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제 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기획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성소수자 인권포럼 대토론회 중

1.


한 때, 한국이 너무 싫었던 때가 있었다. 한국이라는 곳에서 내가 살 여력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헬조선 탈출이 수많은 사람들의 꿈인 걸 보면 나름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나는 혼자였다.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다음 카페에서 만나는 다른 청소년 게이들은 죄다 섹스에 환장한 사람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엔 섹스라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돈이 얼마가 들던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능해 보이는 선택은 대학을 외국으로 가는 것이었고, 나는 성소수자로서 행복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일념하에 미국을 선택했다. 그 때 나에게 미국은 퀴어들의 천국처럼 보였다.

 

‘그 당시에 한국은 정말 가능성이란 것이 없는 공간이었을까?’ 하고 다시 한번 되물어본다 라틴이라는 청소년 성소수자 단체를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라틴을 알게 된건 이미 유학준비가 한참 진행중일 때 였다. 그때는 대학 내 성소수자 활동도 지금처럼 가시적이지도 않았고 활발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면, 대학생이 되면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외로웠고, 혼자였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성소수자 인권포럼은 올해로 9회차를 맞았다. 인권포럼 첫 회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그 해인 2008년 11월에 열렸다. 인권포럼의 역사가 나의 한국에 대한 부정의 역사와 함께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크다. 만약에 한국에 남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네트워크가 확장된다는 것을 알고, 불가능 할 것 같은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는 걸 내가 외면하지 않았다면 나의 가치관과 사고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2.

 

1월부터 두달 간 매주 화요일마다 <성소수자 인권포럼> 준비 모임을 갖고 업무를 나누어서 기획을 진행해 나갔다. 앞서서 오랫동안 인권포럼을 진행해오신 분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기획단에 참여하게 되신 여러 단체의 활동가 분들과 함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나에게 새로운 배움이었다. 회의를 통해서 업무를 분담하고 의사소통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고 유익하기도 했다. 익숙하지만 잘 알지 못했던 다른 성소수자 단체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기뻤다.

 

기획단에서 회의를 하면서 성소수자 인권포럼의 안건들을 지정하고 기획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결국 이 과정은 나에게 현재 한국 성소수자 환경에서 중요한 의제들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성소수자 인권운동이었다.  그러나 회의를 하고 의제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갈 수록 성소수자, 젠더, 섹슈얼리티/성애, 젠더표현 등의 이슈들은 그 갈래가 너무나 많다는 것, 그리고 언제든지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이 많음은 단순히 양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노동이, 혹은 투쟁이 많이 남아있다를 뛰어 넘어서 내가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이해했던 ‘섹슈얼리티/젠더에 대한 논의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야기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더 곱씹게 했다. 성소수자 유튜버들의 세션을 기획하는 걸 보면서 섹슈얼리티와 이야기, 미디어, 그리고 방송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성소수자와 군대, 성소수자와 재생산권, 성소수자와 국가/핑크워싱 등, 어렴풋이 성소수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만 알고 있던 지점들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됐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앞으로 나의 성소수자 연구에 대한 방향성도 제시해 주었다. 그동안 막연히 ‘한국 성소수자 문화 연구’라고 생각했던 지점이 많았다면, 이번 기획을 하면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 그리고 의제들을 맵핑 할 수 있었고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연구하고 연결 할지, 나의 진정한 흥미거리는 무엇인지, 어떠한 의제에 다가가서 연구를 깊게 진행하고 구체적인 질문들을 만들어 낼 지에 대한 고민들도 할 수 있었다. 확실하게 무엇인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나의 연구 계획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 의제들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전에는 한국 성소수자 운동이 많이 성장했고, 성소수자 단체도 너무 많아져서 한국 성소수자 운동에서 사람이 부족하다는 말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맞아 많이 더 필요하지’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면, 이번에 기획을 하고 회의를 하면서 다양한 의제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하고, 더 많이 움직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또한 이 많은 일을 해야하는 상근활동가 분들에 대한 수고와 고마움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거의 매일 같이 일과 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근활동가 분들이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충 되어야 할 경제적인 지원, 심리적인 지원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채식을 하는 퀴어로서, 이번 성소수자 인권 포럼에 채식 김밥이 제공될 수 있었던 것에  기분이 좋았다. 이번 기획을 하면서 언니네트워크의 잇을님과 다른 기획단 분들의 도움으로 채식 김밥을 제공 할 수 있게 됐다. 일요일 하루 였지만, 내 주변의 많은 채식하는 성소수자 분들이 점심식사 걱정 없이 포럼에 참가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고, 이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너무 뿌듯했다. 채식 김밥도 너무 알차고 맛있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언니네트워크 잇을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3.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이렇게 두달 동안 준비하고 진행했던 기획임에도 불구하고 포럼 당일날 위장염에 걸려 담당이었던 연구포럼 사회를 진행하지 못하고 둘째날 인권포럼 행사 진행마저 도와드리지 못하게 된 점이다. 다른 기획단 분들도 한참 정신 없으시고 바쁘실 때 함께 하지 못한 점이 죄송하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열심히 준비한 연구포럼에서 발제자분들과 얼굴을 보며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게 아쉽다. 그래도 일요일 하루라도 참여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성소수자 대토론회 까지 잘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 짧지만 굵었던 성소수자 인권포럼 기획단으로서의 경험이 나의 성소수자 인권 활동 및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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