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신설동, 제기동, 혜화동, 신당동, 회기동, 후암동, 성북동, 충정로, 서교동, 그리고 대흥동까지 20년 동안 무려 열 번 이사를 했다. 한강 이북을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행성인은 2년에 한 번 꼴로 짐을 싸고 새로운 둥지를 찾아왔다. 2015년에 지금의 대흥동 사무실로 들어왔으니 그새 2년, 올해도 어김없이 짐을 싸야한다. 그나마 올해는 별 다른 문제가 있어서라거나, 열악한 환경 혹은 집값에 쫓겨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행성인의 활동량이 늘어남에 따라 회원이 늘고 상근자가 늘어나면서 지금 공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제일 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상근자 사무 공간 확충이다, 다음으로 교육장 수용 인원 확대, 거기에 더해 추가 회의실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더 좋았다. 더불어 성소수자인권운동의 메카로 자리 잡길 바라며 우리가 꾸었던 자잘한 꿈들도 있었다. 카페 같은 공간, 야외 테라스, 요리 가능한 곳 등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너른 포부를 가지고 매물 탐색에 나섰다.
카페? 요리? 테라스? 그렇다. 사람은 꿈꿀 때 행복한 법이다. 시세를 알자마자 꿈과 포부가 와장창 깨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 조건이란 것은 휠체어 접근이 가능할 것, 독립적인 공간일 것. 딱 두 가지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네이버 부동산, 네모 같은 어플을 동원하여 1차 검색을 한 후 막상 가보면 입구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적게는 하나, 많게는 열 개까지 계단이 떡하니 놓여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낙심한 표정을 보이면 중개업자는 예외 없이 이렇게 물었다. “짐 옮길 게 많아요?”
중개업자도 건물주도 관리인도, 그 누구도 휠체어 이동을 떠올리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해서 갔다가 입구 턱에 좌절하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애초에 중개업자에게 물어 보기도 했다. 중개업자들은 어어---------거리다 이렇게 답했다. “거기가,,, 있던가, 없던가, 글쎄요 다시 가봐야겠는데요”
그들은 입구 턱의 존재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불편함이 없으니 존재여부조차 잊었다. 매물 중 70%가 입구에서 탈락했다.
휠체어 이동에 딱 들어맞는 곳을 찾으면 이번엔 화장실이 문제였다. 휠체어 이동이 가능한 곳은 대체로 건물이 큰 곳이었고 한 층에 여러 사무실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대개 화장실을 옆 사무실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어떤 경우는 아래위 각각 반 층씩 여자, 남자로 나뉘어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식이기도 했다. 화장실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남자, 여자 딱 나눠져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 (바로 그게 문제예요. 우린 성중립화장실을 원한다고요.)
휠체어 이동이 가능하면서 화장실도 실내에 있는 경우에는 월세가 너무 높거나 평수가 너무 작았다. 혹은 건물 관리가 엄격해 밤 10시 이후에는 소등이라거나, 바로 윗집이 주인세대인 경우도 있었다. 회원모임이 많은 단체 특성상 출입이나 소음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이런 경우도 모두 제외했다. 높지 않은 월세에 적당히 자유로울 만큼 건물관리가 소홀하면서, 휠체어 이동이 가능하고, 한 층 전체를 사용하면서 화장실도 독립적 이용이 가능한!!!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건물은 아무데도 없었다. 물론 돈이 많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래 돈을 벌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야심차게 구해주마고 달려들던 중개업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우리는 더없이 까다로운 세입자가 되어 점점 기가 죽었다.
여기서 잠깐, 철학자 한 명을 데려와야겠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 조직에 따라 우리의 삶이 지배당한다고 보았다. 일생동안 공간문제를 탐구했던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이 선진 자본주의에서는 도시 성장을 통해 극복되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공간 자체를 상품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공간을 생산한다. 자본주의는 파편화되고 균질화되고 계층화된 공간을 생산하며 이렇게 생산된 공간 속에서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사회관계가 재생산된다. 이로 인해 이윤 확보를 위해 공간을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공간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생산하면 할수록, 그 존속에 필요한 사회관계의 재생산이 위협받게 된다. 그래서 도시 혁명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는 노동계급 운동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중단될 때가 아니라, 공간을 통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중단될 때 발생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역시 노동 작업장 중심이 아니라 공간과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투쟁, 자본주의의 공간 조직에 의해 착취당하고 지배당하는 ‘주변화된’ 사람들이 앞장서야 한다. 이때 투쟁은 ‘차별화된 공간’을 생산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파편화되고 균질화되고 계층화되는 방향으로 공간을 조직하는 권력에 맞서 차이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참조: 도시에 대한 권리-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 강현수/ 책세상)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건물, 남녀로 구분된 화장실은 우리의 사고를 그 공간에 맞추고 다른 존재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들이 쉬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간의 구획이 그들을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생산’할 권리를 획득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있음’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하다. 권리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자본의 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얻을 수 있도록 조정하고 보완해나가기를 이 사회에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다른 상상력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공간을 생산할 권리에 대한 투쟁은 점진적 과제로 잠시 남겨두고, 다시 행성인이 처한 현재로 돌아오자. 길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때마침 지금 사무실이 있는 건물 8층 옥탑이 이사를 나가면서 세입자를 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에 8층이 있었어?) 엘리베이터가 7층까지만 표시되어 있어 8층이 있는 줄도 몰랐던 우리는 서둘러 8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7층에서 한 층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사무국으로 쓰기에는 부족함 없이 넓었다. 옥탑이라 전망도 좋고 작은 공간이지만 베란다가 있어 흡연실로 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4층 공간에 더해 8층을 추가 임대해도 새로 알아보는 사무실들보다 월세비용이 저렴했다. 거기에 지금 사무국 공간을 추가 회의실 및 상담 공간으로 꾸밀 수 있고, 교육장 창고를 뜯으면 교육장 또한 지금보다는 좀 더 넓게 활용할 수 있었다. 지금도 교육장에는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고 1인 화장실도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아래위층이면 좋았겠지만 이정도가 어디인가!!! 결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제한적 선택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 머무는 한 인원확충 계획이 없어야 하고 상임활동가 중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는 낙관에 기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것이 차선임을...)
8층 옥탑에서 바라본 전경. 아직 공간을 꾸미기 전이니 풍경만 보자
지금 사무국은 이사 준비로 한창 바쁘다. 한 층 걸어 옮기면 될 것을 사다리차가 웬말이냐는 비용절감 논의에서부터 보다 많은 회원들과 함께 하기 위한 배치와 활용방안 구상까지 몸 쓸 일, 마음 쓸 일, 머리 쓸 일이 많고도 많다. 무엇보다 지난 20년 동안 거쳐 온 십여 군데의 공간에서 행성인 회원들이 만들어낸 생동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한 고민이 치열하다. 비록 삐까뻔쩍한 새 건물로 이전하는 것도 아니요, 4층과 8층이라는 거리만큼의 수고스러움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공간 하나가 늘어난 만큼 이곳에 더해질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에 대한 기대감은 신축 건물주 못지않다.
공간은 사람이 만든다. 더없이 까다로운 과정 끝에 얻은 이 귀한 공간은 앞으로 보다 많은 회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마음 놓을 곳, 아이디어를 내고 힘을 모을 곳, 생각을 넓히고 변화를 꾀할 곳으로 복작복작, 들썩들썩 채워지게 될 것이다. 더해 자본주의 공간 구획이 숨겨놓은 다양한 ‘있음’을 만나고 고민하는 장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참 행성인스러운 곳으로 회원들의 손 때, 발 때 그득히 묻어나도록, 참 행성인스러운 공간으로 무럭무럭 뻗어가도록, 참 행성인스러운 활동들이 거침없이 움트도록, 이 공간을 잘 가꾸겠다고 다짐해본다.
P.S 하나! 1월 20일 오전10시부터 사무공간 확장 이사합니다. 사다리차는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두려워 말고 손 보태주세요. (15일에는 1시부터 이삿짐을 포장합니다. 평일이긴 하지만 가능한 분들은 15일에 손 보태주셔도 좋아요.)
보탬 문의 : 02-715-9984
P.S 둘!! 이사비용초과법칙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비용절감을 위해 온 머리를 맞대었으나 만만치가 않네요. 공간 하나를 완전히 새로 꾸며야 하는데다 교육장 가벽을 철거하여 공간을 넓히려다보니 공사비용 지출이 상당합니다. 함께 만들어갈 공간에 여러분들의 십시일반 후원을 기다립니다.
[후원호소문]
더 넓어진 교육장, 늘어난 상임활동가가 맞이하는 2018 행성인!
여러분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2018년 행성인은 상임활동가를 충원해 총 5명의 상임활동가가 함께하기 되었습니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장을 넓힐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행히 이사를 가지 않고 같은 건물 8층을 추가로 임대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확장으로 다섯 명 상근자의 업무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현재 사무공간에는 책상이 세 개 밖에 들어가지 않는답니다ㅠ.ㅠ). 교육장은 가벽 철거를 통해 공간을 좀 더 넓히고, 가구 배치를 변경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새단장하게 됩니다. 기존 사무공간은 소회의실 및 상담실로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활발히 활동하는 행성인이기에 회의, 모임들이 겹쳐서 카페 등 다른 곳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이제 행성인에서 두 회의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게 되니 그런 걱정은 없겠죠?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행성인의 활동을 응원하며 보내주신 후원금 덕분에 늘어난 보증금과 이사비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또 언제나 행성인 활동의 버팀목이 돼 주시는 회원, 후원회원 여러분들이 있어 상임활동가 충원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공간을 늘리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게 되면서 필요한 물건들과 지출이 많아졌습니다. 철거와 인테리어 시공은 부모모임에서 활동하시는 부모님과 회원들의 힘을 빌려 비용을 절약하고, 이전 임대인이 놓고 간 책상을 재사용하고, 삐걱거리는 교육장 책상 교체도 타 단체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냉난방기기와 사무집기를 비롯해 구입해야 할 비품도 많고 인테리어 자재, 전기 공사 등으로 여전히 많은 비용이 듭니다.
이에 행성인에서 여러분들께 후원을 요청드립니다!
상근자 업무 공간 확보와 교육장 확장을 통해 더 알찬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행성인 사무실은 행성인 활동을 함께 하고 지지해주시는 여러분들의 십시일반 후원으로 만들어집니다.
큰 금액이 아니어도 좋으니 행성인의 공간 확충에 힘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한은행 140-010-905331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이호림)
문의: 행성인 사무국 lgbtaction@gmail.com
'행성인 활동 > 활동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등하게 함께 해요' - 성평등한 조직문화 점검 프로그램 가이드북 발간 (0) | 2021.02.08 |
---|---|
행성인에 성평등 위원회(준)이 생겼습니다. (0) | 2019.04.28 |
행성인 A to Z 텀블벅 후원자 분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0) | 2017.08.01 |
참여 강추! 행성인 4월 행사 일정 알림 (0) | 2017.04.13 |
전퀴모와 함께면 퀴어력 천만-배 (0) | 2017.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