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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시공간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집단적 상실의 공명: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by 행성인 2011. 6. 27.

시공간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집단적 상실의 공명: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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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화되지 못하는 것을 언어로 만드는 어려움

 

HIV/AIDS가 미국에서 발견된 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에이즈 역사 또한 20년이 훨씬 넘어간다.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진 이 질병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을 갖지만, 대개의 두려움은 사실관계에 기인하기 보다는 질병의 추상적인 의미에서 비롯된다.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사람들은 질병 당사자를 ‘위험군’이라는 이름 아래 구분하고, 대부분 게이남성, 이주노동자, 성노동자 등 주변집단으로 구성된 이들에게 질병의 두려움을 덧씌워 혐오의 의미를 점철시킨다.

 

혐오적인 의미는 당사자들의 사지를 묶는다. 이들의 목소리는 악성의 소문들, 외부의 손가락질 속에 파묻히고 익명의 희생자로, 되도록 언어에 가시화되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로 각인된다. 가시화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은 산-죽음에 다름 아니다.

 

에이즈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게 된다면 일차적으로 감염인의 삶을 구성하는 사회적 정책과 외부의 인식에 날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혐오적인 의미망 아래 어떤 활동들로부터도 후퇴할 수밖에 없는 질병의 감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언어화되지 않았던 것들을 언어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다. 아니, 우리는 언어로 발화되었던 당사자들의 자기고백들이 혐오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지배적 의미망에 여과될 수밖에 없어온 구조를 묵인할 수 없다. 질병의 편견과 감염인에 대해 편향된 시선은 방역과 감시를 고집하는 한국의 에이즈 정책과 짝패를 이룸으로써 질병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 지난한 투쟁과 실천의 과제가 될 것임을 예고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LGBT 영화제에서 선보인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는 캐치프레이즈만 봤을 때부터 좋은 선례라는 인상을 준다. 올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영화는 명목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질병이 발견된 30년을 기념하는 듯하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의 형식을 빌린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에이즈 위기를 거쳐 온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점도 언어의 결핍을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심어주기 충분하다. 영화 상영 당일 동인련의 영화번개에는 스무 명이 넘는 친구들이 미국 ‘선배’들의 기록을 보기 위해 서울아트시네마에 모였다. 영화를 보기 위해, ‘우리는 거기에 모였다.’

 

 

집단적 상실을 견뎌온 선배들의 증언: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영화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을 인터뷰하면서 각자가 회고하는 삶의 단편들을 조합한다. 이들은 80년대 초, LGBT문화가 정점에 달하는 시점 카스트로거리에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많은 게이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언제부턴가 의문의 죽음이 신문의 한 섹션을 차지한다. 섹션의 분량이 늘어나고 마을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하나 둘씩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사라지고 떠나는 사람들은 나의 친구와 애인에까지, 그리고 나 역시 그 당사자에 합류하게 될 만큼 숨을 조인다.

 

원인을 모르는 집단적 죽음에 대해 학계와 언론들은 ‘게이 암’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내용들이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미는 사실에 앞서 생산되고 그들의 삶을 구성한다. 혐오와 무관심 속에서 갑작스런 죽음은 집단적 상실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영화가 다루는 이들의 역사는 바로 집단적 상실의 시대를 버텨온 이들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위기를 견뎌내는 지난한 과정에는 죽음이 근접해 있다. 죽음은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즉각적이기까지 하다. 죽음은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구체적인 일상의 모습들로 나타난다. 병상에 누워있는 애인의 마지막을 떠나보내고, 자신 역시 병상에 따라 누우며 남은 날을 세고 있다. 여기저기 다양한 치료법들이 검증되지 않은 채 개발되고, 치료약의 오용으로 사람들이 또 죽어간다. 매일같이 보던 건강한 얼굴은 언제인가부터 휠체어를 타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동성애자와 에이즈의 의미를 하나로 묶어 에이즈에 도덕적 병/벌의 성격을 강조하고, 유명 게이정치인들과 언론인들마저 과거의 난잡한 생활에 대한 자숙을 강조한다. 일상 속에서 질병의 사실은 금언처럼 쉬쉬된다. 병원에서는 손님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의사와 환자 할 것 없이 에이즈라는 단어는 일종의 금지어가 된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상실을 함께 견딜 수 있는 동료와 애인이 있었고,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카스트로거리는 지금의 종로와 이태원, 홍대와는 다르게 그곳에서 생계를 꾸리고 지속적으로 연대를 강화해온 ‘생활형 커뮤니티’였다. 의문의 질병이 창궐할 당시부터 이들은 벽보에 자신의 증상을 알려 커뮤니티 구성원들에 주의를 요구했다. 더불어 집단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서로를 보살펴줬다. 커뮤니티에 자체적으로 요양소들이 마련되고, 많은 구성원들이 자원하여 이들을 보살폈다. 게이들의 질병으로만 낙인찍혔음에도 레즈비언들은 에이즈 이슈에 동참하여 병상의 환자들을 돌보고 에이즈운동을 조직했다. 에이즈의 충격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광범위했고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기대며 충격을 견뎠던 것이다.

 

집단적 분노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상실 뿐 아니라 투쟁의 동기화로 표출되기도 한다. 동료들은 혐오적인 의미로 점철된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수천수만 명의 스펙터클한 수치화 자료 속에서 익명화되고 묵인되었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익명의 수치로만 감염인을 계산하는 외부의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네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퀼트에 친구의 이름을 새겨 수천 평의 워싱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런가 하면 멀리 뉴욕에서는 액트업이 설립되어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언어화했다. 'Silence=Death', 이들에게 침묵은 죽음이었다. 액트업에 동참한 광고인들과 예술가들은 기존 예술을 차용하는 전략을 통해 다양한 구호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구호는 세이프 섹스 뿐 아니라 치료제 개발을 독촉하고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했다. 때로는 길바닥에 눕고 떼로 키스를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른 시위장소 같았다면 다를 바 없는 상투형의 투쟁전략이었겠지만, 에이즈가 죽음에 직결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익명의 감염인’들이 공공장소에 나와 드러눕는 것 자체가 급진적인 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는 것은 단지 전략적이고 형식적인 생산물이라고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투쟁과 구호들은 상실과 고통으로부터 생산된 분노이고, 미적 형식을 가지는 공적인 호소였다. 공격적인 언어들에는 우발적이고 즉각적인 충격에 늑장대응을 했던 공공당국에 대한 분노와 희생된 동료들에 대한 애도가, 더불어 사안의 긴급함이 뒤섞여 있다.

 

당시의 위기는 집단적 상실을 함께 겪은 이들에게 하나의 시험이었다. 자유로운 성적 실천에 대한 모토가 질병의 무거운 짐으로 파괴되고, 도시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커뮤니티 전체가 타격을 입은 와중에도 이들은 연대를 더했다. 그것은 자원봉사나 정치적 투쟁의 형식으로만 실천되지 않았다. 인터뷰이들은 당시 자신들이 위기에 어떤 대처를 했었는지, 위기의 기간 동안 상실의 경험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말하며 당시를 회고한다. 꽃을 팔았던 흑인 게이는 치료비로 막대한 돈을 탕진하고 먼저 떠난 친구를 애도할 꽃을 살 돈조차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바닥을 쳤던 이들에게 무상으로 꽃을 제공했던 기억을 꺼낸다. 에이즈 위기가 창궐한 몇 년이 지나고 떠난 이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모아놓은 부고란의 장수가 넘겨도 끝이 없었다는 기억 속에서 에이즈문제는 단순히 남의 문제일 수 없었다. 한 감염인 게이는 병상에서 애인과 함께 있으면서 번갈아가며 서로를 돌봐주다 먼저 보내야 했던 아픈 기억을 말한다. 친한 친구의 마지막 생을 기억해주기 위해 준비한 파티에서 그를 여왕처럼 응접했던 기억, ‘너와 나에게 서로 애인이 없었다면 우린 사랑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생애 제일 진한 키스를 나눴어요.’ 라는 회상.

 

영화는 상당부분 ‘생존자’들의 인터뷰에 할애된다. 생존을 위한 역동적인 역사에 비해 영화는 잔잔한 인터뷰로 일관하면서 간간히 당시의 자료들을 삽입하는 식으로 구성된다. 극적인 그림들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90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 다소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뷰이들은 한참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의 기억들을 생생히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독특한 억양과 제스처 속에 당신들이 목격하고 겪었던 상실의 기억들을 담아낸다. 말하는 중 간간이 눈이 젖고, 입을 닫는다. 아픔의 언어, 고통을 담아낸 과장의 언어, 어쩌면 우리가 ‘기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파란만장한 삶이 녹아든 언어는, 즉각적인 충격에 대한 필사적인 연대와 미적 형식들을 통해 애도와 분노를 양식화 하는 동력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어져 있다.

 

 

우리도 여기에 있어야 된다!

 

90년대 중반 치료약의 연구가 일정 성과를 거두고 칵테일요법이 개발되면서 HIV/AIDS는 만성질병화 되었다. 영화의 흐름도 그 즈음으로 마무리되면서 현재로 건너온다. 당시의 집단적 상실을 겪은 이들은 상실을 겪지 않은 이후 세대들과 새로운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영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후 세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다. 오히려 영화 속의 한 활동가는 이전의 투쟁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후 세대의 친구들에게 다소 당황한 듯 보이는 멘트를 던지기도 한다.

 

함께 영화를 봤던 몇몇 동료들의 감상을 들으면서 그들이 토로한 거리감이 당시의 ‘집단적 상실’과 현재의 거리를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금은 에이즈가 죽음과 직결되었던 그때의 모습과 상당한 시차를 갖는다. 에이즈가 만성질병화되면서 투쟁은 이전만큼 규모를 가지며 전투적이고 가시화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더불어 우리는 에이즈로 죽어가는 이들보다 건강한 HIV감염인들을 더 많이 대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즉각적인 죽음이 인식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절체절명의 순간 언어가 생존에 결부되었던 것과 분명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그들이 구축했던 것과 같은 생활형 공동체가 부재하는 차이는 심각한 지점이다. 이는 우리의 언어를 만드는 데 있어 치명적인 핸디캡일 것이다. 공동체에서 일상적 만남의 부재는 서로 간의 거리를 넓히게 되고, 이는 커뮤니티 구성원들로 하여금 에이즈 문제를 남의 문제로 쉽게 치부해버리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이즈 문제는 쉽사리 추상적으로 재구성된다. 만성화된 질병의 성격처럼 HIV/AIDS이슈 또한 만성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에이즈가 이슈를 상실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문제는 조금씩 우리의 의식에 위험을 새기거나, 전지구적인 문제로 확장되면서 복잡하게 엮인다. 가령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권과 지역적․계층적 위계구조, 멀리는 제3세계의 풍습들(할례와 일부다처제 등)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거대화되는 지점은 추상적인 수치화의 작업이 일상적 접근의 방식보다 명확하게 보이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추상적인 인식 속에서도 새로운 사건들은 극단적으로 나열된다. 한편에서 에이즈가 완치되었다는 축배를 드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값싼 카피약 생산을 위협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횡포가 존재한다. 여기에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여전히 콘돔이 배포되지 못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에이즈 이슈가 뼛속 깊이 계급화되고 자본화된 문제임이 드러나는 것은 자명한 바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 에이즈 이슈를 단순히 애도와 슬픔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90년 중반 성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하기 시작한 한국의 경우 이들의 구호가 ‘에이즈는 동성애자의 병이 아니다.’라고 반목했던 점은 예의 거리를, 이해의 부재를 보여준다. 하여 최근 활동가들이 당시의 구호가 가졌던 반목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지점은 의미 있어 보인다.

 

사회적 박탈감의 공명, 새로운 언어의 동력


적어도 영화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지침을 주지는 않지만, 실천에 밑바탕 되는 상실과 연대의 감수성을 전한다. 나아가 영화는 우리에게 사회적 핸디캡이 단지 제한적으로만 양식화되지 않을 수 있음을, 고통을 어떻게 언어로 새겼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지만, 꼭 기억해야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앞에 가시화되었던 집단적인 박탈감을 이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분명 그 박탈감은 우리의 폐부를 겨누고, 우리를 다양한 모습의 주변적 존재로 재생산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철저히 슬퍼해야 하는 의무를 져버리고 있는 건지 모른다. 또한 우리는 이 무서운 세상을 살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함을, 여기에 수반되는 실패에 좌절하지 말아야 함을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사회적 박탈감을 어떻게 양식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투쟁과 연대의 양식을,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해도 된다면) 사랑의 양식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사회적 박탈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서로를 겨누는 안타까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어떻게 서로 간의 불신을 극복할 수 있을까.


웅_ 동성애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