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롱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데이비드 에버쇼프, <대니쉬 걸>
실존했던 인물의 삶은 결코 완벽하게 재현될 수 없다. 그렇기에 창작자는 서사를 통해 원하는 대로 인물의 삶을 구부리거나 비틀 수 있다. 그들은 죽었고, 두 번 살지 않으며,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령처럼 미끄러지며 창작자가 서투르게 재현한 자신들의 삶 속을 흘러 다닌다. 그들이 직접 말하지 않기에, 그들의 생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창작자의 작품이 대중과 인물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창작자는 실화를 다룰 때 더욱 주의해야만 한다.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 대중을 만난다. 매체의 형식과 창작자의 시선이 서사의 차이를 만든다. <대니쉬 걸>은 릴리 엘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과 영화이다. 한 사람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두 작품의 차이는 크다. 소설이 그 형식 상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릴리와 그레타의 전후 삶을 다루고 심리를 조명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영화는 소수자 감성이 거슬릴 만큼 부족했으며 릴리와 그레타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짚어내는 데도 미숙했다.
영화가 릴리와 그레타를 그린 방식은 그들을 원작의 인물들보다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들로 만들었다. 릴리는 혼란스럽고 이기적인 인물로, 그레타는 체념하고 릴리에게 끌려가는 동시에 에이나르와 릴리에게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유독 아쉬웠던 것은 그레타의 인물됨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레타는 에이나르를 사랑하는 만큼 릴리를 사랑한다. 그녀는 다소 집착적으로 보일 만큼 에이나르와 릴리를 사랑하며 릴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녀가 릴리를 그리고 예술적 명성을 얻은 것은 그녀가 릴리를 사랑하는 데 대한 합당한 결과였을 것이다. 릴리의 수술을 위해 의사를 찾은 사람도 그레타이다. 원작의 그녀는 “내 남편이 보고싶어. 내 남편을 데려와.”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에이나르가 사라진다는 것, 릴리가 마지막 수술의 위험으로 뛰어든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슬프게 한다. 영화는 그녀를 다소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지만 원작의 그레타는 매력적이고 강한 인물이었다.
또한 영화는 불필요한 장면들을 삽입하기도 했다. 릴리가 맞닥뜨린 사회적 억압들이 그것이다. 에이나르가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릴리에 대해 털어놓자 의사들이 그녀를 감금하려 한다거나, 도서관에 다녀오던 릴리가 혐오범죄를 당하는 등의 장면들 말이다. 사실 이런 장치들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원작의 분위기를 훼손하기까지 한다. 원작은 릴리가 아픈 몸과의 괴리감, 릴리와 에이나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력자들을 제공한다. 그녀는 도서관 직원에서부터 그레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반면, 외적 요소가 몰아치는 영화에서 관객이 릴리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것이 릴리를 덜 매력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영화의 서사는 기존의 비극적인 성소수자 서사를 강화하는 촌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영화는 사회적 여성성을 강조한다. 화장을 하고 ‘여성스러운’ 몸짓과 손짓을 하는 것, 그게 릴리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일까? 릴리를 깨운 것은 여성의 옷이었지만 그녀를 사회적 여성으로 만들기 위한 ‘여성 수업’들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원작의 릴리가 ‘여성스러움’에 대한 학습의지를 보인 장면은 많지 않은데 영화에서 재현된 성매매 업소의 여인이 춤추는 모습을 보는 장면만이 그에 가깝다. 원작의 릴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성매매 업소의 여인들이 춤추는 모습을 관찰하지만 소설은 릴리가 그들의 몸짓을 따라하거나 배우는 장면 없이 그녀가 자신의 헤테로 섹슈얼 정체성을 깨닫는 장면에 더 무게를 둔다. 영화의 초중반부에 걸쳐 ‘여성스러움’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릴리의 모습은 말 그대로 신체적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릴리 엘베는 인터섹스이거나 클라인펠터 증후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원작의 릴리 역시 그렇게 묘사된다. 릴리는 작고, 왜소하며, 아름다운 소녀이다. 수술 과정에서 의사는 그녀의 몸에서 난소를 찾아내기도 한다.
필자는 원작을 읽기 전 에디 레드메인이 릴리 엘베를 연기한 것 자체에는 큰 불만이 없었다. 그녀의 서사 자체가 mtf 트랜스젠더의 패싱 과정을 다루므로 그를 캐스팅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원작이 묘사하는 릴리는 영화의 ‘여장한 남성처럼 보이는’ 릴리가 아니라 남성의 옷을 입었을 때 어색한 에이나르, 여성의 옷을 입었을 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릴리이다. 원작 전체를 걸쳐 아름다운 소녀로 묘사되는 릴리를 왜 그가 연기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원작과 영화의 결말 또한 다르다. 원작의 그레타는 한스 악스길 남작과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한다. 릴리는 자궁 이식 수술을 받은 후 천천히 회복하며 뉴욕에서 결혼할 날을 기다린다. 반면에 영화의 릴리는 2차 수술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며 그레타는 남은 평생 릴리를 그리다 죽는다.
원작의 그레타는 강인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릴리를 몹시 사랑하고 릴리를 위해 무슨 노력이든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릴리가 죽은 후에도 그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생을 보낸다는 영화의 설정은 산 사람을 죽은 사람의 그림자에 묶어둠으로써 남은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소설은 릴리의 죽음을 다루지 않고 영화는 그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실제로 릴리 엘베는 자궁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서사를, 특히 소수자의 서사를 다룰 때 굳이 그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관객의 눈앞에 들이대며 소수자의 비극적 서사라는 클리셰를 들출 필요가 있을까. 원작을 읽은 사람들도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들의 실화를 알 수 있다. 릴 리가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그레타가 가난한 말년을 보내다 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창작자가 전달하는 것은 실제 그대로의 서사가 될 수 없고 그들이 각색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비극적 소수자의 서사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을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완전한 몸>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대사들이었다. 릴리는 수술 후 자신이 드디어 완전해졌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사회적 억압과 소수자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클리셰도 모자라 완전한 몸에 대한 강박을 드러내는 대사까지 넣다니 참을 수가 없다. 이것은 패싱 중인 트랜스젠더나 비수술 트랜스젠더, 젠더퀴어에 대한 모욕이다. 원작의 남근과 자궁에 대한 집착적인 표현 역시 필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이었으나 영화의 결말 부분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 대사가 릴리가 여성의 몸을 가지고 죽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한 몸>이라는 대사는 몹시 폭력적인 표현이었다.
영화의 에이나르는 말했다. 늪은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이 역시 영화에만 등장하는 대사이다.
릴리의 고향은 늪지대였다. 연도 삼키고, 개도 삼키고, 에이나르도 삼킨 늪. 하지만 릴리가 에이나르 안에 있었던 늪인가? 릴리와 에이나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이고 에이나르가 죽었다면 그를 삼킨 늪은 어디에서 왔는가?
늪은 에이나르나 릴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늪은 릴리의 생을 전달하는 창작자의 몫이다. 그들은 릴리 엘베와 그레타 와우드를 늪에 빠뜨릴 수도 있고 늪지를 떠나 영영 다른 생을 살도록 할 수도 있다. 릴리는 늪을 떠나 엘베 강가에 머무르며 회복할 수도 있고 그레타는 미국으로 영영 떠나서 다시 결혼할 수도 있다. 서사 안에 굳이 늪을 집어넣어서 그들을 늪에 빠뜨리지 않아도 그들의 삶은 충분히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늪은 창작자 안에 만드는 것이지 인물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늪을 만들고 인물들을 늪에 빠뜨리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서사를 위해 그들을 구할지 늪에 빠뜨릴지는 그들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들의 늪이 그저 그런 빤한 서사라면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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