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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이윤에 갇힌 약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한다

by 행성인 2009. 7. 6.
 

- 푸제온에 대한 강제실시 여부와 제약사 로슈에 맞선 싸움 정리 -




 증류수 병의 뚜껑을 따 주사기로 1mg의 증류수를 빼난다. 앰플 모양에 하얀 분말이 담긴 작은병의 뚜껑을 따고 타원이 그려진 가운데 입구에 증류수가 담긴 주사기를 찔러 주사대를 누른다. 증류수가 들어간 하얀 분말이 녹을 때까지 1시간여를 기다린다. 하얀 분말이 증류수에 완전히 녹아 투명한 액체가 된 걸 확인하고 1(㎖)의 주사기로 투명한 액체를 빼낸다. 주사기를 내려놓고 배를 만져 말랑말랑한 분위를 찾은 후 알콜 솜으로 닦는다. 왼손으로 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투명한 액체가 들어간 주사기를 15° 각도로 살에 찔러 넣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긴장하면서 조심조심 주사대를 누른다. 액체가 들어가면서 살이 부어오르고 어느 때는 찌릿한 통증이, 어느 때는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액체가 다 들어가면 주사기를 빼고 부어오른 부위가 가라앉을 때까지 알콜 솜으로 한참을 문지른다.


 나는 이 주사를 1년 8개월 동안 1100번 맞았다. 이 주사약은 다국적 제약사 로슈가 2002년에 시판하면서 현재까지 독점판매하고 있는 ‘푸제온(Fuzeon)’이란 약이다. 국내에서는 2004년에 시판 허가를 받고 25,000원의 약가가 책정되어 보험등재가 되었지만 로슈는 30,500원을 요구하며 현재까지 공급을 거부하고 있다. 푸제온은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가 써야하는 2차 치료제중 첫 번째로 개발된 약이다. 로슈는 푸제온을 처음 시판하면서 내성이 생긴 에이즈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꿈의 약이라고 홍보했다. 그러나 1년에 2천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희망을, 꿈을 살 수 있는 약이어서 부자들이 가장 많은 미국에서도 꿈의 약을 살 수 있는 환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2003년부터 내성이 생긴 나 역시 꿈의 약을 기다리며 3년여를 버티다 면역력이 다 파괴되어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내 온 몸을 잠식했다. 하루 열 두 번의 설사를 하고 다리에 마비증상이 오고 한쪽 눈을 실명하면서 의사한테 가망이 없다는 사형선고까지 듣게 되었다. 로슈가 푸제온을 내성이 생긴 에이즈 환자에게 희망을 주는 꿈의 약이라고 했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진실은 절망을 주는 독약이었다.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 친구들이 죽어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수소문을 했고 한 에이즈 구호단체의 도움으로 절망의 약을 희망의 약으로 사용하게 되어 나는 다시 살아났다. 독약을 파는 살인 기업 로슈와 대책 없는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하기 위해 나누리+, 감염인단체, 보건의료단체,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공동행동을 조직했다. 작년 봄부터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복지가족부를 찾아다니며 대책 없는 정부에 항의 기자회견을 하고 관계자들을 만나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설득하고 악을 썼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비싼 약값을 요구하며 약을 공급하지 않는 다국적 제약사의 횡포 앞에 무기력하고 대책 없는 정부관계자들을 보면서 우리 정부는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너무나 허탈했고, 너무나 한심스러웠고 절망적이었다.


 정부를 상대로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었기에 우리는 한국 로슈를 쳐들어가기로 했다. 푸제온 공급거부 문제를 따지기 위해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기에 불시에 쳐들어갔다. 지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외출했다는 핑계를 댔다. 우리는 지사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점거농성을 했다. 결국 비서가 와서 지사장과 면담 날자와 장소를 잡아줬다. 삼성동의 어느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우리는 스위스계 외국인 지사장과 간부들을 만났다. 그들은 있는 점잔 없는 점잔을 다 빼고 앉아서 자신들도 푸제온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으니 우리보고 정부에게 해결을 요구하라고 했다. 푸제온이 비싼 이유는 연구개발비가 많이 들어서라고 했다. 지사장은 서류를 한 장씩 내밀면서 한국의 건강보험이 흑자여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약값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세계은행 기준에서 한국은 잘사는 나라에 속하니 선진국 수준의 약값을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 2008년 7월 3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나누리+) 등 보건의료.인권단체들과 로슈 지사장과의 비공개 간담회 [출처: 참세상]

 우리는 조목조목 반박을 했다. 결국 비싼 약값을 들어줘야 공급하겠다는 것이니 약이 비싼 이유를 말로만 주장하지 말고 근거자료를 내라고 했다. 연구개발비와 원료개발비, 제조비용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밝히라고 했다. 로슈는 정부에게도 그런 근거자료는 내지 않고 푸제온이 내성생긴 환자에게 효과가 좋다는 자신들의 돈을 받아먹는 의사들의 논문만 내밀며 비싼 약값을 요구했었다. 국민소득이 4만 달러인 나라와 2만 달러도 안 되는 나라의 약값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고 따졌다. 로슈는 연구개발비는 영업기밀이라 밝힐 수 없고 한국은 선진국 수준의 경제수준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들어보라고 요구하면서 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지사장은 다른 약속이 있다며 휑하니 나가버렸다. 끝까지 점잔을 빼며 ‘땡큐’ 인사까지 하고 나가는 지사장의 뒤통수를 보며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머릿속이 멍 한 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환자들의 절박한 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 돈 밖에 모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초국적 제약 자본의 잔인함이 저런 거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로슈가 우리의 뒤통수를 친 충격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우리는 다시 기운을 차려 외국의 에이즈 운동단체, 보건의료단체들에게 로슈 만행을 규탄하는 국제성명서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액트업(Act Up!) 파리에서 자신들이 로슈를 타격하는 시위나 행동을 해주면 어떻겠냐고 무어왔고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액트업 파리의 제안을 다른 외국단체들에게도 제안해 로슈창립기념일에 맞춰 ‘푸제온 공급거부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을 기획하였다. 파리, 방콕, 뉴욕, 필라델피아 등, 각 국에 있는 로슈 회사 앞에서 로슈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항의의 성명서를 뿌렸다. 우리는 한국 로슈 앞에서 열두시간의 집회를 했다. 아침 7시부터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살인기업 로슈를 고발하며 유인물을 나눠주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로슈 때문에 죽어나가는 환자들을 연출했다. 돈밖에 모르는 로슈를 풍자한 연극을 하고 퀼트로 만든 로슈 규탄 현수막을 들고 횡단보도에서 선전전을 했다. 문화제를 끝으로 하루 열두시간의 집회를 끝냈다.



▲ 2008년 10월 9일 뉴욕에 있는 로슈의 광고대행사앞에서 미국의 에이즈활동가와 보건의료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출처: 푸제온.스프라이셀 공동행동]





▲ 2008년 10월 7일, 로슈규탄국제공동행동




 문화제 말미에 상영한 로슈 규탄 영상에 외국 각지에서 함께해준 활동가들의 시위 사진을 보면서 고마움이 밀려와 뜨거운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날 함께 싸워준 우리의 모든 활동가들 또한 너무 고마워 활동가들을 한명씩 끌어안고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쌓였던 아픔, 분노, 절망의 감정들이 눈물 속에 씻겨 내려갔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특허청에 푸제온 강제실시를 청구하는 일이었다. 비싼 약값을 요구하며 공급을 거부하는 로슈의 살인 행위가 가능했던 건 바로 특허 때문이었다. 이제 에이즈는 약만 잘 먹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되었음에도 제3세계의 에이즈 환자들은 약이라고는 구경도 못하고 죽어가는 이유도 바로 초국적 제약사들의 특허로 인한 독점, 독점으로 인한 엄청난 폭리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에이즈로 죽는 것이 아니라 치료제에 접근할 수 없어 죽는 것이고, 치료제의 접근을 가로막는 특허는 특허가 아닌 살인면허였다. 우리는 살인면허인 특허를 파기하는 합법적 제도인 강제 실시를 청구하였다. 그러나 특허청은 우리의 의견을 무시했고 살려달라고 우는 환자들의 뺨을 때리고 내팽겨쳤다. 푸제온 강제실시 기각 결정문을 읽는 내 기분이 그랬다. 특허청은 약가협상결렬 때문에 공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제실시는 필요하지 않다 했고, 대체재가 있다고, 무상공급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강제실시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약가협상의 결렬의 원인인 로슈가 근거자료도 없이 입만 나불대며 비싼 약값을 부르고, 공급을 거부한 원인에 대해서 특허청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체재인 프레지스타도 제약사인 얀센이 약가 협상에 합의해 놓고도 약가가 마음에 안 든다며 공급하지 않고 있고 이센트레스, 인텔렌스는 현재 약가 협상중에 있지만 푸제온처럼 비싼 약값을 받아주지 않으면 공급을 거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무상공급 역시 로슈가 한시적으로만 무상공급 하겠다고 명백히 밝혔다. 이렇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특허청은 살인기업 로슈의 손을 들어주기 위해 짜 맞추기식 결론을 내렸다. 푸제온 강제실시 기각 내용은 환자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조각이었다.


 특허청 앞에서 강제실시 기각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서 나는 발언을 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발언이 끝나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공동행동팀과 회의를 하면서 또 울었다. 푸제온 싸움이 나로 인해 시작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힘들게 싸워온 보람도 없이 끝난 것 같아 공동행동팀에게 미안해 너무 속이 상했다. 회의가 끝나고 뒷 풀이를 하면서 평소엔 맥주 500cc를 마시고 응급실에 갔던 나였는데 그 날은 술이 맛있었다.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그 동안의 소회를 밝히고 서로 안아주며 등 두드려주고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내일을 다짐했다.


 우리는 푸제온 싸움을 통해 살인제약사들의 만행을 언론과 대중에 알려냈고 제2, 제3의 싸움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하였다. 우리는 푸제온 싸움에서 결코 진 것이 아니었다. 1987년 미국에서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 ‘지도부딘’이 시판되었을 때 HIV감염인들과 그들의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 지지자들이 이윤보다 생명을 외치며 싸움을 시작했듯이 우리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외칠 것이다. 이윤보다 생명이라고 하늘아래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이 땅의 성소수자들 역시 나의 HIV 감염인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감염인들의 지지를 위해 소리 지르며 이윤에 갇힌 약이 해방되는 그날을 위해 함께 싸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글쓴이 _ 윤가브리엘 _ 동성애자인권연대

글옮기기 _ 솔리드 _ 동성애자인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