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마다가스카>라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뉴욕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들이 '마다가스카'라는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사자와 얼룩말, 기린 등이 친구로 나옵니다. 동물원에서는 사자에게 끼니때마다 먹음직한 고깃덩어리가 제공되니 별 문제가 없었지만 동물원을 탈출하고 나니 배고픈 사자에게 친구들은 자꾸 먹잇감으로 보이게 됩니다. 우정에 위기가 닥친 거죠. 영화의 해결책은 물고기입니다. 사자의 친구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사자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이들의 관계는 다시 좋아집니다.
그런데 물고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봉변이지요. 당연히 영화 속에서 물고기들은 한 마디의 대사도 없습니다. 말이 없는 존재, 물고기는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 관객들은 슬퍼할 이유도, 불편해야할 까닭도 없습니다. 아마도 물고기가 "사자님, 우리도 당신과 친구하고 싶어요. 제발 잡아먹지 말아요." 한다면 이건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블랙코미디나 컬트무비가 되었겠지요.
물론 세상은 컬트무비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말하는 물고기들에게 "친구, 이게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까" 하거나 "물고기는 원래 말을 못하는데 너는 비정상이군", 또는 "상영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만 닥쳐!" 하며 잡아먹어버리니 웬만한 컬트무비보다 더 엽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를 부정당하는 사람들
저는 잡지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의 대부분은 이번 호에는 어떤 이야기를 실을 것인지 의논해서 마땅한 사람에게 원고를 부탁하거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권에 대한 잡지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른바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게 언론사 기자들에 의해 편집되어 인용되거나 학자들에 의해 해석되거나 관료들에 의해 통계수치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밝혀진 촛불만 해도 이러쿵저러쿵 하는 책들은 서점에 널려있지만 처음 그 촛불을 들었던, 2.0세대니 뭐니 하며 극찬을 받았던 청소년들 스스로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주노동자들이 아무리 심각한 지경에 처해도 텔레비전에 이주노동자가 직접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정치권은 너나할 것 없이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떠들지만 정작 그들은 국회 근처에 가지도 못 합니다.
지난해 국방부에서는 불온서적 리스트를 발표해 세간에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잡지사는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같은 성소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물론 우리 잡지사가 낸 책입니다)이 왜 명단에서 빠졌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워했습니다. 아마도 국방부나 검열당국에게 성소수자 문제는 불온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문제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기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존재의 문제이자 관계를 재구성하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국방부가 찍는 영화에 출연해 "우리도 대사 한 마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화에 국방부를 출현시키는 것이 되겠죠. 대사를 줄지 말지는 좀 생각해봐야겠지만 말이죠.
내가 만난 성소수자
솔직히 말하자면 낯가림이 심한 저에게 성소수자와의 만남은 매우 긴장된 일이었습니다. 어깨너머로 주워들었지만 해독할 수 없었던 부치, 팸이며 FtoM, MtoF 등등의 용어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낯선 문화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러다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어떤 단체의 워크샵에서는 제가 성적 소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1박2일 동안의 짧은 경험만으로 소수자의 처지, 동성애자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이 경험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AIDS/HIV 감염인 인권캠페인을 함께 하면서, 군대 내 동성애자 문제에 대한 취재를 하면서, 온몸으로 한국사회의 모순과 맞서고 있는 윤가브리엘과 만나고, 호기롭게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국회의원 출사표를 던졌던 최현숙 씨를 인터뷰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상상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 느끼기도 하고 되려 제가 에너지를 충전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일곱이 아니라 열일곱 가지 색깔은 족히 될 것 같은 성소수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며칠 전에 직접 본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일본 영화인데 사고로 머리를 다쳐 80분밖에 기억을 못하는 수학자가 나옵니다. 이 수학자가 사랑하는 수식이라는 것이 '오일러 공식'이라고 아무런 관련성도, 어떠한 규칙도, 끝도 없는 초월수 e와 π에 실체가 없는 가상의 수인 허수 i를 만나면 -1이 된다는 공식입니다(정리를 하자면, eπi = -1). 고립된 생활을 하던 수학자는 한 미혼모와 그녀의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이들과의 진정한 인간관계를 통해 영화가 끝날 즈음에는 이 공식을 'eπi +1=0'으로 바꾸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모순투성이의 존재에 하나만 더해지면 0이 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0은 존재하지 않음(無)을 나타내주는 존재이며 규칙에서 벗어난 수이자 무한대 개념이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고 하네요. 문득 성소수자의 존재가 0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강곤님은 인권재단사람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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