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지개문화읽기

[드라마 리뷰] 커뮤니티의 이야기- 잇츠 어 신

by 행성인 2024. 4. 24.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최근에 '모두의 결혼' 자원활동가로 부스를 운영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만나보는데, 외국에서 한국 여행을 왔다는 분과 이야기를 할 일이 있었다. 모두의결혼이 어떤 단체인지 설명드리니, 본인도 퀴어 당사자라고 말씀하시며 사용했던 말이 'I'm in the community too'였다. 그때 그분의 단어 선택에 흥미를 느껴, '커뮤니티', 더 구체적으로는 '퀴어 커뮤니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도 퀴어 당사자이다'라고 해도 되었지만 '나도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퀴어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것과 퀴어 당사자라는 것은 비슷한 말일 수도 있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른 것 같고, 한국보다는 외국의 자료에서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말을 조금 더 자주 듣는 느낌도 있다. 퀴어 당사자라고 해서 당연히 스스로를 퀴어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고 정체화하지 않을 수 있으며,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행해지는 네트워킹, 접할 수 있는 기회 등이 반드시 사회운동의 형태를 띄지 않더라도 삶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도 앞으로 계속 스스로가 퀴어 당사자이며 퀴어 커뮤니티에 속한다고 정체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닥터 후'(여담이지만 닥터 후는 내가 학창시절에 퀴어 이슈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매체이다)의 제작과 각본을 맡은 각본가 러셀 T. 데이비스가 각본을 쓴 2021년의 영국 드라마 '잇츠 어 신'에도 퀴어 커뮤니티가 등장한다. 1980년대 런던에 위치하고 있는 이 퀴어 커뮤니티는 2020년대 서울에서 내가 경험하는 퀴어 커뮤니티와 비슷한 듯 다른 역동을 지니고 있으며, 달콤하고 재미있는 동시에 슬픔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글에는 드라마 '잇츠 어 신'에 대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의하기 바란다.

 

 

 

내가 '잇츠 어 신'을 처음 본 것은 퀴어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단체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최근에 다시 봤을 때는 처음 봤을 때 놓친 것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었다. 1980년대 런던의 퀴어(특히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HIV/에이즈 감염을 마주하는 약 십 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는, 내가 행성인에서 배울 수 있었던 HIV/에이즈에 대한 내용과 감염의 역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두 번째 드라마를 볼 때는 에이즈에 대한 내용이나 당시 사태의 비극성보다도, 주인공들이 속한 커뮤니티의 성격과 역동에 집중했다. 각본가이자 퀴어 당사자인 러셀 T. 데이비스가 실제로 1980년대에 퀴어 커뮤니티에서 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의 다섯 명의 주인공인 리치, 콜린, 로스코, 애시, 질에게서 내가 커뮤니티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닮아 있는 면을 찾을 수 있어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작품 내에서 분량이 가장 많은 리치는 배우의 꿈을 좇으며 런던에서의 찬란한 게이 라이프를 바라고, 양복점에서 일하는 콜린은 소심한 성격에도 친구들과 함께 살며 새로운 삶을 경험하며, 나이지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 로스코는 보수적인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집을 뛰쳐나가 친구들과 함께 산다. 매력적인 외모의 애시는 대학 졸업 후 교사로 일하며 내적 갈등을 겪고 다섯 명 중 유일하게 여성인 질은 시간이 지나며 에이즈 문제가 심각해지자 친구들에게 이를 알리며 가능한 도움을 모색한다.

 

퀴어 당사자들은 커뮤니티 안에서 많은 도움을 얻기도 하는데,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질이다. 당시의 HIV 감염인들은 커뮤니티 안에서의 연대가 없었다면 도움을 얻고 투쟁을 이어 나가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질은 함께 사는 게이 친구들보다도 먼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바이러스에 대해 공부하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병동에 감금된 에이즈 환자들을 돕기 위해 의사와 변호사의 도움을 청한다. 또한 그는 배우로 일하면서도 성소수자 전화 상담 서비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HIV 사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고 혐오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를 커뮤니티 안에서 조직한다. 질이 친구들과 조직하는 시위에 질의 가족이 참여하고, 양복을 벗어던진 로스코가 시위 시작 직전에 합류해 다함께 도로에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은 시간적으로도 작품 전체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으며 서사적으로도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에 해당한다.

 

작품의 서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리치이므로, 리치에 대한 말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다(리치를 연기하는 배우는 밴드 '이어즈 앤 이어즈'의 보컬이자 퀴어 당사자인 올리 알렉산더이다. 러셀 T. 데이비스는 이 밴드의 이름을 딴 '이어즈 앤 이어즈'라는 드라마의 각본도 집필했는데, 이 작품도 꼭 감상하기를 권한다). 에이즈 사태 초기에, 리치는 게이들만 걸리는 질병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게이들이 재미있게 섹스를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정부와 돈을 벌려는 제약회사의 계략이라고 말한다. 또한 몇 년 후 에이즈 사태가 심각해져 시위를 조직하는 질의 말에 염증을 내면서 하룻밤이라도 에이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냐고 한다. 리치는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을 위해서 아빠가 두 명인 가정에 대한 그림책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는, 또한 마가렛 대처에게 표를 준 보수적인 퀴어이다. 그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도움을 받고 네트워킹을 하며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을 사귀지만 사실 남자를 만나고 친구들과 술마시는 것에만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물론 퀴어 커뮤니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의제에 관련된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 정치와 경도된 삶을 살며 여러 양상에서 자신의 퀴어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리치는 커뮤니티 안에서도 진심으로 연대하기가 어려운 구성원이다. 소위 '우파 게이'라고 할 수 있는 리치의 가족은 리치가 질과 함께 본가를 방문하면 둘 다 극구 부정해도 그들이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배우의 꿈을 가진 리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리치가 에이즈 환자가 된 이후에도 리치가 게이임을 부정하려고 하다가 그가 친구들과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을 막고자 한다. 하지만 리치는, 질이 리치의 어머니 발레리에게 말했듯이 '아름답도록 게이(원래 대사는 beautifully gay, 한국어 자막은 다르게 번역되었지만 아름답도록 게이라는 말이 더 나은 번역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이며, 그를 잘 알거나 진심으로 바라본 사람은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다. 리치의 퀴어함은 그의 가족이나 본인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스스로의 퀴어함을 인정하고 시위에 참여해 친구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가며 수 년에 걸쳐 부정해 왔던 HIV 감염 사실을 고백하는 리치는 비로소 온전히 퀴어 커뮤니티에 속하게 된다. 단순히 커밍아웃처럼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다는 점을 넘어 친구들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연대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는 퀴어 친구들과 진정한 가족이 되고, 혈연 가족에 의해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연락이 차단된 생의 마지막까지도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친구들이 그리워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극적인 전개를 위해 개연성을 무시한 부분도 몇 있고, 질과 콜린의 가족이 퀴어 운동에 연대하는 앨라이인 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이다. 애시의 서사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주인공 다섯 명 중 애시의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아쉬운 점 중 하나였다. 또한 리치, 애시, 질은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 퀴어 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그들이 대학교 수업, 특히 예체능 과정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가정 출신인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는 특히 더 계급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사족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2, 30대 퀴어 당사자들 중 상당수가 대학교 퀴어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거나 동아리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이 장면을 보니 흥미로웠다). 또한 '우파 게이'인 리치가 고향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것을 계기로 각성하고 진정으로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것은 극적 연출적인 요소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 현실에서는 리치와 같은 '우파 게이'들은 그냥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며, 연대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무시한 채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의 하루 안에 '잇츠 어 신' 같은 작품으로 약간의 환상과 드라마를 허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각본가인 러셀 T. 데이비스가 20대 시절에 경험했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1980년대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의 HIV 감염이라는, 가볍게 말할 일이 결코 아니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비극적이었던 주제를 마냥 슬프지는 않게, 커뮤니티의 일원의 시점에서 풀어나간다. 데이비스가 그려 낸 삶의 모습,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환상과 슬픔은 나도 어딘가 알아볼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퀴어 커뮤니티의 모습을 먼 훗날 우리가 이야기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말하고 어떤 감정을 설명하고 어떤 환상과 후회를 그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