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의 급진좌파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발행하는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2010년 7/8월 호에 실린 퀴어 정치를 둘러싼 논쟁이다. 퀴어라는 용어는 한국 LGBT 운동 안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퀴어라는 용어가 가진 맥락과 그것이 함의하는 성해방 전략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이라 판단돼 번역해 싣는다. 참고로 두 글 모두 잡지의 공식 견해가 아닌 개인 의견으로서 실렸다.

원문은 http://www.socialistreview.org.uk/article.php?articlenumber=11336 에서 볼 수 있다.

 

퀴어 정치학은 LGBT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퀴어 정치학은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 장애물일까 아니면 환영해야 하는 것일까? 찬반 주장을 소개한다.

 

퀴어는 급진적이다

앨런 베일리, NUS(영국 학생회연합) LGBT 담당자

상업화된 자긍심 행진에 대항해 벌어지는 퀴어럽션 (사진출처: http://queeruption.org.uk/)


게이 레즈비언 권리 운동이 단순히 게이와 레즈비언들로만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이 레즈비언 권리 운동은 언제나 수많은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체성을 가진 활동가들의 동맹이었다. 스톤월 항쟁은 흔히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항쟁으로 언급되지만 사실 참가자들 가운데 다수가 트랜스젠더들이었다.

 

퀴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퀴어는 운동을 분열시키려고 마음먹은 활동가들이 최근에 발명한 것이 아니다. 퀴어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1990년대에는 ‘퀴어 네이션’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미국에서 시위와 행동을 조직했다.

 

그러면 퀴어라는 용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처음에 이런 겁에 질린 얘기를 듣게 된다. “퀴어는 모욕적인 말이다. 퀴어는 편견이 가득한 자들이 우리를 부르는 말이다.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수 있나?!” 그런데 이 주장은 (혐오자가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를 걱정하는 것을 고려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명백한 약점은 차치하고) 혐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혐오자들이 우리의 존재를 혐오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명명하는 용어는 어떤 것이든 그들이 사용하는 욕이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그들 눈에는 모욕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혐오자들은 우리에게 욕과 비난을 쏟아 붓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말들을 재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를 향해 “게이 같은 놈”이라 외치는 소리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들었나? 그런데도 ‘퀴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게이로 규정하는 것에는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모욕적” 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좋게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이고, 정치적 견지에서는 적절한 주장이 아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칸칸이 분류해 딱지를 붙이는 체계는 자본주의에 딱 알맞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런저런 집단들에 집어넣고 분명한 차이점들을 창조한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분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런 저런 집단들로 쪼개고 우리가 너무 달라서 함께할 수 없다고 착각한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분열시켜 통제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퀴어는 이런 경계들, 이런 차이들을 무너뜨린다. 우리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칸칸이 분류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낙인찍히는 것을 거부한다. 퀴어는 “커밍아웃” 뒤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이며 모든 낙인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퀴어가 얼마나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지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이 요점, 퀴어가 좋은 이유인 것이다.

 

퀴어 행동주의는 LGBT 운동 내부에 있다. 퀴어 행동주의는 페미니스트 투쟁과 연계를 구축하고 있고, 대다수 동성애자 세계의 동화주의적 선택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퀴어 행동주의는 우리의 자긍심 행진의 상업화에 맞서 싸우고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설문지의 네모난 답변 칸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약간 상투적이 된 문장 “난 행복한 게이가 아니라 널 엿먹이는 퀴어다!(I'm not gay as in happy, I'm Queer as in fuck you!)”을 말하는데, 이 문장은 어느 정도 퀴어의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퀴어는 현재의 짜임새에 만족하지 않고, 이성애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에 동화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퀴어는 화를 내는 것(왜냐하면 우리가 화낼 것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급진적인 것,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퀴어가 운동의 분열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글쎄, 어느 정도는 그 말이 진실이지만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이성애자”가 지배하는 운동이 아주 단결이 잘 된다면 모를까!

 

일부 비판자들에 따르면 퀴어를 고매한 중간계급이 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 말이 중간계급이 번영을 추구하는 바로 그 사회에 그토록 무섭게 모욕적인 말이라는 사실은 좀 이상해 보일 때가 있다.

 

(스스로를 무엇으로 정의하든지 간에) “커밍아웃” 할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한 젠더 역할과 섹슈얼리티의 꼬리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동성애자 사회의 상업화로 귀결됐다. 우리에겐 이런 일이 전혀 놀랍지 않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 우리가 쟁취한 모든 것을 가져다가 타락시키고 브랜드화 해서 우리에게 되팔면서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해방됐는지 얘기하는 것과 똑같은 자본주의의 전술이다. “핑크 머니”의 가치를 누가 모르랴!

 

이런 분위기에서 퀴어는 남성 동성애자가 지배하는 상업적인 동성애자 사회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깃발이 되고 있다. “퀴어럽션queeruption”이 전세계 자긍심 행진과 다른 곳들에서 등장해 많은 현대 자긍심 행진의 탈정치화되고 흔히 상업화된 행사들에 대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켓팅 맨체스터”를 운영하는 사람들 일부가 진행하는 맨체스터 프라이드와 무단 점거한 건물에서 행사를 열고 급진적 퀴어 정치와 좌파 정치에 관한 워크샵들을 진행하는 퀴어럽션을 비교해 보자. 어느 쪽이 더 중간계급적으로 보이는가?

 

퀴어는 반자본주의적이다. 반자본주의자들이 퀴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단결이 필요하다

하니프 레이라비, NUS(영국 학생회연합) LGBT 위원회


아직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LGBT/퀴어들이 거리에서 공격받고,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고, 대중매체에 제대로 대표되지 않으며 다른 많은 방식으로 천대받고 있다. 인간 섹슈얼리티의 복잡성은 동성애자, 이성애자, 양성애자로 표시된 상자들에 구겨 넣어진다.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성에 더 개방적일 수 있지만 그 개방성은 섹슈얼리티를 왜곡해 그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데 이용된다.

 

리버풀에서 제임스 파크스라는 게이 청년이 거리에서 폭행당한 뒤 벌어진 동성애혐오 반대 시위. LGBT들만이 아니라 많은 이성애자들이 함께 참가했다.(사진출처:http://www.socialistworker.co.uk/art.php?id=19673)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된 섹슈얼리티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자본주의를 분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한다. 이 토론은 우리가 어떻게 그런 투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 이래로 LGBT 운동의 상식은 정체성 정치였다. 즉 LGBT들만이 진정으로 천대를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오직 우리만이, 단결된 “LGBT 커뮤니티”의 일부로서 천대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우리들은 그런 생각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단지 LGBT라는 이유로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LGBT 보수당원들이나 백만장자들도 있고 그들은 자본주의 구조에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돈과 권력이 대부분의 시기에 대부분의 동성애혐오와 트랜스혐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이성애자가 문제라는 LGBT 운동의 상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이성애자들은 지독한 동성애혐오자들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함께할 수 있듯이 이성애자들도 동성애혐오에 반대할 수 있다. 리버풀에서 제임스 파크스가 폭행당한 뒤 벌어진 항의 행진에는 LGBT와 이성애자 청년들이 많이 참여해 소란스럽고 분노에 찬 시위가 벌어졌다.

 

1984-5년 광부파업 기간에 LGBT 단체들은 광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을 벌였고 사우스 웨일스의 파업현장을 방문했다. 처음에는 일부 적대감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들은 변화했다. 한 광부는 “광부들과 변태들Pits and Perverts”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한 1500명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의 ‘실업급여가 아니라 석탄’ 배지를 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괴롭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러분의 배지를 달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지할 것입니다. 하룻밤에 바뀌진 않겠지만 이제 14만 광부들은 다른 운동과 다른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흑인들과 동성애자들과 핵무장 해제에 대해 알고 있고, 절대로 예전과 똑같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성정체성에 따라 분리해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숨겨진 오랜 역사가 존재한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권력을 잡은 노동자들은 동성애혐오 법률을 철폐했고 기존의 성역할에 도전했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거의 혁명적이었던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평등이 동성애자의 평등도 포함해야 한다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이런 전통을 이어나가려면 급진적 사상이 필요하다. 급진적 사상이란 성해방을 위한 투쟁이 단일 쟁점 운동이 아니라 정의와 자유를 위한 더 넓은 투쟁의 일부임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힘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 투쟁하면서 급진적 사상을 사람들의 일상 경험과 연결시켜 제시하는, 그러나 일상의 경험을 희석시키지 않는 활동가가 돼야 한다. 문제는 퀴어 정치학이 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정치가 그 과정을 얼마나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퀴어 정치학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이해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데 “퀴어”라는 용어의 사용이 특정 영역, 특히 학생들과 학자들 사이에 한정돼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노동조합에 LGBT 모임이 있는데 그중 어느 한 곳도 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단어의 사용이 함의하는 정치 전략이다. 퀴어는 동성애혐오와 트랜스혐오에 대한 분노를 반영함과 동시에 ‘스톤월[영국의 주류 동성애자 권리운동 단체]’과 같은 온건한 단체들과 남성 지배적이고 상업적인 동성애자 사회에 대한 환멸을 반영한다. 퀴어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주요한 전투가 성차별적인 우익 LGBT들에 맞선 투쟁임을 암시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스톤월’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은 적이 아니다. 스톤월이 지지한 법률적 변화들 덕분에 수많은 LGBT들의 삶에 실질적 개선이 있었다. 지금 주된 적은 보수당이다. 지난 보수당 정권 때 그들은 공공지출을 엄청나게 감축했고 동성애혐오 법률들을 통과시켰다. 이제 그들은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 척하지만 카메론은 섹션28을 지지했었다.

 

나는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하는 것이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러브 뮤직 헤이트 호모포비아’같은 활동들의 목적은 나치에 맞서 싸우자는 급진적 주제를 통해 모든 사람들, LGBT, 퀴어, 이성애자를 한 자리에 모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급진적 의제를 통해 단결을 이룰 수 있다. 스스로를 분리시켜 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퀴어 활동가들과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계속해서 함께 활동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어떻게 성해방을 쟁취하느냐다. 천대받는 사람들의 투쟁을 통해서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중심에 선 더 광범한 투쟁을 통해서인가? 우리 사이의 핵심적인 이견은 여기에 있다.

 

번역 _ 이나라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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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5 20:43 신고 [Edit/Del] [Reply]
    오, 재미있네요. 이런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 chang
    2010.08.05 22:11 신고 [Edit/Del] [Reply]
    퀴어 라는 말에 이렇게 깊은 함의가 있는지 처음 알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3. 이경
    2010.08.06 02:07 신고 [Edit/Del] [Reply]
    오~ 나라씨의 번역글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 좋은 글들을 번역해줘서 고맙고 잘 읽었어요~
    퀴어 정치학에 대한 이해와 논쟁은 우리가 성소수자 운동을 할 때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실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접근하고 이해할 것인가겠죠.
    동인련 회원들이 추가로 퀴어에 대한 논의를 접하고 싶다면 그런 자리를 마련해보는 것도 좋겠어요.
  4. 나라
    2010.08.06 13:46 신고 [Edit/Del] [Reply]
    역시, 이론적(?, 그닥 아카데믹한 내용은 아니지만) 논쟁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 ㅎㅎㅎ
    퀴어라는 말이 갖는 맥락이 한국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이 논쟁에서 드러난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고민해보고 우리의 활동 방향을 잡아가는 데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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