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성인 HIV/AIDS인권팀)
나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인생의 동력을 덕질로 삼고 살아온 사람이다. 가수, 영화, 드라마 등등 별의별 것을 다 덕질의 대상으로 삼았고, 한 번 입덕했으면 웬만해서 탈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구나 알 만한 해리포터, 혹은 유명한 아이돌 그룹을 파 보기도 했고, 진짜 아무도 몰라서 사람들 여럿 모인 자리에서 얘기 꺼내면 갑분싸를 만들 만큼 마이너한 무언가를 파 보기도 했다. 9년 전, 중학교 3학년부터 덕질을 시작하던 당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있는데, 영국 드라마 '닥터 후'다. 고등학생 이후로는 영어도 닥터후를 보며 학습했고(덕분에 나는 한국, 미국, 영국 억양이 애매하게 섞인 영어를 구사하며, 미국인들에게서 싱가포르 억양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두 번 이상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2~3만명 정도가 모인 공간이다) 닥터후 팬카페 커뮤니티에서 스탭을 맡은 적도 있다. 제작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침체되었던 해당 카페 매니저를 맡아, 코로나 때문에 몇 년 동안 진행되지 않았던 오프라인 정모를 당시 부매니저와 함께 주최하기도 했다. 내가 굳이 이렇게 사적인 TMI를 말하는 이유는, (이쯤 되면 당연해 보이겠지만) 이 글의 주제가 닥터후이기도 하고, 또 닥터후가 청소년기 이후로 지금까지 나의 삶과 생각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하자면, '닥터 후'는 1963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영국의 SF 드라마이고, '닥터'라는 외계인이 타디스라고 불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다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인 닥터는 치명상을 입을 때마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재생성'이라는 설정이 있는데, 이 설정으로 주연 배우들이 지속적으로 교체되기 때문에 61년째 드라마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닥터후는 내가 (정체화하기 이전인) 청소년기에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 아주 큰 계기가 된 매체이다.
닥터후가 처음부터 PC하거나 퀴어한 드라마였던 것은 아니다. 백인 남성이 아닌 계층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만연했던(지금 차별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지만) 1960년대 영국에서 여성 쇼러너(showrunner)와 인도계 영국인 감독이 함께 만든 드라마라고 해도, 소수자성에 대한 표현이나 전달하는 메시지 측면에서 적어도 초반부에는 크게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빌런 중에는 당대의 오리엔탈리즘을 직설적으로 반영한 캐릭터가 등장했고, 남성 닥터와 함께 여행하는 액션히어로 느낌의 남성 캐릭터, 그리고 소리지르며 납치당하는 여성 캐릭터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1970, 80년대가 되어서야 여전사 컨셉의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닥터가 여성 동행자 한 명만 데리고 여행하는 형식이(여담이지만 남성 닥터와 여성 동행자라는 형식이 지금까지도 닥터후에서 친숙하게 받아들여진 데에도 과거의 성별 고정관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오래 이어진 1980년대가 되어서는 채식주의자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시간여행자 액션히어로와 같이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여성 캐릭터들이 닥터후에 등장했다. 어쩌면 닥터후의 발전이라기보다도 시대가 진보함에 따라 닥터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닥터가 가진 남성성과 동행자의 여성성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표현도 함께 발전했다는 것이 더 맞다고 볼 수 있다. 닥터가 성별에 상관없이 재생성을 할 수 있다는 (결국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았던) 설정도, 1980년대 드라마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제작진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이다.
닥터후는 그렇게 1989년에 시즌 26을 마지막으로 종영하고, 1996년에 TV 방영용 영화가 공개된 다음 휴방기를 지니다 2005년에 리부트되었다. 새로운 쇼러너는 무려 훗날 '잇츠 어 신'과 '이어스 앤 이어스'를 집필하게 될 퀴어 각본가인 러셀 T. 데이비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인물들 중에는 여전히 소리지르며 납치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직종과 성격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리부트 이전 시즌부터 이어진) 더 성평등한 드라마로의 흐름을 잇는다. 그리고 데이비스가 만든 닥터 후에서 중요한 점은,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공개적으로 (성소수자가 연기하는) 성소수자인 인물이 닥터와 함께 여행했다는 점, 그리고 최초로 백인이 아닌 인물이 닥터와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데이비스의 닥터 후에서는 노동자 이슈, 인종차별 이슈, 성차별 이슈 등 사회적인 메시지가 조심스럽게 다뤄지기 시작하며, 닥터나 그의 친구들의 퀴어함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비쳐진다.
데이비스 이후 쇼러너로 부임했던 스티븐 모팻과 크리스 칩널도 어찌 보면 당연히, 데이비스의 흐름을 이어간다. 모팻의 닥터후에는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살아가는 레즈비언 커플이 조연으로 등장하며, 그가 집필한 마지막 시즌에서는 최초로 레즈비언인 인물이 닥터와 함께 여행한다. 몇십 년 동안 등장했던 메인 빌런이자 닥터와 같은 종족인 마스터는 여성으로 재생성해서 등장하게 되었다. 칩널의 닥터후에 등장하는 13대 닥터는 드디어 사상 최초로 여성 배우가 연기했으며, 그와 함께 여행하는 인물들은 중년 남성, (닥터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는) 남아시아계 여성, 장애를 가진 남성 등 이전에 닥터후에서 한 번도 주요하게 등장하지 못했던 계층의 사람들이다. 중년 남성이 닥터와 함께 여행하는 인물로 나오는 사실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중년 남성에게 부여되는 권위와 우월한 위치가 이전에는 주로 닥터에게 부여되어야 했기 때문에(닥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의 나이와 상관없이) 닥터는 주로 젊은 여성이나 이따금씩 젊은 남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기 때문이다. 칩널의 닥터후에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리드하는 주도적인 역할이 30대 여성의 모습을 한 닥터에게 부여되었으며, 닥터의 중년 남성 동행자는 나이와 젠더에서 오는 권력을 내려놓고 닥터와 동등하게, 또는 더 잘 알지 못하는 위치에서 여행하게 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 닥터후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퀴어 커플로 함께 살아갔음이 확장 세계관인 오디오 드라마에서 다루어지고,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주연급으로 등장한 몇몇 인물들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쇼러너들의 인터뷰에서 암시된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다양성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다. 해외에도 보수적이거나 혐오적인 성향의 팬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DC인사이드와 같이 보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로 활동하던 한국의 닥터후 팬덤이 훨씬 더 직접적인 다양성 표현에 적대적인 것은 사실이다. 모팻의 시즌에 등장했던 닥터의 레즈비언 동행자 '빌 포츠'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캐릭터 빌드업이 약하다,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르치려고 든다 등등의 온갖 공격을 들어야 했고(사실 직전에 닥터와 여행했던 캐릭터의 서사가 3년에 걸쳐 방대한 빌드업을 겪었기 때문에 한 시즌만 등장하고 하차한 캐릭터의 서사가 빈약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침 스토리 구성이나 떡밥 회수, 설정 파괴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는 평을 많이 들었던 칩널의 닥터후는 한국 팬들에게 닥터의 성별, PC한 메시지, 퀴어 러브라인 형성에 대한 과한 욕심이 원인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닥터후에서 퀴어적인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시기 직전에 입덕한 나는, 사실 한국의 닥터후 커뮤니티에서 이런 담론이 오갈 때 그들에게 특별히 공감하지 못했다. 빌 포츠가 닥터후에 등장하기 한참 전에, 나는 닥터후로 인해 나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 각종 이슈에 대해 동년배 남자애들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던(초등학생일 때 엄마한테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에 대한 해답은 나 혼자 찾아야 했다.) 나는, 유독 퀴어 이슈에 대해서만 거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종교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으며 보수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도 있고, 어쩌면 15년이 넘는 디나이얼 시기를 거치며 무의식적으로 나의 정체성과 유사한 것을 억누르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공부하느라 바쁜 와중에 몰래 보느라 새벽 일찍 일어나고, 굿즈를 몰래 사고 팬카페에서 활동할 정도로 좋아하는 그 드라마에 퀴어인 인물들이 너무 당당하고 멋지게 등장하고 있었다. 가치관이 한창 형성되느라 머릿속이 개판 5분 전 수준으로 난장판이었을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남자한테 플러팅하는 남자랑, 여자랑 결혼하는 여자는 신의 뜻에 맞지 않는 죄인이거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배웠는데,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멋있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 마침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거 같은데, 혹시 알고 보니 이런 사람들한테 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까? 몇 달 간의 혼란기를 보내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나는 정말 놀랍게도 퀴어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찾아보는 앨라이가 되어 있었고, 종교와 퀴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퀴어 신학을 찾아보며 공부하는 고등학생 머시기가 되어 있었으며, 비온뒤무지개재단 홈페이지에서 파는 무지개 예수 뱃지를 샀다가 보수적인 가족들에게 들켜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반항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앨라이이면서 퀴어 당사자로 정체화하는 데는 그 이후로 또 몇 년이 걸렸고, 가족에게는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집과 학교 밖에서 퀴어 커뮤니티에 속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더 멀리 본다면 행성인에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퀴어 의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의 시작은 사실 닥터후였다. 역시 청소년기에 접하는 매체와 메시지는 가치관 형성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칩널의 닥터후가 끝난 후, 닥터후 제작진은 시리즈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데이비스를 다시 쇼러너로 앉힌 다음, 60주년 특집 3부작에 데이비스의 10대 닥터를 연기했던 데이비드 테넌트를 14대 닥터 역으로 다시 데려왔고, 10대 닥터의 동행자로 등장해 큰 인기를 얻은 배우 캐서린 테이트도 등장시켰다. 데이비스의 닥터후를 기억하는 기존의 팬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쌍수를 들어 데이비스의 귀환을 환영했다. 3부작이 끝난 후 새로 등장한 15대 닥터를 연기한 배우는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90년대생이며, 정식 계보의 닥터 중에는 최초로 흑인인 슈티 가트와이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 게이 캐릭터인 에릭 에피옹을 연기한 가트와는 닥터후에서도 활발하고 순박한 자신만의 닥터를 잘 소화하고 있으며, 첫 등장부터 그에게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끼스러움과 동질감 때문에 나의 최애 닥터가 바뀌게 되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일부 팬들은 데이비스가 칩널의 닥터후에서 볼 수 있었던 PC함 대신 드라마 서사 본연에만 집중할 거라고 기대하며 좋아했지만, 15대 닥터의 첫 에피소드부터 끼스러운 닥터와 트랜스젠더 캐릭터, 그리고 공식 설정상 양성애자인 닥터의 동행자가 등장하며 그들의 기대는 산산히 무너졌다. 15대 닥터의 첫 시즌은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나쁘지 않은 피날레를 갖췄다는 평을 듣고 대충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닥터가 남성 캐릭터와 러브라인을 형성해 키스하는 장면이 담긴 에피소드는 일부 팬들의 지탄을 들어야 했다. 닥터가 흑인인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남성 닥터가 남성과 키스하는 것도 봐야 하냐는 한 팬의 한탄이 아직까지 기억난다.
하지만 처음부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초월한, 이보다 퀴어할 수 없는 캐릭터인 닥터가 언제까지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모습으로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한국에서 끝까지 동성혼 법제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생각이다. 닥터후가 처음부터 퀴어한 드라마는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은 누가 봐도 퀴어한 드라마이며, 중고등학생 시절의 나와 같이 가치관 정립에 열려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중매체라는 점에서 퀴어 의제를 자연스럽게 포용할 책임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이런 책임을 뛰어나게 수행하면서 작품성 높은 드라마를 작성할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한국 닥터후 팬덤 안의 'PC충'이자 '남페미' 포지션을(다른 팬들이 나를 공격할 때 붙인 호칭들이지만) 자처하며, 태생 퀴어 외계인 닥터를 다시 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무지개문화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원에세이] 우정이라는 개 같은 이름 (0) | 2024.09.24 |
---|---|
[서평] 젠더를 바꾼다는 것 (0) | 2024.07.28 |
[회원 에세이] 내가 사랑하는 퀴어한 케이팝 (0) | 2024.05.26 |
[4월 추모주간 기획] 기억의 문장들 (0) | 2024.04.24 |
[드라마 리뷰] 커뮤니티의 이야기- 잇츠 어 신 (0) | 2024.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