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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To. 동인련

by 행성인 2009. 4. 28.


 

언제나처럼 하루를 마감하면서 캔맥주 빈캔을 차곡차곡 쌓아놓을 때쯤이었지. 네이트온으로 팀장님이 웬일로 말을 다 거셨댜~?

 “Solid형 잘 지내? 글을 한편 써줘야겠어”

흠... 올게 왔군. 글 쓸 사람이 떨어진 거야. Fresh한 신입회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왜 나야...
농익은 이야기가 필요한 건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일상사를 써야되는 걸까, 고민고민하다가 다음날 바람이 너무 청아해서 반가를 내고 시내에 나가 모 카페에 혼자 폼 잡고 펜을 들었으나 지나가는 풍경(아마 사람이었겠지)에 매료되어 글 쓰는 걸 잊은 지 오래, 결국 마감이 지났다는 소리에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기 시작했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도 무슨 내용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선 인터뷰가 편한 것 같다.) 하마터면 오늘도 못 쓸 뻔 했다니깐. 건장한 후배 녀석이 대뜸 와서는 내 침대에 눌러앉아서 영화보고 밥 먹고 가서 오늘도 공치나 했더니 갑자기 졸리다고 집에 가버렸어 훗.


태어나서부터 게이였던 것 같아. 항상 남자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고, 남들 다 사귀니까 나도 사귀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만난 여자친구들 보다도 동성친구들과의 포옹이 더 좋았으니까. 고1때 지금생각하면 서로 진지하게 만나고 육체적 관계를 맺었던 그 친구와도 우리끼리만의 연애, 그러면서도 뭔가 불완전한 확신, 그리고 서로 각기 다른 여자친구.. 그런 식으로 내 정체성에 대한 갈림길 속에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런 순수한 소년시절이 어제 같은데 벌써 삼십대에 진입하다니...


PC통신으로 처음 성소수자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불확실한 나의 정체성에 해방감을 주었지. 이런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구나. 그리고 보통 사람이랑 똑같아. 게다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그런 은밀한 비밀을 같이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고 그렇게 Gay하게 대학초반을 즐기고 있었어.


학교모임에 가입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도중, 당시 운영자였던 가필드와 함께 이곳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인권캠프를 준비하면서 동인련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지. 단지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에서 만족했던 나의 마음은 빈공간이 확장됨과 동시에 채워나가야 할 것이 많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던 거야. 그때부터일까 마냥 내 삶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 둘러보면 내가 얼마나 차별받고 있는지, 또 많은 것을 잃고 살고 있는지, 그런 슬픈 사실들을 인식시켜준 곳이 바로 동인련이었지. 사실 이 부분은 미운 구석이야. 그래서 동인련은 애증일지도. 하지만 함께 뛰고 일하고 토론할 때마다 갇혀진 머리는 점점 열려져 가고 시야는 넓어져갔지.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즐거웠던 삶속에서 우울하고 머리 아프고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 점이 슬프긴 하지만, 올바르게 본다면 기계적인 죽은 나로부터 이제는 함께 행동하고 나아간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나로 만들어준 곳이기도 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
결국 그때 그 인연이 이렇게 내려와 내가 힘들 때나 외로울 때 최후의 보험으로 남겨둔.. 그렇게 징징대며 매달리는 최후의 가족이란 느낌. 그래서 동인련은 애증!


내 개인적인 삶은 외로움과의 투쟁 같아. 혼자 있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요즘 부쩍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몸이 아픈 듯.. 하하하.. 동인련 골방 생각난다. 갑자기. 춥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던 방. 그 방에서 쓴 역사가.. 덜덜덜.. 속칭 데뷔 이후 내가 연애를 했던 기간이 더 길까 아니면 혼자였던 적이 더 길까. 아마 전자겠지? 항상 입버릇처럼 이번엔 오래가야지 이번엔 오래가야지 해도 왜 난 매번 연애를 실패하는 걸까. 나라말대로 내가 너무 듬직하지 못한 걸까 너무 애를 구속하는 걸까? 연애가 끊이지 않는다고 금방금방 바꾼다고 부럽다는 이도 있지만 이런 히스테리는 어쩌면 짧은 연애 - 그 헤어짐과 만남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아 술마시고 싶어. 사만다라는 별명이 싫진 않았지만 그건 그 자유스러움 자체였지 허무함은 아니었거든. 물론 동인련에선 명함도 못 내밀고 있지만. 그분 때문에..
어쨌든 지금도 역시(?) 내겐 과분한 좋은 남자를 만나고 있어. 한 살 연하인데 키 크고 잘생기고 능력도 좋은 사람이야(물론 내 기준에서).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고 잘 챙겨주지. 정말 이번엔 꼭 나도 최선을 다해 보필해야겠어. 마침 TV에선 내조의 여왕을 하는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아마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이상, 아니면 내가 동인련에 어마어마한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계속 동인련과 함께하겠지? 사실 참 신기해. 자주 보는 때는 그렇다 치고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도 어제만난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 우리의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도 이러한 점이 바로 동인련 당신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어느 현장에서나 꽃이 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라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도 곧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곧’ 이라는 표현은 과장일 수 있겠다..) 점점 굳어가는 머리, 잊혀져가는 지식들, 그래도 내 몸이 허락하는 한 당신과 함께 Act!하고 싶어. 내년 가을부터 난 부활하리라.



Solid _ 동성애자인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