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이 남색한 죄 (광주 시민, 행성인)
이번 5·18에 무지개행동의 후원을 통해 행성인이 광주광역시를 찾아주셨습니다. 광주에 거주하는 처지에 감사한 일입니다. 5월 정신, 이제는 세계 정신입니다. 내란수괴 독재자 박정희‧전두환‧윤석열과 같은 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은 반드시 되새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로부터 45년이나 지났는데도 참극이 다시금 되풀이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5월 정신은 광주라는 지리적 한계나 망월동 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사들의 투쟁을 회고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면 바로 그곳이 광주입니다. 그런데 이번 버스는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열사들의 이야기와 기록을 함께 나누며 5월의 아픔과 각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를 만드는 데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의 제목인 ‘투사회보’는 전두환 신군부의 12·12쿠데타에 맞서 투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5·18 당시 들불야학이 만들었던 대안언론입니다. 198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리기 위한 시도였는데, 정작 이번 기행에서는 이를 나누는 자리가 부족했던 것 같아서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짧게나마 담고자 합니다. 시간 되는 대로 5·18 해설사 교육을 들어 다음 기행에는 이런 아쉬움이 없도록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5·18은 18일 하루 동안 발생한 일이 아닙니다. 1980년 5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무려 14일 동안 이어졌고 사상자만 5,000여 명에 달합니다. 14일~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시작되고, 18일 전두환의 계엄선포와 함께 특전사를 포함한 계엄군(반란군)이 광주로 진입하며 민족민주화대성회 주동자들을 포함한 전국 2,699명의 민주인사가 구속되고 일부는 도피하였습니다. 이날 총학생회 간부들을 피신시키던 전북대학교 이세종 열사께서 단순 추락사하였다고 알려지며, 그 진실이 44년간 은폐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군인의 가혹한 폭행이 사망원인인 것으로 밝혀져 5·18의 첫 사망자로 정정되셨습니다. 이후 시민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인 집회가 다시 조직되었으나, 21일에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신호탄 삼아 전남도청 앞에 모인 7만여 명의 비무장 시민들에게 10분여간 조준사격을 가한 후 잠시 물러나 광주를 봉쇄했습니다. 광주를 고립시켜 소요 사태를 야기하고 이를 명분 삼아 진압하겠다는 계엄군의 간악한 계략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에는 대동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집마다 대문 밖에 솥을 내걸고 소금 간을 하여 급히 만든 주먹밥을 시위대에게 나눠주었으며, 자발적으로 치안이 유지되어 광주 시내 45개의 은행 중 단 한 곳도 약탈을 겪지 않았습니다. 5·18 전야제에서 시민단체가 나눠드리는 주먹밥을 보신 분도 계셨을 텐데, 이는 연대의 의미를 드높이고 5·18이 광주 및 인근 지역 공동체 전체의 투쟁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5일, 계엄군이 다시 밀어닥칠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수습대책위는 총기를 반납하고 시위를 정리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도청에 남고자 하는 이들은 총기를 반납하고 해산하는 것이 곧 독재정권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계엄군의 총탄에 쓰러진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과 항쟁의 정당성을 스스로 져버리는 행위라고 판단하여 별도의 민주투쟁위원회를 조직합니다. 곧 들이닥칠 특전사 산하의 3·7·11 공수여단 등 20,317명의 계엄군에 맞서 도청에 남는다는 것은 오직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도청에 남아서 결사 항전했던 이들의 각오와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이셨던 윤상원 열사의 사례입니다. 윤상원 열사께서는 26일 저녁, 청소년을 포함한 시민군 동지들이 도청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 “동지 여러분,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저승에서도 사회운동을 계속합시다.”
두 번째는 천애 고아로 태어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사회를 경험하셨지만, 도리어 우리 사회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보여주셨던 박용준 열사의 일기입니다. 21일 밤 “오늘 오후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쓰러지는 우리 학생 시민들 품에 번지는 피! 그들이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라는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희생하겠다. 헬기 소리, 또 총소리. 싸우다 쓰러져간 우리 학우 그리고 광주 시민.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 / 도청으로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 마지막 일기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1
세 번째는 도청 침탈이 한참 진행 중이던 27일 새벽 거리에서 방송을 하셨던, 당시 22세의 여성이셨고 올해로 67세가 되신 박영순 씨의 애절한 목소리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릴 잊지 말아 주십시오.”
5월의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우리 또한 항쟁에 동참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열사들의 부르짖음대로 그날의 피, 눈물, 다짐을 잊지 않았기에 5·18민주화운동이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도 기억해야 할 동지들이 있습니다.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의 오세인 활동가,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육우당 활동가, 대한민국 육군 변희수 하사님, 매년 행성인의 추모테이블에 오르는 희영 · 영훈 · 키디다 · 크리스 · 찬혁 · 느루 · 도진 · 은용 · 희수 · 신엽 · 나환 · 김무명 · 이연수 · 임보라님, 광주에서 저와 함께 활동했던 광주광역시성소수자모임폴라리스의 디온… 그리고 사회에 의해 자행되었으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알려지지도 못한 수많은 성소수자의 죽음. 5·18을 통해 우리의 깃발에 무엇을 아로새겨야 할까요? 사그라들었던 생명의 불꽃을 다시 풀무질하고, 그 찬란함을 증언하고, 염원을 이루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성소수자 인권 쟁취의 끝이 지금은 보이지 않고 풍전등화 같을지라도, 우리의 운동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혐오와 압제, 차별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고, 앞서서 나가신 분들께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법 등 더욱 평등한 사회의 실현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우리 삶의 불꽃이 더욱 빛나기 위하여. 산자는 그 길을 따라 행동하여 세상을 바꿉시다!
- 본 내용은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에서 배포한 박용준 열사 관련 기록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천애 고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거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해 임의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사실관계를 축약한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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