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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여성 성소수자

남학생으로 입학, 여학생으로 졸업?

by 행성인 2015. 10. 13.

공대 나온 트랜스여성 한희

 

테마송♪ - 쎈언니 (제시)

 

 

10월 10일 대한문에서 개최된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는 6명의 연사들이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외쳤습니다. 행성인 웹진에서는 이들의 발언을 게재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세대, 다양한 성적지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 연결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봅시다. (무대에서 발언 당시 각각의 연사마다 테마송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테마송을 들으며 발언문을 보면, 연사들의 발언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위 테마송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노래의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스케치 바로가기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박한희입니다. 그리고 MTF 트랜스젠더이고요.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2남 중 둘째로 태어났고, 남자애로 자라왔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 그러니까 여자 모습으로 돌아다닌 건 2년이 채 안 됐어요. 현재 저는 대학원생인데, 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남학생으로 입학했고요. 딱 1년 전 이맘때 학교 친구들 앞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지금은 여학생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트랜지션, 커밍아웃과 관련된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건 20대 초반 무렵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 때에는 조용히 학교를 다녔어요. 사실 그 때도 몰래 여자옷을 입어본다거나 했지만, 당시엔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달라지겠지, 하면서 그냥저냥 지나갔어요. 

 

그러던 것이 대학생이 된 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 내가 뭔가 남들과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사실 이게 그냥 여자 옷을 입고 싶은 욕구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여성으로 생각하는 건지 잘 모르긴 했지만요. 근데 참...제가 전공이 기계공학과에 학교가 기숙사제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자만 득실득실한 데서 생활하는 게 만만치는 않더라고요. 2학년 때인가는 우울증에 걸려서 반 년간 약도 먹고, 그래도 어찌어찌 졸업은 했네요.


저는 어릴 때부터 꿈이 로봇 공학자였어요. 그래서 과를 선택해서 들어갔고 처음에는 박사까지 할 생각이었는데...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학교생활에 흥미가 뚝 떨어져서, 그냥 돈이나 벌어야겠다 마음먹고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전공이 그렇다 보니 취직한 곳이 또 건설회사 기계설계팀, 그렇게 마초마초한 곳에서 거진 20대의 전부를 보냈네요. 이게 안 좋은 게 그렇게 남자들만 있는 곳에 있다 보니 여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여성성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여자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지, 대체 여자가 뭔지, 그런 것조차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한 적이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조그만 티조차 내지 않았죠. 사실 다른 MTF들 중에는 여자같다는 이유로 학창시절에 괴롭힘을 당한다던데 제 경우는 아예 철저하게 '일코'(편집자 주: 일반(시스젠더) 코스프레의 약자)를 한 거죠. 당시에는 정말 누구 한 명이라도 저에 대해서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날 거라는 두려움이 너무나 컸거든요. 오히려 더 감추기 위해서 왁스 발라서 머리를 세우고 출근한 적도 있어요. 다들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는데 그게 또 스트레스더라고요. 제가 여자니까 머리를 짧게 하면 안 되고, 뭐 그런 거라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아니에요. 그냥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을 수 없고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모습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게 힘든 일이었던 것이죠.


그러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결국 퇴사를 하고 지금의 학교에 들어온 것이 재작년이에요. 학교에 가면서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사실 좀 웃긴데, 학교를 들어간 이유 자체가 머리 기르고 싶어서였어요. 왜냐하면  그 때 저는 이미 트랜지션하는 걸 포기한 상태였거든요. 가끔 주말에 여자 옷 입으면서 스트레스나 풀고 살아야지....하는 결심이랄까,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딱 한가지 미련이 남더라고요. 내가 머리 기른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거. 기왕 다 포기할 거면 죽기 전에 그거라도 한번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서...그래서 다시 학교로 왔어요. 아마 제 동기들이 알면 욕할지도 모르겠네요.


학교에서는 예전보다는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서 다녔어요. 어차피 졸업하면 다시 정장입고 일할 거니 지금 3년 정도만 조금 즐겨보자, 이런 생각? 나중에 들어보니 애들한테 게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하네요. 약간 머리 긴, 중성적 옷차림의 남학생으로 말이죠. 이전보다는 편하게 1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 역시 저를 숨기고 사는 거잖아요. 제가 철들면서 본능적으로 익힌 게 사람들과 선 긋는 거였거든요. 학교에서도 그렇게 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다시 혼자 다니게 되더군요.


그렇게 1년을 지내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리고 내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본격적으로  확 터뜨려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적어도 발버둥은 쳐봐야 하지 않겠냐. 이런 결심을 한 거죠. 그 때가 작년 초에요.


사실 그 때도 한 번에 확 바뀌면 좀 그러니 2학년부터는 제 모습을 조금씩 바꿔나가고 주변에도 조금씩 커밍아웃을 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3월 1일 첫 수업에 들어간 순간, 앞으로 사람들에게 남자로서의 나를 연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구역질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그날 바로 휴학을 했어요.


그 후 진로나 그 밖에 관련해 한가람 변호사님에게 상담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SOGI법정책연구회에 들어가 이런저런 활동들을 쭉 해왔습니다. 퀴어퍼레이드도 처음 가봤고요. 어찌 보면 쭉 학교에 있으면서 커밍아웃을 한 것보다는 다른 LGBTI 당사자, 활동가들과 접했던 것이 더 나았단 생각이 드네요. 덕분에 저 스스로를 좀 더 생각해볼 시간도 있었고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거든요.


휴학 기간 동안 친한 언니 한명, 그리고 학교 친구 둘한테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어요. 제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한 최초의 커밍아웃이었죠. 정말 다행이랄까, 세 명 모두 너무 잘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더라고요. 만일 그 때 반응이 부정적이었다면 더 나아가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죠.


한 학기를 쉬고 작년 9월 복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커밍아웃을 결심했어요. 제가 1학년 때 가입한 학회가 있었는데 아주 열심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간간이 나가서 학회원들이랑은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였거든요. 그래서 그 곳에서는 이야기를 하자, 그래서 9월 1일 학회 개강총회에 나가서 이야기했어요. 사실 그 때는 ‘제가 트랜스젠더에요.’ 한 마디 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렇게 전 복학과 동시에 여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좁은 곳이다보니 드러내놓고 혐오발언을 듣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뒷담화의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호의적이었어요. 특히 저보다 어린 친했던 애들 같은 경우 바로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데, 오히려 제가 더 어색하더라고요. 뭐, 그래도 가끔씩 실수는 해요. 지난주에도 아는 여자애랑 밥먹는데 무의식중에 저한테 계속 오빠라고 부르더라고요. 이젠 그러려니 하죠. 학교생활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큰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어요.


오히려 제가 먼저 꺼리는 부분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여자 화장실을 못가겠더라고요. 혹시나 화장실에서 아는 애들을 마주칠 때 불쾌해하지 않을까 해서...한동안은 다른 건물 화장실을 가거나,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했는데, 지금은 그냥 여자 화장실에서 만나면 인사하면서 잘 지내고 있네요.


하지만 남성/여성을 숫자 하나, 겉모습 하나만으로 나누고 규정짓는 이 사회에서 저는 너무나도 손쉽게 여성임을 부정당하는 상황에 마주합니다. 가령 작년에 지방선거가 있었죠. 투표장 갔더니 선거인 명부 한복판에 '남자'라고 크게 적혀있더라고요. 순간 그냥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내년에도 같은 일을 겪겠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작년 서울시청 농성을 할 때 어떤 할아버지분이 저한테 와서 공교롭게도 트랜스젠더가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설명을 해드렸더니 갑자기 ‘아가씨는 근데 목소리가 남자같네’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네 제가 그 트랜스젠더거든요’라고 대답을 했어요.

 

 

아마 이처럼 법적 성별 때문에, 또는 제 신체적 특징 때문에 여성임을 의심받거나, 심지어 부정당하는 일은 계속 있을 거에요. 그런데 여성가족부는 한술 더 떠 트랜스젠더 여성은 아예 여성이 아니라고, 트랜스젠더는 성평등의 대상이 아니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지금 말하는 대로 시스젠더/이성애 여성만이 여성이라면, 네. 저는 여성이 아닙니다. 아니, 만일 그것만이 유일한 여성의 기준이라면 저는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왔고,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갈 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 삶이 성평등 조례를 개정하라는 공문 한 장으로, 면담을 취소한다는 통보 하나로 삭제되고 무시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가부는 무슨 권리로 이 많은 트랜스 여성의, 여성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지는 그 날을 바라며 마지막으로 여가부에게 묻겠습니다.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