이 어느 정도 갖춰진 것 같기도 하고, 인권운동을 하는 퀴어들이 아니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편이 많다.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퀴어 커뮤니티가 비거니즘에 대한 혐오가 덜한 이유, 혹은 더 나아가서 비건들 중에 퀴어가 많거나 퀴어들 중에 비건, 혹은 비건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장 큰 이유는 차별의 교차성, 혹은 소수자성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않나 싶다. 여러 정체성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모든 종류의 혐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따라서 비거니즘에 대한 혐오도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인권운동을 하면서 비거니즘에 대한 감수성을 키운 퀴어들이 많다보니, 퀴어 커뮤니티도 그러한 감수성을 아예 낯설지 않게 반응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관찰을 단순히 커뮤니티가 아닌 가게나 업소까지 확장해 보면, 비건 프렌들리한 가게는 대부분 퀴어들도 많이 방문하고 퀴어 프렌들리하지만, 퀴어 업소라고 해서 반드시 비건 프렌들리하지 않다는 점이 재미있다. 여기서 퀴어 업소라고 하면 종로나 이태원에 있는 게이 술집 같은 것들을 말한다. 아무래도 나는 게이 술집에 갈 일이 많다 보니 다른 퀴어 업소나 술집은 잘 모른다. 종로에 나가서 친구나 동료들과 술을 마시려면 메뉴에 비건 옵션이 없는 것은 기본이고, 비건이 먹을 만한 메뉴가 애초에 거의 없다. 해봤자 감자튀김, 아니면 두부김치에서 두부만 골라 먹는 정도다. 분명 퀴어들 중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도 퀴어 술집에서 비건 손님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수요라는 면이 큰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퀴어들 중에 비건이거나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꽤 있지만 게이들(특히 시스젠더 게이들) 중에 비건인 사람은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다.

 

애초에 게이들이 비건 음식을 거의 찾지 않으니 게이 술집에서는 비건 옵션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이게 감수성 없는 한국 남성의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게이들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결론짓고 다른 (게이가 아닌) 비건 퀴어 친구에게 말해 보았는데, 게이 술집뿐만 아니라 홍대에 있는 레즈비언 업소들도 비슷하다고 한다. 고민이 많아진다. '게이''레즈비언' 업소는 비건 프렌들리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만 퀴어들은 비건 프렌들리 가게를 좋아하고 자주 방문한다. 어쩌면 '게이''레즈비언' 등 특정 정체성에 치우친 가게가 아닌, 모든 정체성에 열려 있는 '퀴어' 업소여야만 비거니즘에도 열려 있는 건가 싶었다. 실제로 내가 방문한 '퀴어' 혹은 '퀴어 프렌들리' 술집에는 비건 옵션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레즈비언'이나 '게이'와 같이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잘 가시화된 정체성뿐 아니라 차별받는 소수자인 '퀴어' 스펙트럼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더욱더 차별받는다는 감각의 교차성에 대해 열려 있는 걸까.

 

이런 관찰을 하다보면, 퀴어 커뮤니티 전반에 던질 만한 메시지가 하나 떠오른다. 좀 더 날카로워지고 세심해지자. 자신과 같은 정체성의 사람들과만 어울리지 말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퀴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 보자. 놀랍도록 재미있고 선하고 빛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퀴어 커뮤니티가 아닌가.(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정말 많지만, 알아서 걸러 만나길 바란다) 자신이 '퀴어 커뮤니티'라는 큰 무엇인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중에 분명히 있을 비건, 혹은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만나 보기 바란다. 그들의 동기와 니즈를 들어 보고, 그들과 함께 즐겁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클럽을 가길 바란다. 그리고 제발 제발 제발, '나는 못 하는데..... 너는 정말 대단하다', 혹은 '앞에서 고기 먹어도 괜찮겠어? 고기 먹어서 미안해' 라는 말을 하지 않기 바란다. 그건 하나도 칭찬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퀴어들 중에 본인이 대단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대단하다고 감탄하거나 고기 먹는다고 미안해할 시간에 그냥 미안해하지 말고 알아서 먹을 것 먹거나, 당신의 눈 앞에 있는 비건 퀴어가 불편해하지 않을 식사 자리를 만들거나, 아니면 일주일에 하루이틀이라도 비건 식단을 실천해 보거나, 화장품 등을 비건 인증 받은 제품으로 구매하는 시도를 해 보길 바란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비건 식단을 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려면 내 통장 잔고를 구경하고 가길 바란다. 제발, 진짜 제발, 몇 년 후에는 종로의 게이 술집 한두 군데에 비건 옵션이 생기게 다듪 열심히 좀 하길 바란다. 특히 당신들, 시스젠더 게이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