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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이 세상의 ‘성민이’에게

by 행성인 2009. 9. 15.

* 성민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1. 우선


  동인련에 기고하는 글이랍시고, 어설프게 게이친구에 대한 주접스러운 추억을 싸게 포장해서 늘어놓고 싶진 않다. 누구나 있을법한 추억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포장하거나 “참 잘했어요.”로 끝낼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아니건넨만 못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건 15년 전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을 어떻게든 꼭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직접 전할 자신이 없어 동인련이라는 우체통에 담아본다.



2. 어느 하교 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운동회를 거창하게 여는 것으로 유명했다.(심지어는 성화까지 피웠으니...) 그런 운동회 준비를 위해 두 달 전부터 총력을 기울이고 각종 경기의 예선전이 치러졌다. 2학년은 럭비가 지정종목이었는데 운 좋게 선수로 뽑혀 예선전에 나가게 되었다. 포지션은 15번 풀백. 첫 상대는 1반. 정식 럭비선수가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는 우승후보였다. 역시나 강했다. 그렇게 상대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수돗가에서 분을 삭혀야 했다. 터치다운을 한차례 성공시켰지만 그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가라앉지 않은 상기된 얼굴로 교문을 나섰다. 그 때 누군가 뒤따라오며 말을 건넸다.


  “안녕? 나 성민이야”

  “어... 그래 안녕”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법한 상냥한 인사에 조금 뜬금없었지만 어디선가 본 적은 있기에 인사를 받았다. 당돌하게도 자신은 오늘 경기에서 우리에게 패배를 안겼던 1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뭐’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내게 오늘 경기에서 아주 잘 뛰더라며 터치다운은 정말 멋있었다는 말을 건넸다. ‘뭐야 이건...지금 날 위로하는 거야?’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 성격인지라, 퉁명스럽게 그러냐며 골목길이 끝날 때까지 같이 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 아이와의 인연은 우연치고는 상당히 많은 하굣길을 같이 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는 같은 반이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미술을 좋아했다. 난 여느 남중생들 마냥 주먹놀림이 생동적으로 묘사된 그림을 그렸던 반면 그 아이는 항상 캔디같은 그림을 그리곤 했다.



3. 니가 그럴 줄 몰랐어.


  중간고사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공부라는 핑계 속에 즐기는 밤샘 놀이의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 독서실을 끊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 같은 고시원보다는 어두침침한 방안에 따닥따닥 칸막이 책상들이 즐비하고 밤이 되면 그 더러운 책상 밑에 냄새나는 이불을 깔고 잠을 자는 독서실이 보편적이었다. 아무튼 시험 덕에 얻은 3일간의 외박은 중학생에겐 뭘 해도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사발면 하나를 안주삼아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음담패설에 지칠 만큼 깔깔대고는 새벽에야 잠을 청하곤 했다. (물론 그 아이역시 내가 권하지는 않았지만 3일간의 밤샘일정에 함께 했다.)


  그렇게 시험범위 만큼 방대한 수다를 떨고 지쳐 잠든 어느 밤 난 이상한 꿈에 눈을 떴다. 그런데 현실은 더 이상했다. 내 셔츠가 벗겨져있고 내 가슴 부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게 가위라는 것인가? 까만 물체가 가슴을 누르고 있고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더니 이런 건가? 그런데 그 까만 물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민이었다. 내 살결에 그의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그 조용한 움직임에 내 피부는 뭉크의 절규만큼 경악하고 있었다. 나의 머리는 사정없이 돌고 있었다. 아직도 살면서 그 때만큼 머리가 과부하된 적은 없다. 내 피부는 반응을 했지만 난 반응할 수 없었다. 난 살며시 돌아누웠다. 무의식적 뒤척임과 의식적 거부 사이에서 나의 연기가 어땠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찌됐건 그 아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그 날 이후로 이게 뭘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고민을 안고 혼자 낑낑대야했다.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었고, 누구도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해석이 끝나기도 전에 그와 나사이의 관계가 정리될 수밖에 없는 날이 다가왔다.



4. 난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졸업식 날이었다. 이래저래 어색한 졸업식 사진을 찍고 자장면에 탕수육하나 시켜준다는 엄마를 따라 집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성민이가 다가와 축하인사와 함께 편지 하나를 건넸다. 아직 머리속에 남아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그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지에 커다랗게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란 글자들이 빼곡히 적힌 하트. 독서실의 그 사건을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해석 보다는 행동지침 하나가 내 머리 속에 자리 잡았다. ‘성민이를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말자.’



5. 지침준수


  성민이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스스로 규정한 행동지침에 난 어느 꼰대의 명령보다도 잘 따르고 있었다. 성민이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가정형편이 안 좋다는 얘길 들었지만 그럴수록 행동지침은 더욱 강해졌다. 성적만큼이나 우리의 거리는 크게 떨어졌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재수, 삼수 코스를 밟았다. 학원 수업이 없는 어느 주말 오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성민이었고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삼수의 고된 시련이 나를 관대하게 만든 것인지, 문제풀이에 익숙해진 머리가 풀리지 않은 그 사건마저 풀고 싶었던 것인지, 성민이를 만나러 나갔다. 만나자마자 어색함을 태워버리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학생활 재밌냐?”

  “어 무지 재밌어, 나 이번에 응원단장도 맡았어.”

  “ㅎㅎ 그런것도 해? 당구는 좀 칠 줄 아냐?”

  “어 조금 칠 줄 알아”


  난 담배연기를 뿜으며 싸구려 무스탕의 깃을 한번 세우고는 그를 당구장으로 이끌었다.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그런 공간으로 그를 몰아세우고 싶었던 것일까? 상대도 안 되는 다마수에도 불구하고 난 시간을 때워야 된다는 사명감에 쌓인 사람처럼 맘에도 없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당구에 집중했다. 경기가 끝나갈 무렵 무심코 물었다.


  “야, 대학생인데 연애안해?”

  “ㅎㅎ 연애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안도감이었을까? 오랜만에 진심어린 미소를 띠우며 말을 이었다.


  “오호~ 예쁘냐?”


  멍청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성민이는 머뭇거리더니 답을 이었다.


  “너 닮았는데 너보다 키도 크고 잘 생겼어.”


  큐대를 잡고 있는 손이 순간 흔들렸고 삑하는 소리와 함께 공은 헛나갔다. 다시 난 조용히 담배를 물었다. 나만큼은 이해해 줄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나온 아이처럼 성민이는 침착하게 다음 공을 쳤다. 딱 담배 한가치의 침묵이 흘렀고 그 시간동안 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구를 치고 공부하러 가야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한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앞으로 한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듯 저만치 오는 버스를 핑계삼아 서로 마주봤다. 준비한 멘트도 아니지만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잘가라. 그리고 나보다 멋진 그 사람과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정말로.”

  “ㅎㅎ 그래, 니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야”


  내가 정말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껌딱지 떨어졌다는 안도감이 아닌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버스에 오르는 그의 어깨를 툭 쳐 밀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던졌다.


  “너 겁나 멋지다. 잘 가고, 나 대학가거든 꼭 한번 찾아온나.”



6. 니가 그럴 줄 알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성민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이해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학교가서 그리고 사회운동이란 것을 접하게 되는 동안 난 수많은 성민이를 알게 되었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을 이해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나에게는 값진 상태인 것만은 확실하기에 나의 주변사람들 또한 비슷한 상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커졌다. 어줍지 않게 내가 안답시고 떠드는 것보다는 나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같이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 사회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연 세미나가 바로 동성애 문제였다. 게이 연사를 모시고 성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의 다르지 않은 일상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후배들은 그 세미나가 자신이 동아리를 통해 배운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글쎄 그 이후에 내가 얼마나 성소수자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나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과 편히 살고자 하는 마음만큼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늃.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나같은 인간이 나타나야하고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수많은 성민이가 나타나야하고 나타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7. 나머지 이야기


  성민이는 의상디자이너가 되어 미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고 지금은 서로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사회운동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주고 있다. 지난 겨울 에이즈 감염인 인권주간 행사 사진을 보고 성민이에게 이런 쪽지가 왔다. “난 니가 그럴 줄 알았다. 분명 그 정도로 멋진 놈이기에 좋아했던거야.”


  ‘니가 그럴 줄 몰랐다.’는 어린시절 나의 무식한 못박음이 “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이 되어 돌아오다니. 차마 찢을 수 없어 처박아 두었던 그 편지가 이젠 지칠 때면 슬며시 꺼내어 보곤 한다. 그리고 “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 지금의 날 행동으로 이끌고 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 번 성민이에게 감사와 그리움의 마음을 전한다.  





최규진_젊은보건의료인의 공간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