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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Rainbow Planet:번역글

LGBT 연합 건설하기: LGBT 커뮤니티 내의 트랜스포비아, 세 번째.

by 행성인 2011. 4. 7.

 

LGBT 연합 건설하기: LGBT 커뮤니티 내의 트랜스포비아, 세 번째.

Dr. Jillian T. Weiss

2009년 12월 15일, 오후 7시 00분

미국의 게이 커뮤니티 내에는 트랜스포비아가 있고, 그것이 ENDA나 결혼 평등과 같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우리의 연대를 위협하고 있다. 힘든 투쟁 과정 중에 우리끼리 싸우는데 들었던 시간은 버려진 시간들이고, 그 사이 가능한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게이 커뮤니티 내의 트랜스포비아에 대해서는 분명히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을 분석해보면, 매우 깊은 뿌리에서 온다는 것이 명백하다. 트랜스포비아는 단순히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없어질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가장해도 안 된다. 서로를 이해하자며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설득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트랜스포비아를 없애기 위한 한 걸음이 되겠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길로 가야할지가 정말 수수께끼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트랜스포비아가 영속하도록 하는 힘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런 힘이 작용하는 데는 원인 - 정확히는 많은 원인들 - 이 있고, 단순히 트랜스포비아라는 결과로 끝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조장하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트랜스포비아는 이름과는 달리 "포비아(공포증)"가 아니고, 그렇게 부를 경우 놓치는 지점이 많다. 이전 글들을 통해 진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드러났기를 바란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해체해낼지 제안하려 한다. 아마도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다.

 

첫째 편과 둘째 편에서 자세히 이야기했듯이, 미국 게이 커뮤니티 내의 트랜스포비아는 여성성을 보이는 남성에 대한 고대부터 이어온 낙인과 더불어, 성별 정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성적 지향의 이론화,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적 연대를 압박하면서도 동시에 성별 타협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허용에 기반하고 있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목소리만 높은 소수의 사람들은 성전환 수술을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위험하고 잔인하며 효과도 없는, 의학적 "치료"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왔다. 성전환 커뮤니티의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와 트랜스혐오적인 게이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는데, 그런 게이들의 거부가 세상 속에서 이미 유약해져버린 장소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트랜스포비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바로 이 자들을 먼저 해체해야한다.


편견에 맞서기

법학 교수이자 사회과학자로서, 내가 학생들에게 이해시켜야만 했던 개념이 하나 있다. 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상 아무도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가 완전히 동의하는 몇몇 사람들을 빼고) 편견과 무지의 도가니탕에 빠져있다는 것은 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좀먹고 있는 그 병폐에서 스스로는 빠져있다.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개념은 개인 수준의 "객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언론의 "객관성"은 존재하는데, 이것은 한 이슈를 보고하면서 하나가 아닌, 여러 관점을 보이는 것이다. 다만 이 글의 논점과는 다른 이야기다). 경험과 기억과 역사를 지닌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의 시각을 갖게 된다. 이 시각이 바로 '편견bias'이다. 편견이란 건 단지 나치즘과 같은 폭력적인 편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옥스포드 영-영 사전에 따르면, 편견은 성향inclination이나, 편향leaning, 경향tendency 등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지배된 영향력, 충격, 중요성;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을 가게 하는 것, 혹은 그의 기준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태 가정의 배경을 가지고, 중산층, 백인, 고학력, 민주당원,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무신론자로, 미국의 북동부에 살고, 교육계에서 일하면서, 대학에 진학하려는 18세 아들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삶과 교육, 정치, 경제, 종교, 관계성, 사회질서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과연 내가 대학생으로 가득한 교실 앞에 서서 내가 가르치려하는 것들이 모두 순전히 사실이고, 이 사실들을 고르는 것, 강조하는 것, 학생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 그들이 시험을 위해 이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가 내 배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를 읽고 내 시각을 내비치지 않는 것을 통해 모든 편견을 없애야할까? 그건 편견을 없애지 못한다. 단순히 교과서를 쓴 사람들의 편견을 재생산할 뿐이고, 수업을 죽도록 따분하게 만들 뿐이다.


최선의 수업은 내 편견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제시하는 것이고, 학생들에게 나의 시각이 옳은지 아닌지 스스로 평가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내 자신의 편견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자라오면서 획득한 시각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당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

어떤 사람들은 다른 측면 - 나의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는 그것 - 을 보고 더 잘 이해한다. 변호사라서 내가 믿지 않는 위치를 대표해야하는 일도 종종 있다. 지난 25년간 나는 이를 통해 다른 측면을 보고 이해하는 수완을 얻었다. (주여, 벌써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까?)


다른 측면을 이해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오랜 시간의 고찰이 필요한 기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를 안다. 우리는 인권을 지지하고, 평등과 모두에 대한 공평함을 지지한다. 우리는 증오와 폭력, 편견, 폭군에 반대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왜 이렇게 느끼는지 알고, 왜 반대편이 잘못되었는지를 안다. 아주 가끔, 우리는 왜 그들이 “옳은” 지를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의 위치에서 본 적이 없다. 그들이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한 뒤틀린 문화 속에서 자라난 어린이처럼 세뇌되었는지, 혹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했는지, 혹은 전쟁이나 굶주림으로 (우리가 말하는) 편견에 가득한 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것이 그 편견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지만.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차, 맹렬히 비난하는 것으로는 그 편견을 뿌리 채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실상, 이런 분노는 문제의 근원을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상정된 적을 필요로 한다. 이 적들은 그 분노를 자꾸만 설명하려 들거나, 편견을 강화시키려하거나, 혹은 인정을 촉구하는 사람들이다. 분노로 가득한 비난은 입장을 고착시킬 뿐이다.


왜 트랜스젠더들은 분노하는가?

분노로 가득한 비난이 입장을 고착시키고 문제를 더 나쁘게 한다고 해도, 때때로는 피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들은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용서할 수 없는 편견과 차별을 경험해왔다. 내가 충분히 설명해낼 수는 없지만, 그건 마치 내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내 여섯 살 아이가 나라의 반대편으로 옮겨가야만 했고, 환영받지 못했을 때와도 같다. 법에 호소하는 것이 곧 그를 영원히 잃는 것을 의미한단 걸 알았던 것,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곧 끊어버렸던 것, 비난과 분노에 찬 말들을 들은 것, 그가 나를 언제 볼 수 있냐며 물을 때, 그의 작고 새된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들은 것, 그리고 그의 비통한 울음을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것처럼. 이제 거의 10년이 지났건만, 고통이 밀려오고 눈물이 컴퓨터를 적신다.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고, 몇 분간 흐느끼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이것이, 직장이 아닌 곳에서 가족이나 친구의 보호 없이 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비웃고, 나를 뒤쫓아 오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웃으려 하고, 아니면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폭력으로 위협하던 경험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트랜스혐오적인 글을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자들 또한 용서할 수 없는 편견과 차별에 고통 받고 있다. 게이 남성과 레즈비언 여성은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도 병원에서 함께할 수 없고, 아픈 파트너의 보험을 위해 수천 달러를 더 지불해야하며, 심지어는 보험 가입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공격받기 쉽고, 아이들로부터 격리되며, 좋아하는 사람을 만지거나 껴안거나 키스하기만 해도 폭력과 살인의 위협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동성애자들은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고 동성애자라는 사실만으로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다.


물론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도 호모포비아가 있다. 일부 트랜스젠더들은 동성애 이슈나 동성애자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이 커뮤니티 내의 트랜스포비아를 향한 트랜스젠더들의 분노와 트랜스 커뮤니티 내의 호모포비아를 향한 동성애자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우리는 분명 혐오에 대해서 화를 내야 한다. 인간으로서 격분하고 화를 표현해야만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딱 그 정도가 한계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분노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전-부인, 내 아들은 지금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화나고 슬픈 시간이 지나간 것에 감사한다. 우리는 분노에 휩싸여 서로를 비난하던 시기에도 서로 소통했다. 나도, 그녀도, 내 아들도 어려웠지만 꾸준히 노력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했고, 화가 났을 때도, 슬펐을 때도, 배신감을 느꼈을 때도, 짜증났을 때도 이야기했고, 이것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사실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해냈고, 신에게 감사한다. 내 아들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글을 쓰기도 했다.


정치 투쟁 - 혹은 분리 - 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앞에서 밝혔듯, 게이 커뮤니티의 트랜스포비아는 정치적인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게이 커뮤니티의 트랜스포비아를 없애기 위해서는 트랜스 커뮤니티의 힘을 길러 싸워야 하는가? 아니다. 분명 문제는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어떤 문제라도 그 문제를 만들어낸 인식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권력이 그렇게 작은 것은 우리가 소수라는 점과, 효과적인 정치적 요구를 만들어내기엔 너무 분리된 위치에 있다는 것도 한 원인이다.


다른 해결책으로는 분리, 즉 LGBT 연대에서 트랜스젠더들이 빠져나와 그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있다. T를 LGB로부터 분리하고, 문제를 회피하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가능하다. 많은 트랜스섹슈얼들은 자신을 "감추는" 것을 통해 이것을 하려 한다. 그들은 이성애자 세계에 숨어들어, 그들의 역사를 부정하고 지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경계하여, 트랜스포비아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편견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단지 회피하는 것이다.


소통이라는 해결책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다른 답을 제시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처럼, 정치나 경제가 해방을 위한 열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해방은 언어와 사람 사이의 소통을 통해 찾을 수 있다. 그의 절묘한 글은 서구 사회가 귀족적인 탑-다운 구조에서 민주적인 바텀-업 구조로 변해가는 과정을 쫓는다. 그의 주장은, 특정한 그룹의 말 만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사회 - 귀족정치 - 에서 더 다양한 계급과 국가에 속한 더 많은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변화가, 그 긴 변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와 자유를 성장시키는데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같은 논리로,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열쇠는 바로 소통이다. 여기서 나는 "소통"이라는 단어를 매우 넓은 범위, 즉 '연결'이라는 의미 범주로 쓰겠다. 여러 종교가 모인 집단에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관용했듯이,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그룹 또한 트랜스섹슈얼, 트랜스젠더 그룹과 소통해야 한다. 이 소통이란 단순히 형식적인, 글로만 쓰인 소통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대화를 포함해야 한다. 두 커뮤니티 모두에 중요한 이슈를 알아내고 꺼내들어야 한다. 차이와 논쟁이 되는 지점들 또한 이야기되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이 크게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빌레리코 프로젝트’는 동성애자들과 트랜스젠더들이 소통할 수 있는 그런 플랫폼의 일종이다. 물론, 이런 플랫폼이 가져오는 문제도 있다. LGBT 동맹의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기분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많은 논쟁과 불편함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솔직한 의견들을 회피하는 것은 대중과는 합의하고 내부로는 불화를 낳는 분위기를 만들 것이며, 이것은 2007년 ENDA에서 성별 정체성을 삭제한 것과 비슷한 일을 낳을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하나를 말하고, 나머지를 권력의 장에서 말한다. 나는 지지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 노골적인 트랜스혐오 발언에 대해 사과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빌이 골드의 포스트를 게시한 것이 완벽히 실수였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말한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분명 많은 곳에서 이런 이슈들을 솔직하게, 그리고 열린 자세로 논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동성애자들이 왜 이런 글에 트랜스젠더들이 분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와 경험을 우리만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우리가 과잉반응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빌레리코 같은 플랫폼은 불충분하다. 나라 전체에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온라인 토론 플랫폼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버마스가 말했듯, 자유로운 대중 영역의 소통은 정치와 경제에서 삶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다.


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으로는 불충분한가


대중 공간은, 논쟁과 소통으로 가득하기는 하지만, 쇠퇴하고 있다. 상위의 몇몇 기업이 소유한 영리 매스 미디어가 성장함에 따라, 비판적인 대중은 수동적인 소비자 대중으로 변화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객관적인 체하지만 기업의 관심사로만 가득한 몇몇 소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에 만족한다. "대중 공간"은 광고주들과 그들의 이익에 따라 조종되고 있으며, 광고수입을 올리기 위해 주목을 끌기 위한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공적이고 합리적인 합의를 얻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다. 좋은 소식은,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귀족적이고 봉건적인 사회를 민주적이고, 공공에 의해 공유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지금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대부분은 - 스스로는 대중의 정신적인 양식을 담고 있다고 말하지만 - 이익에 대한 관심에서 선택된 것들이며, 이런 선택은 직접적인 검열은 아니지만 시청률에 대한 요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게걸스럽게 높은 시청률을 요구하는 것은, 가장 "대중적인" 시각만이 방송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수자의 시각은 왜곡되어 방송되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을 폄하하며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매체들은 시선을 끌기 위해서 겁을 주는 제목이나, 섹스, 스캔들 등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하버마스가 의미했던 해방이 아니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가 우리의 갈등과 반목을 재생산하지 않을 것이라 희망하기엔 아직 많은 것이 불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은 젊은 세대가, 섹슈얼리티나 젠더에 있어 좀 더 자유로운 세계에서 자라나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좀 더" 자유로운 세계일뿐이다. 60년대에는 아이들이었던 세대가 스스로를 성 문제라던가 인종 갈등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이 끌어들인 것이었고, 우리의 분열을 지속시키는 이러한 힘들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에서도 계속 작동하고 있고, 작동할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LGBT 커뮤니티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지만, 더 많은 사람이 침묵하고 있고, 이런 침묵은 그들이 나이 들고 삶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더 커질 것이다.


LGBT 연합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서로 다른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커뮤니티라는 형태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비전은 전국 도처의 작고 지역적인 아웃리치 그룹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져서, 게이와 트랜스젠더의 소통을 늘리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사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에 관심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주장하겠다. 또한 나는 여러 종류의 이런 커뮤니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국적인 어떤 조직이 이 일에 헌신할 하위 조직을 이끄는 것만으로는 정말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는, 큰 전국적인 조직들이 몇 개 있다. The National Gay and Lesbian Task Force가 진행하는 Creating Change Conference.가 가장 좋은 예다. 매년, 수천 명의 LGBT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며칠을 함께 보낸다. 이 회의에선 서로 다른 커뮤니티를 위한 많은 종류,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룬다. 그 주제 중에는 LGBT에 관련되지 않은 주제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인종, 계급, 장애 등 사회적인 계층화에 관련한 것들이다. 나는 이 회의에 참석해보진 않았지만,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일 년에 한번 열리는 회의가 우리 모두를 함께하도록 할 수 있을까? 아니다. 확실하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이고, 모두가 참여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단지 2천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필요하다.


우리들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 게이든 트랜스젠더든, 전국 도처의 단체에서 일어나 분열을 넘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것이다. 작은 모임에서, 페인트가 벗겨지고 우그러진 접이식 의자가 있는 방의 형광등 아래서 사람을 만나는 게 필요할 것이다. 큰 모임에서, LBGT 커뮤니티 내의 이슈를 이야기하고 회의를 가져야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처음엔 너무 작은 일이고, 하는 것이 측은해 보이고, 희망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LGBT의 "경계를 초월한interfaith" 모임이 분명 후에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단체들이 활동하는데 씨앗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의 가득 찬 운동 일정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LGBT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다면, 그리고 LGBT라는 단어를 단지 허울뿐인 약어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반드시 모든 계급과 모든 지역을 넘어 우리 안에서 더 많이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지금 상태의 커뮤니케이션은 정말 불충분한 상태다. 누구나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퀘스쳐닝, 인터섹스의 연합에 대해 말하지만, 이 연합을 위해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장 해야 할 일들에 비해, 정말로 조금이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퀴어와 퀘스쳐닝은 같은 목적과 동기를 갖고 있는가? 물론 있다. 우리가 서로의 역사, 경험과 걱정을 잘못 이해한 채로 연합을 유지해낼 수 있을까? 유지할 수 없다. 연합을 만들기 위해 단지 몇 개의 온라인 플랫폼만 만들면 될까? 아니다. 그렇게는 불가능하다.


연합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전 론 골드의 포스팅 같은 글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ENDA에서 성별 정체성을 삭제하려는 사건이 또 일어날 것도 예상할 수 있다. LGBT 커뮤니티 내에서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진실은, 이 문제가 론 골드에 관한 것도 빌 브라우닝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훨씬 큰 문제다. 우리는 나무를 보느라 숲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글을 쓰는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위한 큰 계획이라도 있나?


내게는 그런 계획이 없다.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그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어떤 종류의 해결방법이 있을지를 지적해내는 작업도 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는, 나는 단지 대화가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를 통해, 어떤 식의 세상이 필요할지를 이야기하고, 우리 사이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이해했으면 한다. 이를 통해, 단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임시처방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단지 우리들을 문제로부터 분리시키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정치적인 갈등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뤄낼 수 있기를 바란다.


LGBT 커뮤니티 내에서, 우리는 사실 다른 이들의 커뮤니티와 함께 연합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진짜 "LGBT 커뮤니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해왔다. 이제 하나의 연합을 만들 때가 왔고, 이미 "하나의 연합"이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


우리는 연합을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 아니면, 지난 역사를 계속 반복하다가 파멸하는 것만이 남을 뿐이다. 당신은 연합 구축을 위해 어떻게 조금이나마 기여를 할 것인가? 이제 이야기해보자.


번역 :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_서리

원문: http://www.bilerico.com/2009/12/building_the_lgbt_alliance.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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