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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연극 리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퀴어한- 연극 '13 후르츠케이크'와 '와이프'

by 행성인 2024. 3. 25.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뮤지컬에 이어 최근 연극을 보러 다니는 재미에도 눈을 떠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연극, 뮤지컬, 소설, 영화, 드라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퀴어 서사 작품을 찾아서 보러 다니며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평가하는 것에 취미가 들렸다. 이런 나의 작년 마지막 관극은 연극 '13 후르츠케이크'였고, 올해 첫 관극은 연극 '와이프'였다. 둘 다 퀴어 서사 연극이었고, 볼 계획이 없다가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충동적으로 예매했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거기다가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어서, 물론 두 작품 모두 공연은 끝났지만 몇 년 후에 다시 공연이 올라올 때를 대비해, 이 두 가지 연극을 비교하면서 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작품 모두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공존했지만, '13 후르츠케이크'는 한 번만 관극한 것을 후회했고, '와이프'는 한 번 정도 보면 딱 괜찮은 극이겠다 싶었다.

 

202312월의 어느 날, 친구를 만났는데 국립정동극장에서 상연하는 '13 후르츠케이크'라는 연극을 다음 날 보러 간다고 했다. 마침 찾아보니 티켓 할인도 나쁘지 않게 받을 수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서 예매하고 나도 같이 가겠다 했다. 드랙 아티스트인 '모어' 모지민 씨가 주인공 '올랜도' 역을 맡아 퍼포먼스를 펼친 이 극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 올랜도가 1960년대 미국 스톤월 항쟁 직전을 배경으로 자신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푸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인터파크에 뮤지컬로 분류되어 있었고 실제로 올랜도를 제외한 배우들은 노래를 부르지만 노래의 길이가 상당히 짧은 편인 데다 가사를 알아듣지 않아도 극 이해에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시각적인 퍼포먼스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뮤지컬보다는 음악과 노래가 사용된 연극 정도로 느껴졌다.

 

20242월의 어느 날에는, 마찬가지로 며칠 전 충동적으로 예매한 연극 '와이프'를 혼자 보러 갔다. 소녀시대의 최수영 배우와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가 연기한 문동은의 엄마 역으로 잘 알려진 박지아 배우를 간판 스타로 내건 이 연극은 소위 최수영의 ''이라고 불리우는 한 관객의 몰상식한 행동 때문에 말이 많았었고, 또한 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의 구성원들을 초청해 자문을 구했다고 알고 있었기에 더욱 호기심이 갔다. 개인적으로 최수영의 가수나 배우로서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느끼고 있었고, 박지아의 영상 매체에서의 연기에 큰 인상을 받았지만 연극을 보기 전날 친구에게 큰 기대를 하고 가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 기대나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극장에 갔다. 1950년대, 1980년대, 2020년대, 2040년대 영국의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퀴어들이 살아간 발자취와 현실, 그리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거리를 시사하는 극인 '와이프'는 헨리크 입센의 극 '인형의 집'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두 작품 모두 여러 시대의 퀴어 당사자들의 모습을 한데 묶어 진행시키는 극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서사를 진행시키는 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13 후르츠케이크'는 역사 속 퀴어 당사자들에 대한 서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며 자칫 유치해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이 다소 아쉬웠지만, 각각의 서사와 함께 펼쳐지는 퍼포먼스, 그리고 연기가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여 그런 유치함을 상쇄해 주었다. 특히 신라 혜공왕 대목에서 펼쳐지는 트랜스젠더 퍼포먼스는 연극이 아닌 하나의 커다란 공연 예술을 목격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게 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성별을 바꾸며 수천 년을 살아 온 인물인 올랜도로 하여금 작품의 서사를 진행시키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로 설정한 것도 참신하게 다가왔다. 올랜도는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부터 1960년대 미국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 왔지만, 작품의 주인공이나 중심 인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서사를 진행시키는 것은 올랜도가 만난 퀴어 당사자들이며, 이는 작품의 마지막에 세상을 향해서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한 스톤월의 퀴어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60년대이지만 내가 최근에 관극한 어느 작품보다도 현대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상상력을 기저로 진행되는 서사를 지니고 있다. 올랜도는 1960년대가 지나서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퀴어 당사자들을 만났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힘과 영감을 주었을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목격하며 기록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퀴어적인 기원과 서사를 지닌 올랜도가 1시간에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연 시작 전부터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실제로 시공간을 초월한 올랜도의 분장실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자칫하면 밋밋할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인 서사와 무지개 상징을 그 이상의 무언가로 탈바꿈시킨다. 대사 없이 몸짓과 연기만으로 거의 모든 서사를 진행시키는 올랜도 역으로 퀴어 당사자이자 드랙 아티스트인 모어를 캐스팅했다는 사실에서 창작자와 연출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이프'도 이미 존재하는 작품인 '인형의 집'을 주된 소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가부장제 안에 갇힌 여성의 해방을 다루는 '인형의 집'과 퀴어 당사자들의 서사를 다루는 '와이프'가 연결되어서 여성과 퀴어의 해방이 서로 단절된 아젠다가 아니며 아직도 투쟁하여 쟁취할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와이프', '아내'라는 단어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단지 '남성의 여성 배우자'가 아닌 '커플 내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주도권을 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사회적 통념이나 법 제도, 이성 배우자, 혹은 동성 파트너에게도 억압당하는 퀴어 당사자들을 조명한다. 한국의 연출가들과 배우들이 작품을 얼마나 타자화하지 않고 존중했는지와 별개로, '와이프'에서 같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여러 캐릭터는 시대를 막론하고 퀴어 담론 안에 근본적으로 같은 주제가 반복되며, 작품은 이 담론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 2040년대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 20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마지막 장은 이전 장면들과 달리 시대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 퀴어 서사에 대한 내용을 찾기가 어려웠고, 단순히 극을 끝맺는 역할만 하고 있기 때문에 딱 그만큼의 감흥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각 장의 시작마다 극 속 인물들이 창작하거나 관람하는 '인형의 집' 프로덕션의 변화에 따라 시대의 변화를 나타내는 연출은 신선하다고 느껴졌는데, 2020년 현대의 '인형의 집' 묘사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공감할 사람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각 장의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퀴어 서사에 익숙한 사람들이나 퀴어 당사자들에게 조금 식상하다고 비춰질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와 각 프로덕션의 연출적 역량에 따라 작품성 면에서 극의 성패가 갈릴 수도 있겠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퀴어 서사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줄 만한 작품이었으며, 퀴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는 '13 후르츠케이크'보다 조금 더 '안전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비단 퀴어뿐 아니라 어떠한 소수자 관련 서사라고 해도, 해당 소수자 집단을 최대한 존중하며 대상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는 일이다. 어쩌면 여기에 정답은 없을 수도 있다. 너무 직설적이어서 와닿지 않는 비유와 대상화나 타자화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극이라는 예술 장르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퀴어 당사자로서, 작년 말과 올해 초에 관람한 이 두 작품을 통해 관객이 작품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창작자들은 어떤 태도로 작품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앞으로도 퀴어함을 온전히 존중하는 퀴어 서사 작품이 한국의 연극계에 많이 찾아오고, 그런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13 후르츠케이크'가 하루속히 한국에서 두 번째 프로덕션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