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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문화 읽기] 쾌락의 열병, 커뮤니티라는 그을음을 따라 - 퀴어 미술 산보하기(2023년 5월)

by 행성인 2023. 6. 9.

*편집자 주: 해당 원고는 6월 2일 카카오톡의 규제 이후 이미지 수정을 거쳐 재발행했음을 알립니다. 접속에 어려움이 있던 점 양해구합니다.

 
 
남웅(행성인 미디어 TF)

 
 
올해 5월은 여느 때보다 퀴어 작가들의 전시가 눈에 띄었다. ‘퀴어 미술’은 여전히 분명하게 범주를 나누고 설명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전시를 하나하나 따라잡기 어려운 이유는 말할 수 있다. 그간 자리를 다져온 퀴어 작가들이 활동 영역을 넓히고 당사자성 너머로 주제를 확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굳이 자신을 성소수자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숨기지도 않는 이들도 많아졌다. 개중에는 굳이 당사자성을 드러내지 않거나 당사자 여부와 상관없이 퀴어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작업이 늘어난 경향도 눈에 띈다. 퀴어 관련 전시의 상당수가 기존 전시 홍보 채널보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바이럴 홍보하는 방식도 접근성을 어렵게 만든다. 요즘에는 서울 바깥의 국공립미술관과 갤러리를 비롯한 전시공간들에서도 퀴어 작가뿐 아니라 퀴어 이슈와 인권 의제들을 고려한 전시기획들이 자체적으로 기획되고 있다.
 
부지런히 따라가도 모자란 상황은 커뮤니티의 달라진 환경과 퀴어 미술의 위치를 체감케 한다. 상당수 작가가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경유하지 않고도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고,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상관없이 제 네트워크를 넓혀간다. SNS와 유튜브 등으로 커뮤니티가 재편되고 주류 시장과 퀴어적 재현이 연동하는 변화를 두고 굳이 운동의 영향력이 약화 되었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퀴어를 학습하고 정체화하는 이해와 감각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 운동은 어떻게 계속해서 언어를 갱신하고 접점들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물론 접근이 어렵다고 투정하듯 말하는 건 SNS와 담쌓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핑계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제는 관심 있는 공간과 작가를 팔로우하고 그들의 소식을 받아놔야 겨우 전시를 따라갈 수 있다. 계정은커녕 아카이브 하겠다고 만들어놓은 블로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면 냅다 발굴하고 찾아다닐 수밖에.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 스케치를 남겨보려 하는데, 어떻게 엮을지는 당장 직관적으로 떠오르지 않지만 일단 메모라도 해놓자는 마음이다. 호흡이 닿는 여러분과 산보나 같이 하자는 마음으로 쓴다.
 
(7년 전쯤 비슷한 제목의 글을 썼다. 강산이 변하는 동안 바뀐 건 무엇이었을까. (일단은 나이를 먹었고, 당시의 많은 공간과 동료들이 곁에 없다.) 커뮤니티의 ‘불야성’을 뒤로하고, 어디로 치솟거나 꺼질지 모르는 불길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불이 지나간 '그을음'을 따라 걷는다.)
 
 
몬킴, VIEW FROM MY WINDOW, 2023.5.14.6.11, 아케이드 서울
 
작가가 어떤 정체성인지 굳이 드러내지 않고(굳이 찾아보면 모를 정도는 아니다) 전시에는 퀴어의 ㅋ 자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전시를 끌어온 건 그가 담은 남자의 몸이 헤테로 여성의 미감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뭐랄까, 남자 아이돌 원호의 몸을 보고 저건 여자들 보라고 만든 몸은 아닌 걸 알겠다는 댓글의 느낌 같은 거라고 하면 공감할 수 있을까. (반박시 당신이 맞...을까?) 섭외한 남자 모델의 외양과 체형, 그들을 담는 작가의 눈을 살피면 적어도 그가 남자들을 성애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감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복합문화공간 AUFGLET 창업 멤버이자 대표로도 활동하는 몬킴(Mon Kim)의 전시는 20년부터 매년 새롭게 발행하는 NOWBOYZ 사진집의 다섯 번째 버전을 발행하면서 기획했다고 전한다. 사진집 시리즈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공통적으로 남자와 도시가 등장한다. 그냥 남자는 아니고, 짧머의 육덕진 근육남(이렇게 표현해야 맛이 난다)의 매끈한 몸을 주로 담는데, 과거 신체를 잘라낸 프레임에서 점진적으로 얼굴과 몸이 과감하게 등장하며 전체적인 몸을 담는 변화를 보인다. 이번에는 건물과 몸을 각각의 레이어 삼아 자르고 겹쳐낸 편집이 눈에 띈다. 몸의 심미성을 다루면서도 몸과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사진적 프레임과 편집기술을 운용하는 점에 그의 작업은 통상의 바디프로필 이미지와는 다른 질감을 갖는다.
 
전시는 액자를 창문 삼아 관객이라는 건물에 들어온 사람과 풍경을 담았다고 말한다. 바우하우스 이후의 모더니즘 건물과 젖은 매끈한 몸의 대비적인 톤 사이로 브루어 와이즐리의 의자와 같이 금속과 가죽의 미드센츄리 가구와 정물을 놓아 상이한 감각적 소재들을 연결한다. 전시한 작업이 대부분 흑백사진이라면 사진집은 컬러판이다. 손에 책을 쥐고 몸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몰래 보는 황색 잡지보다는 도심에서 조금 비켜난 리모델링한 낡은 건물에 네온간판을 단 피트니스클럽이나 라운지 같은 데서 땀 흘리고 운동하는 기념비 같은 남자의 몸을 보는 느낌이다. (건물과 남자의 몸을 연결하자니 조금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감상은 비슷한 남자의 몸을 찍으면서도 타투와 BDSM의 상황을 담는 타투이스트 원의 사진과도 비교 지점을 남기는데, 그건 이후의 작업으로 미뤄두자.) 사진은 건축적으로 단단한 몸과, 골격을 둘러싼 외벽이 단정하게 나이들어가는 빌딩의 미감을 견주거나 번갈아 보면서 비교할 수 있는 감상의 재미를 준다.
 
전시장은 그간 문래동에서 느껴온 축축한 금속의 느낌보다는 매끈하고 쾌적한 분위기가 감싼다. 예약을 받고 높은 입장료를 책정한 것도 쾌적함에 일조한다.(하지만 15,000원의 높은 입장료는 어떤 배경으로 책정한 것인지 궁금했다.) 평일에도 예쁘게 차려입고 방문한 관객이 많았는데, 모델들은 인스타에서도 수만 수십 만의 팔로워를 두고 있는 인기쟁이들이라 흥행력이 남다른가 싶다. (작가의 작업을 프랑스 파리의 팔레 드 도쿄의 ‘PARIS ASS BOOK FAIR’에 출품하는 것을 두고 이들이 하나같이 제 사진과 전시 소식을 포스팅한 것은 그저 작가와 모델의 형식적인 관계는 아님을 추측케 한다.) 
 
전시는 액자를 창문으로 삼아 사진 이미지를 창에 들어온 풍경으로 설명하지만, 작가나 관객의 창으로 들어온 만큼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풍경과 인물을 담았다는 표현 또한 어울릴지 모른다. 그것은 작은 구멍 너머로 벗은 남자들을 관음하게 만드는 장치에서 좀 더 설득력을 갖는데, 이는 게이 커뮤니티의 현재에도 닿는 모습이다. 그러니까 쉽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풍경으로 즐기고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은 인스타그램의 행복한 계정들을 보는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를 생각하면서, 저들의 몸을 갈망하고 향유하기 위해 저러한 몸이 되려는 부단한 노력을 이어가는 이들이 수두룩한 상황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이연숙 평론가가 〈진격하는 저급들 1장: 슬픈 퀴어 초상〉에서 동시대 퀴어의 슬픔을 이야기하며 남긴 문장, ‘세상이 바라는 행복이 투사된 자신의 몸 이미지와 그저 슬픔 주머니에 불과한 자신의 육체 사이에서 격렬한 디스포리아를 경험’한다는 내용을 붙여보자. 행복해지기 위해 몸을 가꾸고 소비생활을 넓히며 행복을 과시하는 동안 행복하지 않은 몸과 몸의 경험들을 숨기거나 배제한다. 혹은 행복을 추구하는 몸은, 언제든 불행할 수 있는 상황들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나에게 2020년 코로나 이태원 사태가 터질 때 팔로잉 해놓은 셀럽 게이들이 자기 계정을 하나같이 폐쇄한 상황을, 그런 중에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대책회의에 고맙다고 찾아온 이의 번듯한 외양이 우리네 활동가와 너무 달랐음에 놀랐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얼마 전 언론이 신나게 사용한 ‘마약환락파티’라는 워딩과, 경찰이 붙잡은 61명이 모두 HIV감염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두고 칼럼 담당자와 날을 세웠던 후과가 적잖이 남은 와중에 엠폭스 백신 주사 붓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저 매끈한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삼키고 싶지 않게 만든다.(그래 나 인권활동가다) 물론 제 불행을 전시해야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처지의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 몸과 취향을 전시하고 과시하는 이들이 언제 갑자기 고꾸라지거나 무너지기를 선택하고, 더러는 음지에서 수치와 능욕과 손상을 자처하며 이를 쾌락으로 전유하는 일군의 경향들을 떠올릴 수 있다. 행복해지거나 적어도 행복해 보이기 위해 만든 몸을 다시 수치와 고통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구겨 넣고, 이렇게 구겨 넣는 행위를 다시 쾌락으로 향유하는 이들을 만난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퀴어를 이야기하고 싶다.
 

 
'위계 없는 평등한 관계'라는 선언의 공허함을 모르지 않지만, 위계만으로 관계를 설명하면 관계의 복잡함을 놓치기 쉽다. 이내 시선은 모델의 등판을 화면 가득 확대하여 살갖과 사진의 입자가 같은 모양으로 형해화하는 이미지로, 구멍 밖으로 보이는 남자의 몸들보다 구멍을 보게 만드는 관음의 장치에 닿았다. 건물의 단단한 골격에 유비되는 몸들을 헤집고 그 속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의 사진은 이미 단단함을 헤집고 헤집는 시선들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하면서. 그 와중에도 손에 팔만 팔천 원짜리(할인가로 조금 저렴하게 구했지만) 사진집을 기어이 들고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몸을 삐딱하게 보겠다고 말하면서도 이미지에 매혹되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상황이 조금은 짠한 것이다.
 
 
2023 Anti-Freeze, 2023.4.28.-5.28, 합정지구
 
몬킴의 남자 몸들은 분명 허호 작가가 포착한 남자들의 몸과는 다른 모습이다. 합정지구에서 3인의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 《2023 Anti-Freeze》(2023.4.28.-5.28)에서 허호는 기존의 화면들보다 조금 큰 화면에 남자들의 몸을 그린다.

 

 
나이를 먹으며 살이 찌거나 탄력을 잃는 남자들에 주의를 기울여온 허호에게는 작은 혐의가 붙었던 것 같다. 관리와는 거리가 먼 중년 남자들을 계속해서 그리는 행위에 혐오의 정서가 있는 것 아닌지 말이다. 해서 누군가는 그가 중년 남자를 표현하는 방식을 비난했고, 나의 경우 궁금해서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이들은 당신에게 혐오와 조롱의 대상인가, 아니면 욕망의 대상인가.

 

작가는 인터넷 공간에 모여 시정잡배 같은 이야기들을 나눌법한 비슷한 남자들을 그림 안에 벗겨 내놓았다. 때론 직접 중년 게이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그들의 나체를 그리기도 했다. 사심을 담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건조한 피사체로 묘사하지는 않은 것 같은 결과물은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차라리 회화적이다. 어두운 배경에 얇게 채색된 형광과 파스텔톤 몸들은 못생겼다고만 말하기엔 부드럽고 성긴 양감으로 채워진다. 쳐지고 풍만해진 살을 굳이 숨기지 않은 중에도 살의 주름이 물감층 위에 엷게 휘도는 붓질로 제 결을 포갠다.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앉아있거나 이리저리 구르고 기어 다니는데 자신들의 기울고 쳐진 몸들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것이 혐오와 욕망 둘 다의 감정으로 대상화한 남자의 형상은 아닐까를 추측해보았다. 화면 속 남자의 몸들은 화면을 채우는 용적에 비해 그 밀도가 배경보다도 낮아 보이는데, 가벼워진 존재감만큼 거리를 느끼게 하는 형상들은 매혹과 조롱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이상한 감상을 남긴다.
 
종종 작가에게 욕심을 갖고 좀 더 큰 화면에 그리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몸이 커질수록 화가는 어떤 색을 올리고 붓의 흔적을 남길지 더 많이 고민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단지 기술적인 노동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몸을 둘러싸고 생기는 복잡한 감정을 조율하는 과정을 좀 더 치밀하게 숙고하게 만들지 않을까. 나이 들고 군살이 늘어가는 남자들의 몸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매혹당하면서도 대상화할지, 당신도 그러한 몸이 되어갈 것을 인지하게 되면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하여 붓을 든 손으로 어떻게 몸들을 쓰다듬거나 지워나갈지 계속해서 보고 싶다. 나이 듦과 나이 들어가는 이들이 갖는 욕망뿐 아니라, 이들을 향한 감정과 관계의 변화는 커뮤니티에서 나눠야 할 숙제기도 하지 않은가.
 
 
듀킴, I Surrender, 2023.4.29.-6.10, VSF Seoul
 
말하자면 몸은 언제라도 무너지고 쇠잔하며 손상되기 쉽다. 그런 중에도 몸들 사이의 협상은 대상이 되고자 하는 몸과 대상으로서 몸을 포획하는 행위의 상호 합의를 두고 미적 기준과 서로 간의 행위를 잇거나 단절한다. 개중에는 몸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나의 욕망이 당신에게 휘둘려질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고 전적으로 의탁한다. 아니, 그것은 주체적인 간계에 가까운데 차라리 주체적으로 포기하고 당신의 대상이 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는 표현이, 좀 더 적확하게는 내가 당신의 (성적) 대상이 될 테니 당신에게 책임과 노력의 몫을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선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상이 되는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쾌락, 몸이 개발되고 뇌가 녹는(‘뒷계’의 은어다) 정동을 관찰하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장치를 미적으로 고안하는 작업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 듀킴은 그 맥락을 영리하게 재조합하여 쾌락의 장치를, 그에 의해 사물이 되어버린 몸을,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제 몸과 마음이 확장되는 경험을 조형해왔다.
 
목사 아버지를 둔 게이(일단은 게이라고 불러본다) 작가는 스스로 비디에세머(BDSMer)라고 말한다. 그는 종교적 희생양 모티프를 빌려 제 몸을 제물로 바치는가 싶더니 아이돌로 부활하는 시나리오를 설계해왔다. 그 과정에 아이돌의 장신구와 응원봉이 각종 성인기구와 플레이 장비로 동기화된다. 바닥섭처럼 뭉개지고 망가지기를 자처하는 몸은 천사적 비전처럼 아이돌로 재해석된다. 판타지적 대상화를 계속 밀어붙이는 작업은 항문과 음경과 고환과 젖꼭지를 따로 분리하여 날개를 붙이고 집게를 집고 바늘을 꽂고 장식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왼쪽부터〈Total Praise〉, 〈In the Garden〉 

 
이번 전시 《I Surrender》에는 피스팅과 속박, 진공플을 연상케 하는 조형물을 전시했다. 가톨릭 건물의 창틀과 제단의 프레임을 빌려 그 안에 니플 집게와 음경-고환용 정조대 등 각종 기구를 연결하고 성감대의 신체들을 가져다 붙였다. 피스팅하는 두 손은 뱀이 되어 엉키고, 대리석 조각을 연상시키는 매트리스와 신체의 흔적이 어느 순간 진공팩처럼 공기가 빠지면서 몸의 윤곽이 바짝 드러난다. 엉덩이들만 봉긋하게 솟은 매트 한쪽에는 두 팔이 엉덩이를 벌리고, 이어진 다른 손은 반대쪽 엉덩이에 피스팅을 하고 있다.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몸을 조각적으로 접근한다면, 묶고 가두며 감각을 통제하는 기구들은 건축적 장식의 일부가 되어 그에게 수치와 능욕을 부과하여 주체적으로 자아를 포기하며 열리는 비전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 그렇게 몸은 부서지고 기구에 속박되면서 쾌락과 고통에 충실한 파편의 대상들이 되어간다. 속박의 창틀 바깥으로 우주적 비전이 렌티큘러 이미지로 아른거린다.
 
(어떤 것들은 그냥 조형적으로만 보이지 않아서 이쯤 되면 그가 자기 작업을 작품으로만 둘지, 다른 실용적(?) 기능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작가에 따르면 좋은 실리콘이 아니라 사용은 어렵다고 한다.)
 
 
강우솔, 임아진, ()응하는 몸, 2023.5.18.-6.1, 스페이스 미라주
 
2019년 듀킴을 비롯하여 박진희, 양승욱, 유성원(버섯) 네 명의 게이 작가들이 기획한 전시 《동성캉캉》이 열린 지 4년이 지난 지금, 게이 크루징을 담은 시각예술의 풍경은 당사자를 보다 시각화하는 모습이다. 그들이 참조하는 섹스와 BDSM은 종종 ‘뒷계’로 설명되는 음지의 계정들을 통해 전시되고 유통된다. 은밀해야 섹시해지는 행동들은, 장소에 틈입하여 음지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행한다.
 
을지로에 위치한 '스페이스 미라주'는 퀴어 정동을 탐색하는 작업을 선보인다고 소개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방 한 칸 크기의 공간은 흡사 밀실을, 외딴곳에 몰래 영업하는 일군의 장소를, 지척이 개발되며 파괴되는 풍경의 일부를 점거하며 불온함을 수행하는 한시적인 영토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두 명의 작가가 전시를 했다.
 
강우솔은 자신의 감각을 통제하고 속박한 채 홀로 야외에서 사진을 촬영한다. 듀킴이 BDSM의 조형적 요소를 부각하며 신체를 추상화한다면, 그는 사진을 통해 좀 더 노골적으로 제 몸을 전시한다. 공원에서, 공중화장실에서, 인적이 드문 건물과 도심의 사각지대에서 작가는 눈을 가리고 볼개그와 재갈을 문 채 스스로를 속박하며 '야노'(야외 노출)를 수행한다. 벌거벗겨진 채 감각을 차단당하고 묶은 몸은 어둠 속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외양을 사진으로 남기지만, 환영받지 않기를 바라며 수치스럽기를 자처하고 어쩌면 파괴되기를 불사하겠다는 표식을 벌거벗은 채 남기는 듯하다.
 
그의 작업은 자의식적인 노출을 전제한다. 물론 자의식의 실체란 수치를 자처하고 망가지기를 수행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도 안전은 보장되어야 한다. 설령 혼자 야노를 하고 이를 기록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모습으로 들키거나 들키지 않을지, 우발적인 상황의 부담은 어떻게 감수할지, 위험의 수위를 조율하기 위한 (내적) 합의의 과정과 그 규준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몸을 어떻게 속박하고 변형시킬 것인지, 그것이 어느 정도 추하고 수치스러울 것인지, 그만큼 어떤 미적인 형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 이를 성립시키기 위해 얼마만큼의 합의와 협상을 해야 하는가를 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파괴든 속박이든 스스로 대상이 되는 방식을 심화하는 작업과 몸의 문법은 홀로,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BDSM을 재현하거나 소재로 삼는 근간의 작업은 공공연히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고양될 수 있는 자의식적 표상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다만 이를 수행하는 공동체의 장치와 질서들은 배경으로만 삼거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언제 제대로 이야기 나눌 자리가 열리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소수자 운동은 얼마만큼 준비가 되었을지를 또한 가늠해본다. 그 와중에 재밌는 건 강우솔작가의 프로그램이었다. 이천구백 원(기억에 의존한지라 확실하지 않다)을 전시장 스탭에게 주면 벽에 붙은 사진 이미지를 보내드린다는 상시 퍼포먼스 〈경계선들-지지는 돈으로 하는 거에요.〉의 안내나, ‘단체플’이라는 이름의 작가 프로그램도 흥미로웠다. 제 욕망을 작가 프로그램으로 포개어내는 용기와 강단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작업만 있었다면 이 전시는 전형적인 BDSM 미감을 두른 자의식 넘치는 개인 사진전에 머물지 모른다. 흑백의 BDSM 작업들 반대편에 임아진의 드로잉이 빼곡하다. 검정 시트지로 벽을 채운 강우솔의 작업 반대편에 온갖 색상과 질감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도 그렇고, 속박과 구속의 작업 반대편에서 발산하고 배설하고 정념을 포효하는 여자 형상의 몸은 다른 성적 실천을 보여준다. 서로 뒹굴고 안고 키스하는 그림들은 근래 레즈비언 작가들에게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직접적인 표현이라 인상적이기도 했다.

 

전시 한쪽에 눈을 가리고 수족을 포박한 채 알몸을 노출한 이의 시선으로 사각지대를 조각내고 있다면, 다른 쪽에서는 몸의 구멍들을 보란 듯 벌리며 배설하고 상대와 스킨십을 나누고 몸 자체를 표출의 도구로 쓰며 배설하듯 그려내는 한 무리의 드로잉들이 대구를 이룬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서로 어우러질 생각이 없다는 듯 섞임 없이 대치중이다. 이 경계에는 어떤 비무장지대가, 어떤 회색지대가 펼쳐지고 있는가. 어떤 절충과 협상이, 또는 젠더 유동적 몸들이 오가고 있을까. 그것을 읽는 작업 또한 운동과 미술의 역할은 아닐까.
 
방명록을 쓰고 나오는데 그에게 꼬리를 붙잡혀 인사와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궁금해서 작가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KBS2채널 프로그램 '노 머니 노 아트'(2023)에 나와 커밍아웃을 했던 이력이 있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나는데, 어째서 커밍아웃의 장면이 항상 당황스러운 이슈처럼 연출되어야 하는지 생각했던 것 같다. 방송에서 소개된 회화들은 따뜻하고 사랑스러웠으며 그만큼 조금은 지루한 느낌도 들었다. 적당히 방송에서 검열이 되었겠거니 생각한다. 나는 작가가 되바라진 표현을 놓지 말기를 당부하면서도, 여기저기 소품처럼 성기게 남긴 드로잉을 큰 화면에 그려 전시하는 날이 오기를, 화면에 몸을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두 사람의 포옹이 감춘 상처와 가시와 구멍들을, 배설물과 욕지기들을,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장소와 사람들을 좀 더 시각화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남겼다.

 

 
사이먼 후지와라, Whoseum of Who, 2023.4.5.-5.21, 현대갤러리
 
은밀한 쾌락들이 혹여 밖으로 나오고 제도권 미술에 안착하게 될 때, 대개의 불온함은 담론과 미적 형식으로 길들여지고 가공되기 쉽다. 물론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주류화에 드는 비용과 섬세한 약속들을 비롯하여 제도권에 인정을 받고 안정적으로 전시되는 과정 또한 투쟁과 협상을 필요로 하며, 때로는 주류의 질서와 습속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퀴어 외국작가들도 적잖게 한국의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에 초대되어 전시를 진행한다. 예전만큼 작가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 화젯거리가 되지는 않는데, 그것이 '퀴어 당사자'라는 정보 값을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커버링적 태도일지, 퀴어의 위상이 어느 정도 제도 예술에 낯설지 않은 키워드의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일지는 좀 더 저울질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사이먼 후지와라의 국내 개인전이 10년 만에 열렸다. 당시 열린 아트선재센터의 개인전을 보고 행성인 웹진에 작가론과 리뷰를 남긴 적이 있다. 당시 전시가 기존 역사적 사건과 서사를 비틀거나 가상의 이야기로 변형시킨다면,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스토리를 부수거나 비우는 행위로서 회화작업에 집중한다.
 

 《Whoseum of Who》의 전시작품들과 전시 풍경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작가는 세계 자체보다는 세계에 연루된 나를 부수고 비운다. 전시에서 그는 캐릭터를 하나 설정한다. 쥐과 동물의 얼굴을 갖는 캐릭터 '후'(Who)는 누구도 아닌 자를 자처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없는 이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그는 미술사의 이런저런 사조들과 마티스와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 등 유명한 작가들의 필치를 차용하여 포즈를 취한다. 전시 제목에도 나오는 Whoseum은 누구(who)와 미술관(museum)을 합쳐놓은 말이다. 작가의 페인팅과 드로잉 감각이 좋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상황은 별생각 없이 볼 때 모든 것들을 가볍게 치환하는 오랜 미적 전략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는 기실 재현적 특권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어디든 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제도는 무엇일까. 누구도 아닌 태도는 딴지와 흉내, 패러디 등을 통해 기존 질서와 그 효과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실체의 무게를 증발시키는 역량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비워내고자 하는 지식과 담론, 사조에 대한 학습이 선제 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신작들을 보면서, ‘후’가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지만 그렇기에 누구에게라도 매력 있는 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반대로 어디서든 출몰할 수 있지만, 공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어디도 갈 수 없는 이들을, 그럼에도 ‘개망신과 수치심의 연속인’ 퀴어한 인생에도 (이반지하의 신간 『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에 나온 언어를 빌렸다) 웃음을 짓고 마는 이들을, 그들이 남기는 흔적과 언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래 나 인권활동가다 2)
 
 
리처드 케네디, 리처드 케네디: 에이시-듀시, 2023.3.16.-6.4, 전남도립미술관
 
비슷한 시간 전남도립미술관에서는 미국에서 태어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리처드 케네디의 개인전을 진행했다. 오페라와 댄스를 배우고 뉴욕에 건너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퀴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이어온 그는, 흑인 젠더퀴어 작가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예술작업을 수행한다. 베를린으로 건너가 시각예술에 집중하는 작가는 퍼포먼스의 결과물이자 퍼포먼스 자체로서 페인팅을 선보인다. 몸이 지나간 자리를 강렬하게 남기는 물감의 흔적이나 화면 위에 남긴 낙서들은 그의 몸과 퍼포먼스, 회화, 설치 작업이 그가 향유해 온 공동체의 장소와 문화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민권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면서 흑인 퀴어 커뮤니티의 톤과 매너를 종합 전통 예술 장르인 오페라로 연결하고, 퍼포먼스를 회화로 연결하는 삼십 대 작가의 개인전을 선택한 전남도립미술관의 한 수는 새로운 도약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프닝 당일 진행한 퍼포먼스 〈우유와 쿠키〉에서 작가는 제도권 교육에서 정해진 규율에 맞춰야만 했던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전시장을 오가며 풀어낸다. 흑과 백의 원피스를 입은 작가와 다른 퍼포머가 사과를 나눠주고 농구공을 두드리며 농구 골대에 몸을 넣었다 뺐다 하며 무용을 흉내 내고 소음을 음악으로 만든다. 리코더로 아리랑을 연주하는 지점에서는 한국에서 전시 첫날 종종 진행하는 살풀이 퍼포먼스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젊은 유색인 젠더퀴어 작가라는 타이틀이 이벤트 소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미술관이 지역의 다양성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떤 발언과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건 작가가 4만 8천여 명의 인구가 있는 작은 도시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맥도날드에서 일하면서 직장의 지원을 받아 춤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적어도 퀴어라는 자긍심이 발생하고 지지받기 위해서는 지역의 교육적 인프라와 소외된 이들의 투쟁과 공동체를 역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토양이 바탕해야 함을 새삼 느낀다.
 
 
《Bench Side》, 2023. 5.2- 6.10, d/p
 
물론 그런 토양이 없고, 대도시의 게토가 아닌 공간일지라도 쾌락의 연대는 발생한다. 설령 그것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일지라도, 쾌락의 운동장 바깥에 밀려난 먼지 같은 이들일지라도 말이다.
 
《Bench Side》는 권시우 미술평론가와 하상현 작가가 결성한 콜렉티브 QF에서 처음 기획한 전시다. 전시는 학창 시절 공놀이하는 이들을 먼발치에 보면서 가졌던 기억과 감정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게이 남자와 이성애자 여자가 남자를 대상화하는 방식과 그 조형성을 미션처럼 둔다. 퀴어를 앞세우지만 헤테로 여성 작가들(이 맞을 것이다)도 참여하는 전시는 특정 정체성보다는 시스젠더 남자들의 운동장에서 주변에 머물렀던 이들로 시선의 주체들을 설정한 듯하다. (소싯적 줄곧 했던 '벤남구'(벤치에서 남자 구경하기)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운동장을 헤테로 시스젠더 남자들이 점유하고 있다는 가설은 체육 부치가 들으면 다분히 코웃음 칠 일이지만, 일단 전시는 그런 상황을 전제한다.
 
운동장의 남자들을 대상화하는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에서 관찰하는 시선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땀 흘리며 뛰어다니는 남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거나 소외된 이들이 남자들을 관찰하며 시선으로 포획하는 접근은, 앞서 몬킴이 모델들과 동등한 관점으로 남자의 몸을 담은 것과 다른 기울어진 구도를 설정한다.
 
그렇게 전시는 남자의 몸을 조각적으로 부수고, 부서진 모습으로서 뼈대 없이 근육과 살 자체로 서 있는 속이 비어 있는 남자의 몸을 재구성한다(윤정의). 더러는 수직과 수평을 오가며 분리된 덩어리들을 나란히 병렬하고 흙덩어리 사이를 납작하고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를 사용해 분리하면서도 연결된 형상을, 감추려 해도 드러나 보이는 관계를 조형한다.(김민훈) 한편에서는 백조가 왕자로 변하는 동화 이미지를 프레임 삼아 장식적이고 서로 스킨십하는 남자들이 그려진 폼페이 벽화의 17세기 판화 이미지를 포개는데(이승일), 일련의 작업은 운동장 바깥에서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위계에 연루되면서도 시각적 우위를 확보하는 상황을 상정한 듯 보인다. 전시 소개를 참고하면 이러한 역전을 전면화하며 시선과 기울어진 감정에 여과된 '운동장의 패권남'들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대상화되는가를 살피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시공간의 거리를 두고 타인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진실과 실재가 구멍처럼 공백으로 드리운 자리에 주관적이고 우연적인 맥락들이 개입할 수 있고, 여기에 질투와 흠모, 응시와 욕망의 감정이 상이한 방식과 양태로 형상들을 분기해내는 것이다. 다분히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맥락을 어느 정도 소거한 조형성을 강조한 전시인지라 감각이 익숙하지 않거나 설명을 참고하지 않으면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퀴어적으로 읽어야 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 Bench Side 》 포스터와 전시전경

 
전시에서 흥미롭게 본 건 여성 작가들의 작업이었다. 퀴어 전시에서 이성애자 여자 작가들은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접근으로 작업에 임하지 않을까 하는 얕은 기대를 싣는 게 인지상정. 잠자는 남편 사진을 찍어 벽에 한가득 배치한 안초롱의 작업은 가장 가까운 이를 낯설게 보는 시도에서 나아가 관객으로 하여금 생판 모르는 남자 사람의 이미지를 벽에 붙여 (자기 남편에 대한) 친밀함이라는 낯선 감정을, (남의 남편에 대한) 낯선 감정의 친밀함을 극대화한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수염 난 건장남의 모습은 아시안 건장 게이의 스테레오타입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미감을 가지고 있는지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상한 감상이 들었다. 그것이 상이한 미감들 사이의 연대라고 한다면 당연히 비약일 것이다.
 
가장 오랫동안 둘러본 건 최고은의 조각이었다. 에어컨 파이프같이 겉으로 쉽게 보기 어려운 부속물들을 조각에 쓰는데, 예의 곡선을 살리면서 파이프를 갈라 다른 파이프와 포개며 곡선을 겹쳐놓는 조각은 우아한 역동성의 감상을 남겼다. 한동안 파이프들이 포개어지는 지점을 계속 들여다보았는데, 남성의 몸과 얼굴, 그들의 관계를 심미화하는 조형성은 재생산의 몸과는 다른 성애적 접근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련하여 BL물을 제작하는 이들의 관점이 잠시 스쳤다. 남자들의 관계야 사실에 기반하거나 합의를 했느냐 여부를 떠나 아름다우면 그만 아닌가...라는 태도 같은 것들. (아닐 수 있다)
 
관객들은 대상화되는 남성들을 조형하는 전시로부터 공차고 뛰어노는 남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역으로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찰하는 이들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를 또한 살펴야 하지 않을까. 관찰자의 연대를 전제하지만, 비단 이들이 모여 관찰만 하지는 않는다. 더러는 모여서 어떤 수작을 부리거나 저마다의 욕망을 섞을 수 있다. 간혹 운동장을 향했던 시선이 바깥에 나와 같은 자리에서 관찰하는 다른 동료를 향할 수도 있다. 더구나 같은 장소에 있을지라도 이들은 같지 않다. 단적으로 게이들의 퀴어적 실천과 이성애자 여성의 그것이 같은 제도적 선상에서 이뤄지는가. 혹은 같은 젠더의 위상에서 일어나는가. 이를 생략한 퀴어적 연대와 실천은 균질한 매끈함을 전제한 체 내부의 역동을 생략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이어가는 것이 공동체를 다시 읽으며 또한 공동체를 다시 그려나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상현, 홍민키,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 2023.3.24.-8.6, Soma 미술관
 
《flop: 규칙과 반칙의 변증법》은 스포츠의 규칙이 반칙을 통해 질서를 갱신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질서에 개입해서 비질서적 질서를 만들고 질서를 무용하게 하거나 무용함으로서 질서를 만든다는 점에 질서와 비질서 사이 퀴어적인 접촉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인상적인 배치는 홍민키의 〈Sweaty Balls〉(2023)에 이어 하상현의 작업이 이어지는 동선이었다.
 
〈Sweaty Balls〉는 ‘이반배구모임’을 주 소재로 삼는다.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배구모임은 게이가 공놀이를 싫어한다는 편견을 너무 당연하게 정면돌파한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앞서 《Bench Side》에서 구경하는 이들이 바라보는 공놀이가 그리 질서정연하거나 이상적인 몸들로 행해지지는 않았음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운동장에서 구경하다가 가끔 농구는 했다.)
 
그것이 일군의 퀴어 공동체 모델을 제시한다면, 하상현은 1:1로 대면하는 개인 스포츠에 집중한다. 그는 9년 전 자신의 졸업작품 〈Overcross〉를 다시 상연하는데, 퍼포머들은 펜싱과 복싱 장비를 각각 착용하고 코트 위에 오른다. 펜싱경기장과 사각링을 결합한 형태의 무대에서 이들은 각각의 종목이 취하는 공격과 수비 기술로 대결에 임한다. 퍼포머의 행위는 이종격투기처럼 상이한 종목들을 새로운 질서로 만들기보다 각 종목에 규정된 행위와 전술이 상충하면서 이상한 대결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 작가는 퍼포먼스 무대 외에도 영상 〈Count Apart〉를 통해 두 선수가 서로의 장비를 채워주는 장면을 삽입하면서 상이한 종목의 스포츠맨들이 조우하는 공간에 퀴어적 성애의 뉘앙스를 싣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비평의 단서는 있다. 펜싱과 복싱은 서로 다른 규칙과 목적을 갖는다. 검을 휘둘러 한 방에 찌르고 보내는 펜싱과 맨손으로 싸우는 복싱은 이미 동등하지 않음을 전제한다. 하여 펜싱 촉에 스티로폼 공과 테니스공을 꽂는 등의 변주를 주면서 불평등한 조건을 완화한다고 한다. 퍼포머들이 각 종목에 훈련된 남성들로 구성된 점은 상이한 종목을 상연하는 무대에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점은 퀴어적 성애의 뉘앙스를 열어내면서도 동시에 닫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표를 남긴다. 단적으로 그들을 훈련된 남성으로 삼은 것은 어느정도 안정적인 게임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형식적인 동성 성애적 뉘앙스를 부가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서로 다른 젠더 정체성의 인물들로 배치한다면, 또는 다른 체형의 인물을, 장애를 가지거나 인종의 구성을 달리해서 올린다면 둘의 대결은 그저 종목 간 차이로만 귀결될 수 없다. 이는 또한 승리해서 이겨야 하는 스포츠게임의 목적을 다분히 흐릴 수밖에 없는데, 신체적으로나 역량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이들은 그저 점수를 따기 위해 경기에 임하기 어렵고, 상대의 여건과 상태를 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는 조건은 그저 상대와 나만의 대결로 수렴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일련의 다양한 기울어짐을 배치한다면, 이 게임은 단순히 정반합의 시나리오를 취할 수 없으며, 승리해야 하는 게임의 규칙을 빗나가고 어쩌면 퀴어의 '평등한' 사랑이라는 매끈한 구절마저 깰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5월 21일 진행한 하상현의 〈Overcross〉 퍼포먼스 워크샵 장면과 홍민키의 〈Sweaty Balls〉 

 
이러한 생각을 안고 다시 홍민키의 이반배구모임으로 자리를 옮긴다. 커다란 수건을 스크린 삼아 영사되는 한 쌍의 배구공은 불알 두 쪽처럼 각각 그물에 걸린 채 나란히 늘어져 모임을 설명한다. 20대부터 50대를 아우르는 모임에서 이기고 지는 승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서로를 독려하고 응원하는 스킨십과 눈빛 교환, 리액션과 소통의 억양과 태도가 일상의 다른 모임들보다 자유롭다. 내레이션의 끝에서, 영상은 가장 나이가 많은 동료가 모임을 떠난 일을 언급한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오면서 자신이 모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모임을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사정이다. 여기, 기울어진 친밀함의 자리를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공동체는 다시 질문에 부쳐진다.
 
 
어떤 Norm(all), 2023.4.18.-8.20, 수원시립미술관
 
이 기울어진 친밀함을 가족으로 품은 전시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가족을 주제로 하는 전시 《어떤 Norm(all)》은, 여느 국공립 기관의 태도와 비교할 때 상당히 동시대의 경향을 섬세하게 짚어내고자 기획한 노력이 눈에 띈다.

 
전시는 이성애 정상 가족이 어떻게 유지하기가 어려운가를, 그럼에도 그 규범을 위해 어떤 배타성을 수행하고 있는지 살핀다. 그리고 그 바깥의 가족 모델을, 비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들을 다룬다. 지난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한 2020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가 담론적이거나 선언적인 접근을 보였다면, 여기서는 구체적인 가족의 시나리오를, 가족 구성의 다른 실천을 소재 삼는다는 점에 한 발 더 나가려는 면모가 두드러진다.

 

전시장에는 회화와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에 기반하여 가족 모델과 실천의 과정에 생기는 고착과 감정들을 예술 형식으로 드러낸 작업들을 배치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적 접근을 유도하며 기존 가족의 통념적 인식을 바꾸고자 시도한다.
 
지역 미술관에서 해당 주제로 작가를 섭외하고 주제를 구성한 것만으로도 의의를 부정할 수 없지만, 시종일관 전시는 관객들의 인식 변화에 집중하는 인상을 준다. 전시 마무리에는 다소 뻔하더라도 어떤 구조 변화나 제도적인 제안이 나올까를 기대했는데, 김용관의 추상 조각을 배치하며 다양성을 조형했다는 설명 옆으로 아카이브 자료들을 나열하며 기대에 대한 응답을 갈음한다.
 

《어떤 Norm(all)》 전시장 풍경과 업체eobchae의 〈대디 레지던시 웹사이트〉

 
전시를 통해 다양한 가족 모델을 알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전시 말미에 업체eobchae와 안가영은 재생산에 대해 가상의 모델들을 선보인다. 가상 페이지에 설립된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고르고 임신과 출산, 양육 과정에 함께할 아빠 레지던트를 구하는 업체eobchae의 공고나, 지구를 떠나 AI들이 일군 행성의 낯선 문화를 접하는 이들의 시나리오를 담은 안가영의 작업은 변화(또는 변화 가능성)를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더불어 사회와 공동체의 재해석보다는 인공지능 아래 산업화된 재생산 상품시장으로 미래를 부각한다. 기성 가족 체제에서 탈구하는 작업들은 사회의 역할을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불능성으로서 시장에 잠식당한 공동체의 오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부추기는 것이다. 하여
 
공동체의 불능으로부터 다시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전시장을 나오면서 문득 떠오른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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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퀴어미술 한 바퀴' 같은 스케치는, 도래할 가족의 미래와 제도적 인정의 가능성 속에서도 갖지 못할 매끄러움의 입자마다 박혀 있는 거절의 문화를, 만남의 문턱을, 취약한 여건을, 수치와 무너짐을 자처하는 이들을, 동류적 정체성 속에서도 상이한 젠더 표현과 유동성이 또 다른 관계를 만들고 있음을, 예의 불안정과 취약함에도 끊임없이 맺어지는 약속과 협상을, 같은 시간 출몰하는 약물과 질병의 이슈들이 관통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이는 만남과 만남을 갈망하는 몸들이 어떤 만남의 문법과 기준을 나누고 있는지, 만남을 지지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와 제도들은 무엇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몸과 몸들의 접촉을, 접촉의 양상과 강도를, 몸들이 다른 몸의 접촉에 어떻게 감응하고 다른 의미를 생성하고 탈구하는가를 다루는 것만큼 중요한 건 그것이 어떤 문화적인 습속과 체제 위에 만들어지는지, 어떤 몸들의 집합이 구성되는지, 여기서 배제되는 이들은 또한 어떻게 모여 공동체를 일구거나 망하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퀴어라는 우산으로 묶이거나 연대로 퉁치는 일이 무엇을 배제하는지 비평적으로나 운동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연대의 어려움과 사회적 불인정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격차와 만남의 빠그러짐에 대해서 나는, 당신은, 누구와 어디서 이야기하거나 투닥대고 있을까. 커뮤니티의 꿈을 아직 져버리지 않았다면, 혹은 져버렸을지라도, 그 끝에서 커뮤니티의 시작을 한 번 더 품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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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전시 중인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2023.4.25.-7.9)에 참여 중인 김재원 작가의 설치를 만났다. 전시는 참여 작가들의 작품을 독립적으로 전시하기보다 게임적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각 작가들마다 미션을 제시하는데, 이는 전시장의 동선을 재구성하고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전시공간을 일종의 방 탈출 게임으로, (설명 텍스트의 표현을 빌리면) ‘가상의 다리 밑으로서 도시의 회색지대로 펼친다.

 

김재원은 풍선에 HIV/AIDS 치료제 번호와 기호를 남겨 사람들에게 직접 불고 들고 다니도록 한다. 지역 특성상 학생과 아이들이 주 고객을 구성하는 전시장에 무리 지어 에이즈 치료제 모양의 풍선을 불고 들고 다니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진다. 풍선들은 한 때 치명적인 낙인으로 작동한 기호들을 무해한 게임 아이템처럼 전환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린다. 역시나 작가가 전시장에 설치했다. 찾기도 어려운 장소에서 전화는 수신인을 기다리며 벨을 울린다.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부단하게 무용한 신호를 보내거나 오해당하기 십상인 오늘의 퀴어 예술을 보는 것 같다고 쓰면 조금 억울한 기분도 들지만, 뭐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