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롱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종교를 향한 성소수자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종교는 혐오세력이 소수자들을 향해 휘두르는 무기가 되는 동시에 소수의 종교인들과 함께 소수자의 곁을 지키는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소설이 종교와 퀴어를 다룬 소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필자는 당연히 기독교와 퀴어의 뻔하다면 뻔할 수도 있는 관계를 떠올렸다. 그러나 윤이형의 [루카]는 기독교적인 종교보다도 <삶이라는 종교>를 다루었다. 소설에 사용된 기독교적 코드는 ‘다정하지만 슬픈 삶’이라는 종교와 ‘모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깊이있게 보여주는 도구이다.


딸기도, 루카의 아버지도 루카를 알 수는 없다. 딸기는 루카가 왜 루카인지 모르고 루카는 딸기가 왜 딸기인지 모른다. 한 사람 안의 온갖 다양성들을 낱낱이 캐내지 않고서도 연인들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너 혹시, 건강이 어디 안 좋은 거니? 그래서 수술을 안 받은 거야?'> 라는 대사가 나오는, 그들의 이야기와 똑 닮은 루카의 시나리오는 영화가 되지 못했다. 비슷한 몸을 가진 아담과 루카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서로의 다름을 깨달아야만 하는 딸기의 영화 역시 영화가 되지 못했다.

 

루카의 시나리오 안의 두 학생은 서로의 닮음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딸기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아담과 루카도 마찬가지이다. 딸기는 루카가 가진 퀴어 커뮤니티 내의 그 누구와도 다른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루카의 신앙을 향한 그리움과 너덜너덜한 가족을 향한 향수 같은 것들을. 그는 루카가 가족과 신앙을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루카는 그들의 관계에서 시든 부분을 살려보려 했을 뿐이다.

 

모든 관계는 함께 식물을 기르는 것과 닮아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적당한 관심과 좋은 채광과 온도와 습도가 필요하다. 식물은 적당한 무관심과 과하지 않은 관리 아래에서만 몸을 불릴 수 있다. 연인은 생활에 지치고 균형을 잃은 경제력이 생활을 기둥부터 뒤흔든다. 그리고 그들의 삐걱거림 사이에는 딸기가 말라죽게 만든 루카의 부분들이 있다. 그들의 관계에서도 어떤 부분들은 죽어버린다. 그들은 각자 관계의 무너진 부분을, 시들어 죽은 부분을 살리려 노력했지만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지친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낯설어지고, 외면하려 했던 것들이 살아날 때 어떤 것들은 그저, 어쩔 수 없어진다.    


루카와 딸기가 헤어진 뒤 루카의 아버지가 딸기를 찾아온다. 그는 목사다. 그는 딸기에게 두려운 것에 대해 말했다. 그의 말은 고해성사를 닮았으나 딸기는 그의 고해를 받아줄 마음이 없다.

 

연인은 죽은 것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랐으나 부활은 사실 두려운 것이다. 죽은 것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부활을 바라는 자들이 가장 선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죽음이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카의 아버지는 종교적 믿음과 아들의 정체성에 대한 괴로움 때문에 루카가 죽었다고 믿어버린다. 살아있는 루카와 마주쳤을 때 그는 기절해버렸다. 그에게 부활은 바랄 만한 것이 아닌, 그저 두려운 것이었다.

 

루카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 그는 신에게 루카를 구원해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으나 루카가 살아있음을 깨닫고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말았다. 목사 아버지는 딸기에게 루카와 그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딸기는 화를 낸다. 소수자성을 혐오하여 루카를 죽이고 살려낸 뒤 영원히 잃어버린 루카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루카의 어떤 부분들은 시들어 말라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다정하지만 헤어지는 연인이 있을 수 있으며 헤어진 연인만이 다정할 수도 있다. 살아있는 자식을 마음 속에서 죽여 내친 뒤 살아난 자식을 마주해야 하는 수도 있다. 소설 내에서 그 신앙, 종교를 향한 신앙 자체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루카는 편안한 목욕물 같은 신앙과 너덜거리는 가족을 버리지 못했을 뿐, 믿음을 잃은 그의 아버지는 생계로서의 직업적 신앙을 버리지 못했을 뿐이다. 딸기는 <삶이라는 이름의 완고한 종교>만을 믿는다. 삶을 향한 신앙이란 받아들이거나 버려야 했던 것들을 아리게 바라볼 수 밖에 없으나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며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은 다정하고 죽은 자식은 돌아올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절대로 회복되지 않고, 나아지지 않는다. 삶을 믿고 산다는 것은 그저 그렇거나 그저 그럴 수 없다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