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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제대 기념 선물

by 행성인 2011. 4. 10.

제대 기념 선물

제대 일주일 전 쯤, 나는 별 생각없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화면을 보다가 지루하면 밑에 한줄 뉴스도 하나씩 읽곤 하면서.

헌법재판소 친일파 재산 환수 합헌  (‘와우, 잘 됐네. 그래야지’)

그 다음 한 줄 뉴스.

헌법재판소 군대내 동성애 행위 처벌 합헌

.................................................................................................................................어?..............................................................................군대 내..................................동성애 행위........................처벌..............................합헌?...................................................................................................합헌이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소리 맞지?.............................................................................그래,...............그 전 뉴스도 합헌이었잖아..............................................................................................................................................................................어?.....................................................................................................이럴 리가 없는데..............................................................................................얼마 전 미국 군대도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정책을 폐지했는데

.....................................................................................................................................................................................................................................................................................................................................................................................................................................................................................................................................................................................................................................................................................................................................................................................................................................................뭐지?

그 잠깐 본 한 줄로 몇 시간 동안 내 사고와 감정은 소화불량이었다. 답답한데 무엇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풀어낼 곳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 않기도 했다. 군대에서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정신을 조금 차린 후에, 그래, 커밍아웃을 해야 겠다 했다. 안 그래도 “나를 위한 제대 선물”로 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이 그날이구나 했다. 무엇보다 그 뉴스를 보고 애들이 던질 동성애혐오 막말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전에 내가 선수쳐야 했다. 그런데 막상 하려고 보니, 일주일이 길어 보였다. 하고나서 샤워장에서 마주칠 그들과의 불편함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 생활관에서 팬티까지 까고 로션 바르는 일은 못하겠지...... 나를 의식하게 되고 내가 그들을 의식하게 되는 게 싫었다. 그들은 조금 불편해져도 되지만(그건 너희들의 편견이니까), 내가 불편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로 미뤘다. 자기 전 어둠속에서 커밍아웃했다. 어둠은 좋다. 내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들의 얼굴에 비칠지 모르는 혐오의 표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당당하고 싶지만 불쌍해보일지 모르는 나를 감출 수 있으니까.


나 할 말 있어. 나 게이야.
이건 뭐지? 무슨 개드립이야? 나 진심인데. 근데 저게 사실이면 대반전. 나 진짜 진심이야. 이제와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나 진짜로 게이 본 적 있는데. 내가 그 게이라니까. 아니, 남자끼리 키스하는 거 직접 본 적 있는데 더러워 토할 뻔 했어. 형, 그러지마. 남자 좋아하지 말고 여자 좋아해. 침묵.


대략 이정도의 말이 오가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고 잠에 들었다. 나도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군대에서 나를 알고 지냈던 이들의 귀에 “야! OO이 게이였데.” 라는 가십이 들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욕을 할 때, 잠깐이나마 내가 생각나길 바란다.


2008년 미국에서 실시된 'ABC' 방송과 '워싱턴포스트' 신문 설문조사에서는 동성애자의 공개적인 군복무에 75%가 찬성한다고 답했단다. 우리나라는 어떨까나? 20%? 30%? 갈 길이 멀다. 법이 도와주길 바랐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이제부터다. 사람들을 편견을 없애는 거.
헌법재판소 군대내 동성애 행위 처벌 위헌 이렇게 뉴스가 떴다면 무척이나 기뻤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편견과 싸우는 건 마찬가지다. 난 기죽지 않고 즐겁게 싸울 거다. 그리고 이번 헌법재판소의 판결으로 같이 할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다.이건 분명하다. 우리는 끈질기게 싸울거고 결국 군대내 동성애 처벌 조항은 삭제될 거다. 먼 훗날이든 그리 멀지 않은 미래든. 우리는 그때 미친 듯이 웃고 떠들며 축하할 거다. 기쁨에 겨워.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군대는 제대 기념으로 내게 선물을 줬다. 지금 말고 나중에 풀어볼 수 있는 선물을.


아~기다려진다.


오리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