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Say it, This is my bitches”


인턴십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뉴욕에서 온 앨리는 점심 시간이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미국 사람들이 쓰는 다양한 속어들을 가르쳐 주곤 했다. 드라마를 봐도 자막을 읽기 바쁘고, 영어라곤 학교나 학원에서 ‘겸손한 말’을 배운게 다였기에 그녀의 영어 교실은 나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앨리가 다양한 종류의 ‘나쁜 말’을 가르쳐 주면 그걸 따라하며 깔깔거리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에도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었던 말이 있었으니 바로 서두에 적은 문장이다. 앨리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할 때 이렇게 한다며 ‘애들이 나의 년들이야(This is my bitches)’라는 말을 하곤 나에게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 앨리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내가 ‘bitch(년)’이라는 말을 쓰는게 옳은걸까? 그것도 심지어 주변의 다른 여성 동료들을 소개할 때에? 내가 그 말 앞에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대놓고든 뒤에서든 남성들이 여성을 ‘년’으로 지칭하며 언어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들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일이 실제로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같은 의도로 ‘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그럴지 몰라도 ‘년’의 당사자가 되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것 같다. 하다못해 나도 이성애자들이 자기 친구를 ‘This is my faggots’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면 상처를 받을 것 같다.


게이들의 ‘년 문화’, 전복 혹은 퇴행?


그러니 남성들은 더 이상 ‘년’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 논의는 깔끔하게 끝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만일 남성들이 여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같은 남성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년’을 쓴다면 어떨까? 그것도 ‘여성에 대한 멸시와 비하’의 목적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는 의도로 사용한다면 말이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반복된 논의가 또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게이 공동체 내부의 ‘년 문화’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미 여러 커뮤니티를 한차례 휩쓸고 간지 오래이니 말이다. 딱히 ‘년’ 뿐일까, ‘보갈’과 같이 이제는 세월에 묻혀 잘 쓰이지 않는 용어들도 논쟁의 대상이 되긴 마찬가지다.


전복이냐 퇴행이냐, 유희냐 폭력이냐, 게이들의 은어에 관한 논의의 구도는 지금껏 이렇게 반복되어 온것 같다. 가령 성판매 여성을 속되게 부르는 ‘갈보’를 거꾸로 한 ‘보갈’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특정 계층의, 그리고 더 나아가 때로는 여성 전반을 비하하는 용도로 쓰이는 말에서 따온 것이 맞다. 하지만 한 쪽에서는 ‘보갈’이 그런 맥락과는 달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성판매 여성처럼,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변두리로 배제된 게이들이 자신의 위치를 자조하기 위해 쓴 말이라고 주장한다. 두 집단 모두 공동체 내에서 과잉 성애화된 존재로 치부되곤 하니 ‘갈보’가 ‘보갈’로 변화한 흐름이 아주 뜬금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년’ 또한 마찬가지다. 이 문화를 ‘게이들의 여성 혐오’의 일부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보갈과 같은 이유로 이를 전복성을 내포한 수행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두 주장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고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양쪽의 주장 모두에 공감을 하고, 특히나 ‘년 문화’로 상징되는 게이 공동체의 여성 비하 단어 재전유가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전복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내가 남성 동성애자임에도 나는 게이들이 ‘년’을 사용하는 것에 꽤 오랜 시간 불편한 감정을 느껴왔다. 그냥 ‘년’도 그렇지만 그 앞에 부가적인 욕설이 붙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그 말을 굳이 인용하지는 않겠다) 나는 그것이 내가 성소수자 공동체 이전에 여성 운동 단체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년’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나의 동료들이 공격 받을 때 들을 수 있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것 뿐일까?


여성을 ‘기표’로 사용한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내 머릿 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다. 바로 영화 감독 라스 폰 트리에다. 익히 알려져 있듯 그의 영화에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온갖 끔찍한 고통을 겪는 여성 주인공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래서 트리에가 실은 여성혐오자가 아니냐는 비판이 늘상 있었지만, 이에 대해 그는 영화 속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의 일부가 투영된 인물이라고 응답했으며 트리에와 작업한 샬롯 갱스부르 역시도 그녀가 라스 본인을 연기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례로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 작업이 힘들 정도의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는데, 그래서 <멜랑콜리아>를 비롯한 그의 ‘우울 3부작’을 자전적인 작품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볼 때면 심란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가 겪은 우울과 불안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런 경험을 투영하여 만든 인물이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왜 그 캐릭터가 하필 여성이여야 할까? 특히나 트리에가 영화 속에서 여성에 대한 고루하고 보수적인 메타포를 반복할 때면 회의는 더욱 깊어진다. 앞서 언급한 <멜랑콜리아>의 한 장면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 캐릭터인 저스틴이다. <멜랑콜리아>는 영화 전반에 걸쳐 그녀가 겪는 고통을 괴로울 정도로 집요하게 묘사한다. 흥미롭게도 저스틴의 상태는 말 그대로 이름이 우울증인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를 향해 접근하면서 호전되는데 급기야 영화에는 그녀가 나체로 풀밭에 누워 멜랑콜리아로부터 퍼져나오는 빛을 즐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을 본 후 머릿 속에 곧장 떠오른 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관한 고루한 도식이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사회는 늘 자연적이고 그래서 타고났다고 간주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성격을 정해놓은 다음 그에 따른 성 역할을 부과해 왔다. 가령 남성이 이성적, 합리적, 독립적이며 그래서 문명에 적합한 주체로 설정 되었다면 여성은 감성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그래서 보다 자연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져 왔다.(때문에 우울증은 전형적인 ‘여성 질환’이라는 오해를 사곤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여성성/남성성 도식은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오랜 시간 여성 억압과 제도적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라스 폰 트리에가 자신의 고통을 대변할 인물로 여성을 내세울 때, 심지어 여성 캐릭터와 함께 ‘자연’·‘육체’·‘감정’이라는 고루한 은유를 한 화면에 때려 박을 때 불편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주인공 셀마를 숭고한 모성애의 상징으로 만든 <어둠 속의 댄서>나 여성을 ‘위협적인 자연’과 등치시킨 <안티 크라이스트>까지, 라스 폰 트리에의 전형적 여성상 답습 사례는 끝이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젠더 체계에서 기득권을 지닌 백인 이성애자 남성 감독이 카메라 뒤에서, 우울을 겪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주변부로 밀쳐진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여성을 하나의 기표로 사용하는게 아무렇지 않은 일일까? 그리고 트리에 감독 같은 사람이 문제로 지적된 여성성에 대한 묘사를 반복할 수록, 여성에게 꼬리표처럼 붙은 그 성질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진 않을까?


관성을 넘어서


이제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게이들이 서로를 ‘년’으로 지칭하거나 혹은 ‘보갈’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전복이고 일탈일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자신의 위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일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하필이면 왜 그것이 실제로 여성을 멸시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표현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애초에 게이들의 그 자조적인 말하기(이건 명백하게 누군가를 내려다 보는 행위다)는 ‘년’과 ‘갈보’가 여성을 멸시하는 표현임과 동시에 그 말들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그들이 격하된 위치를 점함을 드러내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런 표현들이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거나 혹은 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림을(물론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보여주는 단어라면 그 말을 가져다 썼을까? 또한 여성을 그렇게 경멸하는 것이 가능한 권력 구조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남성’으로서 게이들은 어떤 위치에 있나? 그리고 마지막 질문. 이런 상황에서 게이들이 우리는 ‘년’과 ‘보갈’을 그 단어가 원래 의미하고 기능하는 바와 무관한 맥락에서 쓴다고 주장하는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퀴어’와는 달리 ‘년’이나 다른 문제로 지적된 표현들은 아무리 게이 공동체가 내부로 가져오고 열심히 사용한다해도, 그 말의 사회적 의미나 용례가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차라리 페미니즘 운동이 더욱 강력하게 일어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애초에 게이들이 ‘년’을 사용하는 이유와 목적이 지닌 내재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그런 말들이 애초에 지닌 기능과 의미가 강화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앞서 내가 라스 폰 트리에게 던진 회의적인 의문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이 글의 결론이 단순히 ‘게이들은 이제 ‘년’을 쓰지 말자’인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언젠가 그런 결론에 다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 내가 요구하고 싶은 것은 단지 ‘소수자들의 하위문화’ 정도로 이 문제를 정리하고 넘어가지 말고 ‘년 문화’에 대해 조금더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보자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인 우리가 ‘년’을 사용하는게 확실히 급진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남성’인 우리가 또 다른 정치적 약자라 할 ‘여성’들을 깎아 내리는 단어를 쓰는게 과연 같은 의미일 수 있을까? 보다 많은 게이들이 이미 마련된 답안을 관성적으로 내미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고민할 수 있다면 좋겠다.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경우 사회적 부정의는 구성원들이 치열해지기를 포기하는 순간 발생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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