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정욜의 세상비틀기

장례식장의 이중풍경

by 행성인 2009. 4. 28.
 


  회사에서 짜증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무렵 어머니로부터 할머니의 부음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지난 5년 동안 치매로 고생하셨던 할머니께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셨다고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께서 일하다 다치셔서 장례식장을 찾아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친척들은 이미 도착해 분주히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고모부로부터 내가 3일 동안 해야 할 일을 전해 들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부의금을 넣는 통을 지키면서 신발정리 및 오는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가 참 길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게이, 레즈비언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결혼적령기의 나이이다 보니 친척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껄끄럽다. 정말 성스러운(?)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가 많이 있다. 거짓말로 삶을 포장하는데도 많은 한계를 느낀다. 장례가 치러지는 3일 동안 정말 결혼이라는 말을 지겹게 듣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자 할머니의 죽음보다 괴롭힘을 당해야하는 내 자신이 더 슬퍼졌다.


장례는 어떻게 보면 겉치레에 불과하다. 하지만, 병원 장례식장의 풍경은 슬픔을 추모한다는 느낌보다 죽음을 가지고 장사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 할머니를 모셨던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추모를 위해 공간을 대여한다고 하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화려하고 방 크기나 위치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 달라진다. 조문객들에게 내 놓아야 하는 음식도 병원바깥보다 몇 배 비싸다. 풀코스 서비스를 제공받는 듯 하지만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어있다. 가족들은 장례가 마치는 날 서비스 받은 만큼의 비용을 철저히 계산해 지불해야 한다. 돈 없는 사람들은 죽음마저 초라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성(聖)스럽고 철저히 계급적인 

저녁 여섯 시 무렵부터 조화(弔花)가 도착하고 조문객들이 찾기 시작했다. 동창회, 회사, 교회에서 온 조화들이 조문객들이 찾는 방 옆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특별할 것도 없이 똑같이 꾸며져 있는 ‘조화들’이었지만 그 조화에도 우선순위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여의도순복음과 같이 큰 교회에서 온 조화들은 따뜻한 방안으로 들어가고, 어디서 온지 모르는 조화들은 구석으로 조금씩 밀려난다. 다른 방 조화들과도 경쟁이 시작되었다. 앞집은 몇 개가 도착했고, 우리는 몇 개가 왔는지 실시간으로 체크한다. 보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고  한참이나 자랑을 늘어놓기도 한다. 7시 무렵 30~40명이 되는 조문객들이 찾았다. 순간 몰려온 조문객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금방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해치고 싶지 않지만 마치 장례예배에 동원된 사람들 같아 보였다. 약 20분 정도 찬송과 기도가 반복되었다. 요단강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요단강 건너가 만나는~” 찬송을 계속 불러댔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또 2,30명 정도 되는 조문객들이 찾았다. 큰고모와 고모부가 다니는 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또 2~30분간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 예배는 둘째 날에도 계속 이어졌다. 큰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신도들이 찾아왔고 어제 왔던 분들이 또 와서 예배를 드렸다. 하루가 지나자 장례가 불편하고 심지어 거북하기까지 했다. 장례에 대한 예절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흔한 향도 없고 국화와 가벼운 묵념만으로 애도를 표해야 했다. 정말 장례를 이용해 종교를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많은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사실 가족들이 많으니, 한 사람마다 20명 정도의 조문객만 와도 족히 몇 백 명은 될 터였다. 문지기를 해서 인지 몰라도 오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방명록에 적는 이름, 지위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문을 지키는 일이 사실 지루하다보니 내가 찾은 쏠쏠한 재미 중 하나였다. 우리 아버지는 사실 평생 용접하시는 노동자로 사셨고 사회생활을 하시며 알게 된 분들도 대부분 정장보다 작업복이 어울리는 분들이시다. 장례식장을 찾는 조문객들의 옷차림만 봐도 가족 중에 누구를 찾는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돈과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친척들의 조문객들은 잘 빠진 정장에 비싼 구두를 신고 찾아오지만 아버지를 찾는 조문객들은 대부분 운동화를 신고 일하다 막 마치고 오신 분들이 많았다. 피곤에 지쳐있는 얼굴에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내뱉는 그들 모습이 괜히 정감 있게 느껴졌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조문객을 맞이하는 나의 업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이제는 부의함에 담긴 돈을 세어야 한단다. 큰아버지, 고모, 고모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늘 하루의 성과(?)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녀야 죽음도 쓸쓸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신도들이 낸 돈이 상당했다. ‘이건 큰 아버지꺼’, ‘이건 큰 고모부꺼’. ‘이건 아버지꺼’. 이름과 금액을 되뇌이며 노트에 명단을 적어갔다. 아버지 친구들이 낸 부의금이 왜 그리 작아보이던지 부의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부의금을 단 한 번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낸 적이 없다보니 내가 낸 부의금이 이후 어떻게 처리되는지 잘 몰랐었다. 단순히 장례를 잘 치르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만 바랐던 것 같다. 물론 부의금은 대부분의 장례비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부의금은 그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고 있었다. 조문객수와 부의금액은 내가 사회생활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가 되기도 하고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넓은지 확인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3일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씁쓸한 경험을 했다. 사는 것에 대한 무의미한 물음도 던져보고, 조문객을 보며 내가 나중에 죽게 되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슬퍼해줄까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봤다. 장지였던 전라남도 보성을 내려갔다 올라오면서 “이제는 나를 괴롭히는 친척들을 만날 이유가 적어졌다”는 생각에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치매로 거동조차 못했던 할머니를 5년 동안 보살펴온 어머니도 마음은 무겁겠지만 좀 더 자유롭게 자기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버지는 장례식장을 찾지 못했으니, 남은 인생 조금은 불편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안 끝날 것 같던 장례가 끝이 났다. 요단강 건너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께서 한 평생 힘들게 사셨던 삶을 뒤로하고 이제는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정욜 _ 동성애자인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