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문화의 언어, 폐쇄적이지만 아름다운 판타지의 현실적 한계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비평
1. 도입
흔히 ‘동성애 바람’으로 지칭되는 대중문화계의 흐름은 이제 그 신선함이 어색할 만큼 익숙해졌다. 이는 곧 많은 콘텐츠에 길들여진 한국의 ‘똑똑한’ 대중들에게 동성애 소재가 더 이상 만만하게 접근될 수 없음을 의미할 터, 그래서 최근에는 국내외의 원작을 리메이크함으로써 일종의 ‘안전빵’에 기대거나 ‘팩트’를 가미하여 국내 관객과 시청자들의 공감을 넓히는 전략으로 다가서는 작품들이 많아진 듯하다.
예의 전략은 연극계에도 통하는 바, 뉴스에서 ‘파격’으로 수식된 작품들의 상당수가 동성애소재 연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다른 시청각매체 분야보다 동성애 소재를 다루는 제작편수가 많은 연극계에서는 이미 많은 전략들이 시험되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중매체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소규모적 특성이 동성애소재를 용이하게 다룰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것도 한 몫 하겠지만, 매일이 불황인 연극계의 궁여지책이라는 가설도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한국의 연극계가 다른 분야들에 비해 유연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응?)
아무튼, 동성애 소재의 연극은 최근에만 벌써 두 편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인권모임 맥놀이에서 ‘게이 연출’을 선전문구로 내세운 <꽃피는 포장마차>가 무대를 마쳤고, 탄탄한 제작사 아래 한참 상연중인 <거미여인의 키스>가 대학로를 달구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다루게 될 작품은 바로 <거미여인의 키스>다. 원작 자체가 이미 동성애 소설로 정평이 나 있는데다, 이전에도 수편의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1985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된 작품이다. 국내에만도 벌써 2006년 이후 두 번째 무대. 제대로 맛을 보기 위해서라면 소설원작은 물론 영화와 적어도 이번의 연극을 두루 아우를 가치가 있을 텐데, 슬슬 시동을 걸어보자.
2. 인물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 쓰인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Manuel Puig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각주1) 내용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 감옥을 배경으로 하며, 주로 감옥에 갇혀있는 두 인물- 디스플레이를 직업으로 하는 성적소수자 몰리나와 반정부게릴라조직의 지도자인 발렌틴 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내용의 대부분은 감옥에서 이뤄지는 대화로 구성되며, 한 방에 갇혀있는 두 인물이 무료함을 채우기 위해 영화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영화이야기를 들려주는 쪽은 몰리나이다.
‘항상 완전무결했어. 레이스가 달린, 목이 긴 옷으로 목의 주름을 가리고 있었어. 모든 훌륭한 여자들처럼, 나이 때문에 진지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애교를 떨 줄 아는 멋진 여자였어. 그런 여자들은 나이를 먹어도 여자로 남아 사랑 받고 싶어 하거든.’
‘그래 완전무결하군. 그녀는 식모를 부리면서, 돈 몇 푼 때문에 할 수 없이 일하는 그들을 착취했겠지. 당연히 그랬을 거야. 그녀는 자기 남편과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남편은 그녀를 착취했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했을 거야. 마치 노예처럼 집에 가두어놓고, 그를 기다리게 하면서….’(27-28)
표면상으로 두 인물은 상극의 캐릭터로 연출된다. 한쪽이 현실의 즐거움을 찾는 대중문화의 속물이라면, 다른 쪽은 정치적 이상을 가슴에 품으며 미래만을 향해있기에 현실의 치부를 속이고 은폐하는 냉정하고 이성적인 마초남자의 캐릭터이다. 대중의 장르영화들을 소개하는 몰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발렌틴은 초반부터 냉정하게 그(녀)를 비판한다.
3. 몰리나의 영화
소설에서는 몰리나가 초반부터 극이 끝나는 시점까지 발렌틴에게 여섯 편의 영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각주2) 소설 속 영화들은 실제 상영되었거나 작가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들로, 하나같이 통속적이고 장르화된 작품들이다. 일테면 장르를 불문하고 이야기의 축을 구성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 외부의 압력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되는 이야기들. 그 나물에 그 밥 같지만, 각각의 영화는 소설 흐름에 맞게 배치됨으로써 극중 상황변화에 연관시켜 유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연극에는 상연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따르게 된다. 때문에 연극에서 여섯 편의 작품을 모두 상연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을 안는다. 대개의 경우 영화들 중에 한두 편만을 따로 뽑아서 극의 내용전반에 배치하는 경제적인 방향으로 연출하는 방법을 택하는데, 가령 85년도에 제작된 영화의 경우 나치선전영화만이 몰리나를 통해 묘사되면서 극의 흐름을 아울렀다면 이번 연극에서는 원작에서 몰리나가 처음 이야기해준 영화 <캣피플>만이 극의 호흡을 같이 한다. (각주3)
여기서는 연극에 초점을 맞춰 <캣피플>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의 내용은 드라큐라의 고향 트랜실베니아 출신 이레나가 뉴욕으로 건너오고(연극에서는 파리로 각색된다.) 그녀를 유혹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겪는 기이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몰리나의 설명에 따르면, 여자주인공은 자신이 살던 지역에 전설로만 전해지는 표범여인이다. 감정적 충동이 표범의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에 그녀는 쉽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그로부터 거리를 둬야만 하고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캣피플>의 주요 골자이다.
몰리나는 이레나의 사랑과 질투, 죽음에 이르는 기승전결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면서 감옥에 있는 발렌틴과의 관계를 삽입한다. 영화내용을 몸소 재현하는 몰리나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독자와 관객들은 표범여인의 이야기를 두 사람만 있는 감옥의 상황에 비교하게 된다. 표범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남자를 위협하는 표범여인. 이야기를 하면서 몰리나는 여주인공 이레나에게 동화된다.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들 역시 몰리나의 판타지 속에서 그(녀)와 발렌틴 사이의 관계로 등치된다. 나아가 영화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발화자인 몰리나는 자신의 호흡에 따라 영화를 조율하고 그(녀)의 주관성을 상당 부분 개입한다. 그렇게 영화는 벨벳과 장식적 디테일들이 부각되고, 여성캐릭터에 대한 과장된 묘사들에 편중된 채 발화된다.
‘그는 그녀가 입은 이상한 옷차림새로 유럽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그녀는 온통 바나나를 매달아놓은 것 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거든.’(19)
이에 무시와 경멸로 일관하는 발렌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계속 말해봐.’ 혹은 ‘먹는 것과 벌거벗은 여자들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말아줘.’ 편집증적 태도를 보이는 그가 몰리나에게 의지하며 점차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이 내비치는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감상의 포인트일 수 있지만, 대체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주도함에 있어서는 몰리나에 비중이 실려 있다.
4. 몰입의 요소 Ⅰ : 연기의 친밀성
마치 몰리나가 접신된 것 같은 정배우의 표정과 제스처 영화에서 감옥은 콘크리트 벽을 꾸며 감옥의 어두운 면을 부각한다. 반면 연극에서는 벽 자체에 둥근 패턴을 주고 조명을 스며들게 함으로써 공간에 색과 리듬을 부여하고 있음이 비교된다.
번역된 소설의 딱딱한 문자를, 외국어로만 볼 수 있었던 대사의 리듬을 우리말로 가져와 상연하는 것은 분명 시대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일정부분 배우의 역량과 연출능력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고려할 때 본 연극은 소설의 문장들을 비교적 잘 보존하여 배우들의 발화로 연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정성화와 최재웅의 무대만을 관람한 탓에 공연에 참여한 모든 배우들을 평가범위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불어 배우들에 대한 평도 감상자로서 몇 가지 주관적인 평에 그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정배우의 노련한 연기는 종로나 이태원에서 볼 수 있음직한 애티튜드를 환기시켜준다. 영화의 경우 몰리나가 중저음의 ‘우아댁’이었다면 정배우는 ‘끼순이’ 언니 같았다고 할까. 그의 성정체성을 알 리 만무하지만, 주책맞은 애드립도 능청스럽게 던지며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내공을 보면 분명 ‘이쪽’ 친구들을 만나면서 캐릭터를 분석한 티가 여실하다. 영화에서는 몰리나가 면도하는 신을 굳이 보여주면서 남성의 그늘을 드리운 반면, 정배우는 시종일관 여자임을 자처하며 앙탈부리며 활기 넘치는 모습을 고수하는 점 또한 비교되는 부분이다. 한편 발렌틴 역을 맡은 최배우가 연기한 젊은 게릴라의 캐릭터는 자칫 반항아와 ‘까칠남’의 면모만을 부각시킨다는 함정을 극복하고 예의 진한 눈빛으로 자칫 모자(?)관계처럼 보일 수 있는 (두 인물의 나이차는 소설에서는 11살로, 연극에서는 8살로 나타난다.) 두 인물 사이의 비주얼을 대체로 잘 맞춘 듯하다.
이 때 연극의 무대와 관객이 갖는 가까운 거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를 거의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는 연극무대가 갖는 자체적인 친밀성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소설 원작의 구성 자체가 감옥이라는 특정 공간만을 배경으로 삼고 다른 서술 없이 대화로만 내용의 흐름을 이끌어감으로써 텍스트를 무대화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작품이 상연되는 ‘무대화된 공간’으로서 감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몰입의 요소 Ⅱ : 무대, 감옥, 하위문화
<거미여인의 키스>는 시종일관 감옥에서 일어나는 대화만을 다룬다. 외부에서 피 튀기는 정치적 대립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감옥은 밀폐된 공간으로서 현실과 차단되어 있다. 이상하리만큼 <거미여인의 키스>에서는 수감자를 직접적으로 감시하는 시선을 따로 두지 않음으로써 감옥의 벽이 두 인물의 관계를 견고하게 지켜주는 듯하다. 이는 두 인물이 서로 의지하고 나중에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조건으로 공간화 된다. 다만 감옥의 벽을 연출함에 있어 연극무대는 몰리나의 취향을 십분 고려하여 동글동글한 텍스처의 목재장치로 다소 비현실적인 감옥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안락한 느낌을 준다. ‘아름다운 감옥’이라는 수식이 하위문화적인 공간을 설명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립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성애적 유대는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공간 외부와 대립하면서 공간을 ‘성차화’ 한다. 밀폐된 공간은, 소수자들 간의 유대가 강조되는 하위문화 게토로서 외부의 부권적 위계로부터 괴리되고, 서로의 치부를 감싸줄 수 있는 전형화된 여성적 공간, 현실의 위계와 대립을 판타지로 점철되는 자족적인 모성의 공간으로 수식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발렌틴의 대사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무인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도 여러 해 동안 둘이서 외롭게 지내야만 하는 무인도 말이야. 감방 바깥에는 우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이 있어. 하지만 이 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어. 여기에는 누가 누구를 억압할 수 없어.…’ (268)
상부에서 반정부단체의 정보를 얻기 위해 몰래 약 탄 스프를 먹여 몸이 약해지는 발렌틴에게 몰리나는 바지에 싼 설사까지 손수 치워주는 모성을 보인다. 남자의 똥을 치우는 그(녀)의 배려, 는 발렌틴으로 하여금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몰리나에게 동화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은 그(녀)의 끝없는 사랑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몰리나는 수시로 불려가 발렌틴의 상태와 정보를 보고하는 상부의 지시를 받으면서 발렌틴을 케어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발렌틴의 정보를 알려주는 대가로 그(녀)를 가석방해준다는 상부와의 묵약이 이미 존재한다. ‘모범수’로 호명되지만 몰리나는 상부와 감옥을 매개하는 중간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밀폐된 공간의 은밀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감옥은 본질적으로 수감자와 감시자로 구분된다. 감옥 자체가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시인하게 만들고 지배언어로 길들이기 위한 기능을 요구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감옥은 폐쇄적인 동시에 외부의 위계적 권력이 삽입된 공간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두 인물의 사랑과 유대는 고립된 공간에서 위계가 반복되는 구조아래 죄인을 색출하기 위한 교란의 도구로 활용된다. 결국 판타지는 자족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6. 작품 속 성적소수자의 모호한 위상
그렇다고 우리는 그(녀)를 일방적으로 위계질서의 희생양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상부에게도 모호한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몰리나 같은 놈이 어떻게 행동할지 점치는 건 어려운 일이오. 좌우간 그놈은 변태니까.’(324소장)
감옥 안에서의 유대와 상부와의 거래 사이를 오가며 모호한 처지를 유지하는 몰리나는 작품의 끝에서 사랑의 서약처럼 발렌틴의 부탁을 들어주고 반정부적 조직에 가담하기로 결단한다. 가석방이 된 뒤에도 발렌틴과의 접선을 의심받으며 상부로부터 감시당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발렌틴이 주도하는 반정부조직이 자신으로 하여금 들통 나지 않게 하기 위해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그렇게 몰리나의 죽음은 슬픈 사랑의 비극으로 채색된다. 하지만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발렌틴과 상부권력 사이에서 몰리나의 모호함은 그대로 잠식되는 것일까? 기존의 연구들은 몰리나와 발렌틴 사이의 관계개선에 초점을 맞추며 거시정치와 하위문화 사이의 화해와 미래로 연결 짓는다. 하지만 거시정치와 하위문화 사이에 발생하는 언어들의 불화는 쉽게 풀릴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물고 늘어지자면, 우리는 성적소수자의 언어가 작품의 공간 속에서 어떻게 기입되는가의 문제로 연결시킬 수 있다. 과연 몰리나의 언어는 극중에서 완전히 발화된 것일까? 몰리나의 위치, 발렌틴과 상부조직 사이에서 모호하게 걸쳐 있는 몰리나의 언어는 반정부게릴라와 빅브라더사이의 대립을 매개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감옥 안에서 관계를 주도하던 그(녀)가 외부의 상황에 개입하는 데 있어 적극성을 결여한다는 점은, 폐쇄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판타지가 현실에서는 숭고함의 베일을 뒤집어쓴 채 무력해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감옥에서는 그(녀)가 관계를 주도했던 반면 감옥 밖에서 그(녀)의 주관성은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출감된 이후부터 죽음에 이르는 몰리나의 행적을 보고서 형식의 딱딱한 문자로만 재현하는 원작과 연극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비록 감옥에 혼자 남아 고문을 받고 가사상태가 된 발렌틴이 옛 애인과 몰리나를 그리워하며 경멸해 마지않았던 통속적인 영화들을 자기 입으로 발화함으로써 몰리나의 감수성에 동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작품 안에서) 그의 변화는 감옥 밖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발렌틴이 석방된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주지 않은 채로 작품은 몰리나의 죽음보고서와 발렌틴의 슬픔으로 끝난다.
몰리나는 감옥 안에서 혹은 하위문화 내부에서 현실의 위계를 통속적이며 유미주의적인 판타지로 감추지만, 그 판타지는 정작 현실의 위계 속에서는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지 못한 채 잠식된다. 여기서 우리는 모호함으로 점철되는 동성애자의 존재적 위상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지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매혹적이지만 위협적인, 아름답지만 믿을 수 없는’ 따위의 대비적 수식은 이성애주의가 제도화된 사회 내부에서 겉돌 수밖에 없는 (남성)성적소수자에게 가해진 존재적 위상이자 일련의 스테레오타입이다. (각주4) 표범여인과의 동일시만을 보더라도, 인간과 표범 사이에 위치한 표범여인의 존재적 이중성은 생물학적 남성임에도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몰리나의 존재와 등치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시종일관 필자가 몰리나를 그(녀)로 표현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작용한다.) 이레나(그리고 몰리나)는 인간과 표범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예의 전형적인 이중인격의 소유자로 설명된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 몰리나의 존재는 미화된다. 고문을 받고 가사상태에 이른 발렌틴은 몰리나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위협적인 유혹녀인) 표범여인이라는 수식을 ‘거미여인’이라는 호칭으로 전환하며 그(녀)를 묘사한다. ‘끈끈한 밧줄이 수북이 나 있어. 구역질이 날 것만 같은 털이야. 하지만 쓰다듬으면 아주 부드러운 실 같을 거야.’ 위협적인 매혹은 연민과 애정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거미는 거미줄 밖에서는 위협에 노출된 혐오스런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7. 사랑만세의 부작용
사랑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위계와 부조리는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연극 연출자는 ‘게이친구를 애도하면서 그녀에게 작품을 바친다.’ 는 식의 문구와 함께 두 인물의 사랑이 유효함을 각색하고 싶었다고 후기에 기록하지만, 그 따뜻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언어의 불화를 종식한다는 취지는 극중 감옥의 판타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정치적 언어의 괴리
이와 관련하여, 국내에서 상연되고 있는 <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해 우리는 현재적 시점에서 성적소수자로서 몰리나의 언어가 어떻게 현실정치의 언어에 개입하고 기입되는가를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이번 연극에서 발렌틴의 언어가 오히려 어색하게 들리는 점은 흥미롭다. 몰리나의 언어는 상당히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받아들여지지만 연극 중에 발렌틴이 던지는 ‘사회주의 혁명’ 운운하는 몇 가지 단어들은 형식적으로 첨가된 것처럼 보일만큼 극의 흐름을 겉돈다. 아무 설명 없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수시로 살피는 그의 제스처들도 감옥만이 무대화된 공간에서는 정서불안증 환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를 단적으로 오늘날 거시정치에 대해 거리를 드러내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단면이라고 말한다면 해석상의 넘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거시정치의 언어 자체가 갖는 경직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언어가 소통될 수 없도록 감옥의 공간만을 무대화하는 연출이 이미 거시정치의 언어를 배제하고 있다면, 정치적 언어의 괴리가 거시정치를 극에 도입하기를 꺼려하고 있다면, 그래서 현실의 정치적 국면에 무관심으로 일관한 이들이 기댈 곳은 사랑의 판타지라고 이야기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소비되는 동성애코드와 위계의 미적 가시화 사이의 제휴
훤칠한 두 남자배우가 무대에서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면서 스킨십과 눈물로 이어지는 로맨스 자체가 이미 흥행을 위해 준비된 동성애코드일 터, 이는 매회 거의 모든 좌석을 채우는 관객의 95% 이상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입증해줄 것이다.(이는 인터파크의 예매집계가 증명한다.) 원작을 통해 한국에 동성애 컨텐츠를 생산한다는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까칠했던 발렌틴이 몰리나를 보면서 동화되어가는 관계만을 놓고 본다면 본 연극은 대중에게 먹히는 동성애코드 혹은, 특정 상대(여자) 앞에서만 마음을 열어주는 차도남/연하남 판타지와 결합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솔까말 그것이 나쁘기만 한가? 이성애자 여성관객의 판타지를 채우기 위해 동성애코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의 비대칭적인 위계에 기대는 전략이라고, 혹은 위계에 기댄 채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전략을 반복한 것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특정관객층을 노린 동성애코드의 전략 자체의 시비를 논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그보다 현재 한국의 매체들이 동성애코드를 소비하면서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무엇이 동성애소재를 단지 동성애‘코드’로 소비하게 만드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연극은 여성관객의 판타지를 사로잡음은 물론, 고립된 판타지 공간 외부에 도사리는 위계적인 현실들을 아름다움의 부속물로 그려낸다. 이는 위계를 은폐하기보다 위계 자체를 일정 형식 아래 미화하고 즐기는 것에 가깝다. 가령 성별역할의 경우 위계는 좀 더 은밀하게 드러난다. 여기에 몰리나가 남자에 대해 논하는 부분을 인용한다.
‘남자에게 가장 근사한 점은 멋지게 생기고 힘이 센 거야. 힘이 세다고 과시하지 않지만, 자신 있게 나아가는 그런 태도지. 나의 웨이터처럼 걸음도 또박또박 걷고, 겁에 질려 말하지도 않고, 자기가 뭘 원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야. 물론 전혀 겁내지 않고 말이야.’(89)
‘남자다운 매력은 한 남자가 널 안을 때… 그가 조금은 두렵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야.’(321)
발렌틴은 몰리나가 찬양해 마지않는 이상적 남성성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며 비웃는다. 물론 그것이 마르타라는 옛 여자 친구에 대한 치부를 가리기 위한 기만으로 연출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어 발렌틴이 이상적 남성상을 읊는다.
‘그 누구에게 허풍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 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91)
평소 발렌틴은 속물적인 몰리나보다 진취적이고 의식적인 면을 보여 왔다. 성별이분법에 있어서도 그는 평등의 의식을 주장하며 전형적인 위계들이 미화된 몰리나의 속물적 판타지를 비난한다. 하지만 위 언급들에서는 차이보다 유사점이 더 눈에 띈다. 이상적인 성별역할에 대해 몰리나가 미적인 스타일로 미화시켜 동일시한다면, 발렌틴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배려와 평등을 형식적으로 삽입한 채 정치적으로 포장해내는 셈이다. 위계의 미적 판타지와 거시정치의 경직된 가치관 사이에서는 서로를 위한 생산적인 경쟁은커녕 기존의 도식만 반복하는 우려를 낳는다. 이들의 문법은 서로 다르지만 기존의 남성중심의 성별위계에 의존하는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렇다고 작품 속 몰리나의 여성적 제스처와 언어 자체를, 발렌틴의 경직된 정치적 언어에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허구적으로 재현된 예일뿐더러 얼마든지 현재의 담론들 속에서 상대화할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다양성의 모델들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존재양식이 오늘의 소비문화에 이르기까지 극중에서 이성애적으로 규범화된 성별이분법에 재위치 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경유한다면) 이성애주의적 규범의 언어를 그대로 반복한다는 점에서 원작과 영화, 최근의 연극이 보여주는 ‘하위문화’는 여전히 동성-사회적 공동체를 (부정적으로) 변주하는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8. 結
<거미여인의 키스>는 정치적 갈등과 이념적 투쟁이 활발했던 동시에 동성애자들이 하나의 정체성 집단으로 가시화되던 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작품은 감옥 안에서 고문으로 피폐해진 정치적 게릴라와 성적소수자의 만남과 유대를 이끌어낸다. 밀폐된 공간의 유대와 외부의 정치적 현실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성적소수자 하위문화의 쾌락주의적 현실과 거시정치 언어의 매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거미여인의 키스는> 높은 가치를 받아 마땅하다. 다만 작품 안에서 언어의 매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오늘의 시공간 속에서 영화와 연극으로 재생산되면서 하위문화와 정치운동의 언어가 상호간 어떻게 소통되고 있는지는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임과 동시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이기도 하다.
몰리나처럼 현실의 행복을 미적인 감수성으로 향유하기에 바깥의 삶은 위계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반면 정치적 이념과 이상만 꿈꾸며 한 방향으로만 몰두하는 것 역시 기존의 위계를 (부정적으로)반복함으로써 실천분야에 서열을 매기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질적인 두 언어가 동일한 위계에 종속되어 암묵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소비되는 것은 지금의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는 거시정치와 하위문화 간의 적극적인 상호개입과 재조합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권력의 공모가 배제하는 목소리들이 미래의 언어로 발화될 수 있는 공론의 장, 그것이 몰리나와 발렌틴의 언어가 대화하는 ‘좋은 예’가 아닐까
웅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각주1.
소설원작의 집필 시기는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사상투쟁이 활발했던 60년대와 경제 불황으로 신자유주의정책이 시작되던 80년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문학사적으로도 작품은 두 시대를 매개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60년대의 문학이 작가의 실험적 문체들이 시도되고 거시적인 정치적 이상을 드러냄으로써 문학적 자의식에 눈뜬 이른바 ‘붐소설’의 시기로 자리매김한다면, 이후 80년대에는 시장주의사회 아래 대중소비문화가 확산되고 서구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담론이 전파되는 ‘포스트붐’으로 각인되면서 비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소설들, 형식과 내용상의 혁신보다는 대중적이고 또는 통속적이랄 수도 있는 작품들을 양산하게 되는데, <거미여인의 키스>는 ‘붐소설’과 ‘포스트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중,「세계화와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거미여인의 키스』를 중심으로」, 2002. 참조)
<거미여인의 키스>는 구성상에 있어서도 정치적 갈등과 하위문화가 병존하는 작품상의 기본적인 구조는 사람들에게 소위 ‘의식 있는 대중적 소설’로 각인시킨다. 형식에 있어서는 학술적 각주와 보고서 형식, 독백 형의 자유연상 등 다양한 텍스트들이 교차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서로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고 사랑을 하지만 죽음을 맞는 전형적인 장르드라마의 성격을 갖기에 작품은 일반적으로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중간을 매개한다고 평가된다.
각주2.
<거미여인의 키스>에 삽입된 여섯 편의 영화는 자크 터너(Jaques Tournour)감독의 <캣피플 Cat People>(1942), 존 크롬웰(John Cromwell)감독의 <매혹의 오두막 The Enchanted Cottage>, 제임스 웨일(James Whale)감독의 <좀비와 함께 I Walked With a Zombie>(1943)이다. 또한 구체적 확인이 불가능한 다른 세 편의 영화는 1930년대 나치의 선전영화, 상류사회 분위기와 게릴라 이야기를 병치한 영화, 1940년대 캬바레풍 멕시코 영화이다. (이상 송병선의 「작품해설」(377) 참조)
각주3.
연극과 영화가 저마다 선택한 영화는 다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장르영화의 성격상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원작의 전체적인 구조를 해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는 다양한 장면연출이 가능하다는 성격을 백분 활용하여 영화내용을 재현하거나 감옥 외부의 신들을 첨부함으로써 양 쪽의 캐릭터가 처한 환경을 골고루 묘사하고자 시도한 특징이 발견된다면, 연극의 경우 이야기를 일관된 구조로 보여주고자 하며 관객이 마주하고 있는 배우들의 디테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점을 기대해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다각적인 접근이 생략되어 작품구성이 단순화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소설을 먼저 보도록 하자!)
내용에 있어서도 나치선전영화를 가져오는 영화의 경우 발렌틴과 몰리나가 각각 관심을 두었던 정치적 관점과 미적 관점이 충돌하는 부분이 부각된다. 반면 표범여인이 등장하는 <캣피플>을 내러티브의 매개로 선택한 연극의 경우에는 화자이면서 여주인공(표범여인)에 동일시하는 몰리나를 주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특징이 비교된다.
각주4.
그리고 예의 이중성은 하위집단 내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도 개입한다. 연극에는 나오지 않지만, 몰리나는 자신의 친구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나처럼 게이들인 친구들은 있지만, 전부 웃고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필요한 친구들이야.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서로 도망가기 바빠.…’(284) 이는 일시적이고 쾌락추구적인 하위집단의 생성조건의 단면으로 설명되는 기존 연구들의 수사를 연상시킨다.
* 웹진 '랑'의 글이 마음에 드신다면 그리고 성소수자 차별없는 세상을 원하신다면 매월 동인련
활동 소식, 회원들의 소소한 이야기들 그리고 성소수자들에게 꼭 필요한 글들을 싣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 후원은 정기/비정기로 할 수 있으며, 후원 하실 분들은
http://www.lgbtpride.or.kr/lgbtpridexe/?mid=support 를 클릭해주세요^^
* 동성애자인권연대는 정부, 기업의 후원없이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인들의 정기, 비정기 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무지개문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공간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집단적 상실의 공명: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2) | 2011.06.27 |
---|---|
<종로의 기적>, 그리고 ‘나와 당신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열다섯 번째 발걸음 (0) | 2011.05.18 |
『하늘을 듣는다』 따라 읽기 (7) | 2011.01.10 |
‘실제’를 넘어 ‘실재’하는 게이들을 만나다 - 이혁상 감독의 <종로의 기적> (2) | 2011.01.10 |
영화 <친구사이?>의 청소년 관람불가 처분 취소 판결은 당연한 결과!! (1) | 201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