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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사이먼 후지와라 개인전 리뷰 '스토리텔링의 즐거움: 부권질서의 해체를 통한 부자(父子)관계 다시읽기'

by 행성인 2013. 3. 13.

2013. 2. 2- 3. 24 아트선재센터 2층


웅 (동성애자인권연대)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에 아버지가 개입하여 사회적 질서와 규범을 심어놓는다는 서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일반적 내러티브로 알려져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근중심주의, 가부장제로 환기되면서 이성애주의의 가족과 민족, 국가와 문명의 골격을 이룬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근친상간과 동성애는 이성애 가족모델 아래 터부로 그려지며 부권의 ‘번식’을 강화하는 기제로 자리매김한다.

부권질서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규율함으로써 제도화되어왔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비판과 저항에 당면함에 따라 해체 또는 전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이먼 후지와라(Simon Fujiwara)의 작업 역시 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이번 국내 개인전에서 그가 보여주는 작업들은 근친상간 금기의 부권질서 속에서 아빠와 아들의 관계에 재접근한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82년생의 젊은 작가는 역사와 사회, 더불어 인류학과 고고학의 거시적 맥락을 픽션의 형식으로 비틀고, 그 속에 자전적 경험과 에피소드를 뒤틀린 방식으로 기입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자전적 요소에 이야기를 덧붙이고 특정 공간으로 연출하는 그의 작업은 건축을 전공했던 과거의 이력도 작용하지만, 스스로를 ‘이야기꾼’ 또는 ‘사기꾼’으로 소개하는 작가의 캐릭터에도 부합한다. 그의 특출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미술계에도 어필되어 다수 해외 아트페어와 비엔날레의 러브콜을 받았으며 수차례 수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처음 소개되었고, 이번 개인전으로 이어진다.

전시장에는 세 개의 설치작업들이 배치되어 있다. 설치된 작품들은 저마다 작가가 연출한 이야기를 구현하는 공간의 역할을 수행한다. 매 작품들에는 러닝타임이 20여분을 훨씬 웃도는 영상이 함께 배치되는데, 작가는 매 영상에 등장하여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되어 작업을 설명하는가 하면 극 연출자가 되어 배우들을 상대하기도 한다.


근친상간 박물관: 근친상간 한복판에 자리 잡은 아빠와 아들의 다형적 증식


전시장 전면에 관객을 맞고 있는 <근친상간 박물관(The Museum of Incest)>(2009)은 그간 작가가 보여준 고고학적 컨셉과 자전적 요소들을 교차시키는 대표적인 작업이다. 화면 속에서 작가는 20여 분간 고고학적 픽션을 ‘강연’한다.(그림 1)

작업은 탄자니아 올두바이(olduvai) 협곡에서 ‘최초의 인류’에 관한 조사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의 고민은 인류의 ‘기원’ 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인류가 번식하고 문명을 번영시킬 수 있었던 원인에 더 비중을 둔다. 척박한 환경 속에 고립된 씨족집단은 어떻게 민족을 구성하고 문명을 개화했을까, 라는 질문에 그는 동계교배 내지 ‘근친상간’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왼) (그림1) <근친상간 박물관>, 2009. 출처 http://www.designboom.com/art/simon-fujiwara/ 오른) (그림2) <근친상간 박물관> 전시공간, 혼합매체설치, 퍼포먼스와 가이드북, MUSAC Spain 설치전경, 2009, Private Collection Kortrijk, Belgium.


위의 문답을 기초로 작가는 조사지역에 ‘근친상간 박물관’ 건설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박물관의 공간은 고대와 중세, 근대 세 시기 별로 구획되어 각 전시장마다 시대별 근친상간의 흔적과 혐의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전시되는 사료들은 다음과 같다.


1. 고대 전시실: 고대 이집트의 모계사회에서 근친결혼과 동계교배가 풍습처럼 횡행했던 사료들이 배치된다. 어머니가 죽고 장녀에게 재산이 되물림 되면 돈 없는 아버지가 딸과 결혼하는 관습. 근친상간을 둘러싼 경제적 접근은 당시 남편과 아버지, 남매와 연인을 일컫는 단어가 같았던 어원적 사료들과 함께 진열된다.

2. 중세: 성서 속 소돔과 고모라 에피소드가 삽입된다. 불바다 속에 파괴되는 도시를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라는 신의 계시를 어기고 뒤돌아보다가 소금인형이 되어버린 아내를 대신하여 민족의 번식을 위해 아버지와 관계 맺었던 이들이 다름 아닌 딸들이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은, 성적 문란과 퇴폐를 피해 순수한 혈통의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선택한 관계가 근친상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3. 근대: 근친상간 등 성적 일탈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근대의 대표기관으로서 유럽 인권재판소가 무대로 연출된다. 그 위에서 당시 이슈가 되었던 근친상간 사건들이 재연된다.


흥미로운 점은 예시된 근친상간의 표본들이 공통적으로 ‘아빠와 딸’의 관계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근친상간 관계는 정상적인 ‘번식’을 비정상적으로 만들고, 수직적인 ‘계보’를 수평적 ‘그물망’으로 바꿔치기한다. 부권질서 아래 근원과 대지의 은유를 부여받은 어머니가 부재하는 가운데 법과 제도의 은유로서 아버지의 근친상간은 토대를 상실한 법의 탈주를 예고한다. 씨족사회의 단선적 서사를 갖고 있는 역사는 다형화된 소재의 파편들이 교차하는 ‘이야기’로 변형된다.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들은 다분히 작가의 ‘약장수’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 중 몇몇 치밀한 전략들이 눈에 띈다. 먼저 작업 속 공간연출이 그러한데, 근친상간에 관하여 수집된 자료와 발굴현장에서 발굴된 듯 보이는 유물들이 나란히 전시된 폐쇄공간은 흡사 발굴지역 캠프에서 열린 ‘사업설명회’의 분위기를 풍긴다(그림2). 개인적인 서사를 삽입하는 전략 역시 리얼리티 효과를 높이는데 한몫 거든다. 아버지가 70년대에 방문한 장소를 아들이 다시 방문했다는 이야기(그림4,5), 더불어 박물관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 아버지가 고안한 금붕어어항의 모습을 본 딴 것 역시 특기할 부분이다. 특히 어항의 경우 투명한 유리공 세 개가 삼각형으로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그림6 오른쪽 위), 이는 예전에 아버지가 금붕어의 기억력을 실험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른바 ‘초현대식 어항’이라고 불리는 오브제는 금붕어의 단기적인 기억력이 갖는 불연속성에 시대를 가로지르며 역사를 침식하는 근친상간의 단절적 성질을 교차시킨다.


위) (그림3) <근친상간 박물관> 설치 일부. 왼 아래와 가운데) (그림4,5) 'ancestral grave digg - a site survey for the museum of incest', <근친상간 박물관> 설치 일부, (Simon Fujiwara in 2007 and his father in the same place in 1970 ca.) image courtesy Simon Fujiwara. 오른 아래) (그림6) <근친상간 박물관> 유적 조사 진열대 세부, 2008, frankfurt am main, image courtesy Simon Fujiwara.


박물관 디자인의 정점은 세 개의 구 가운데 뒤집어진 유리 피라미드를 땅에 박아두고 바닥에 박물관 카페를 배치하여 그 벽에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설치한다는 계획에 있다. 아빠와 아들이 과거에 따로 찍힌 폴라로이드사진을 한 화면에 짜깁기해놓은 그림은 등장인물들을 이탈리아인으로 변형시켜 묘사한다(그림3). ‘혼혈인 작가’라는 ‘이질적’ 프로필이 분리의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섞어놓을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일까. 하지만 인종적 변형은 근친상간과 연결 지을 수도 있다. 근친상간이 역사를 가로지르고 있는 전시장 한가운데 부녀가 아닌 부자(父子)관계가 배치되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와의 관계대상이 딸에서 아들로 바뀐다는 것은 비정상적 ‘번식’을 인종적 변형을 포함한 다형적 ‘증식’으로, ‘근친상간의 예술적 판형’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다.

픽션과 다큐가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작품 속에서 작가는 에피소드의 사실여부를 힘들여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문명에 가려져온 근친상간을 전면에 내놓는데 집중한다. 어쩌면 작업의 메시지는 이렇게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관객)은 ‘터부의 산물’이다. 우리는 ‘근친상간의 후손들’이고, ‘근친상간의 욕망’은 어디에든 산재한다.”


재회를 위한 리허설: 상징적 부권 파괴를 통한 ‘아빠’와의 관계 재조정


근친상간과 그 욕망으로 도배된 작업에서 작가는 자전적인 부자 관계의 초상을 드러낸다. 이는 근친상간 금기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적대적인 경쟁자로 묘사되고, 부권질서를 공유하는 제휴적 관계로 설정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시 소개에는 작가가 일본인 건축가 아버지와 영국인 무용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가족력을 강조함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 보인다. 하지만 작업 속 아버지와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작업에 시각화되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인 사실만으로 관계의 접근을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터, 우리는 직접적인 관계 외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림7,8) <재회를 위한 리허설(Rehearsal for a Reunion (with the Father of Pottery)>, 2011-12, 혼합매체설치 및 퍼포먼스, Installation view at Dvir Gallery, Tel Aviv, Photo by Elad Sarig


<!--[endif]--> 부자관계가 픽션으로 반복되는 작업은 <재회를 위한 리허설(Rehearsal a Reunion(with the Father of Pottery))>(2011-12)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에는 일본에서 아버지와 재회한 에피소드가 다뤄지는데, 작가는 어색한 부자의 만남을 다도(茶道)와 도예 워크숍을 통해 좁혀보고자 시도했던 경험을 무대에 옮긴다. 무대 연출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작가는 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에게 작품의 구성을 설명한다(그림7,8).

경험을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는 이질적인 소재들을 개입시킨다. 먼저 작가는 백인 남성을 섭외하여 일본인 아버지 역할을 부여한다. 인종적 ‘크로싱’은 도예 워크숍의 한가운데 아시아에서 생활했던 영국의 대표적 도공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과 동질화하는 지점에서도 반복된다.

이어서 작가는 배우에게 실제 에피소드에 없는 행위를 요구한다. 바로 리치의 도자기 컬렉션을 함께 부수도록 하는 것이다(사실 그가 아버지와 만든 도자기는 버나드 리치 컬렉션의 ‘모방품’이다). 배우는 왜 이 비싼 걸 부수냐는 식으로 못마땅해 하지만, 작가는 이상적 비전의 그늘에 갇혀있을 수만은 없다고 답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의 개별적인 경험, 개별적인 비전에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원본을 파괴함으로써 복제물의 가치를 격상시킨다. 이는 당대 도예의 ‘대부(大夫)’가 차지하는 이상적 가치와 상징적인 위계질서를 파괴함으로써 현실 속 ‘아빠’와의 개별적인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질서를 파괴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살린다는 취지는 흥미롭게도 아버지를 죽인 형제들이 아버지 법의 계보를 잇게 된다는 부권질서의 오랜 전설과 반대의 성격을 갖는다. ‘아빠’와의 ‘만남’은 ‘아버지’의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혹은 질서를 변주하는 역설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관계의 복원을 위한 파괴의 극단적 실천’인 셈이다. 아버지에 대한 보편적인 트라우마를 ‘서구적인 것’으로 선 긋는 영상 속 작가의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작업은 근친상간 금기가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폭로하고 현실의 부자관계를 재고하도록 한다.


(그림9) <문버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08-10.


문명과 터부를 교차시킴으로써 아빠와 아들의 요원한 관계를 밀착시키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은 (이번 전시에는 선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는 <문버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Hotel Munber)>(2008-10)에서 보다 극적으로 선보여진다(그림9). 작업은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말기 카탈루냐 지방에서 호텔을 하던 부모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작가는 성적 억압이 횡행하는 그 시기에 유색인종 동성애자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하면서 당시 호텔을 운영했던 일본인 아버지에게 자신을 투사한다. 그 결과 작가의 아빠는 게이업소 사장으로 둔갑한다. 이른바 ‘게이아빠’는 성적 억압의 시기 동성애적 욕망을 호텔에 이식하는 기괴한 인물로 변신하는 것이다. 설치물 곳곳에는 성적 암시를 풍기는 알레고리들이 배치되고 포르노 이미지들이 장식된다. 게이아들이 아버지를 게이로 만들어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실천은, 그 시기 극단적인 부권질서를 휘둘렀던 프랑코 정권의 퀴어적 전유로도 해석된다. 극단성이 도를 넘어 외설적으로 부각됨에 따라 부권질서는 근친상간의 뒤틀린 버전으로 각색되기에 이른다.


배우와 작가, 거울단계의 분열 속 열리는 서사의 가능성


그의 작업 컨셉들은 한편으로는 유머를,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전복적인 성격까지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업이 연극의 형식을 빌릴 경우 상황은 쉽지 않다. 배우를 상대하게 될 경우 원본을 파괴하라는 작가의 요구는 쉽게 이해되거나 실현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전 설득의 작업이 필요하다.

연극무대를 차용한 설치에서 배우를 대하는 후지와라의 모습은 진지하다 못해 사뭇 긴장감이 감돈다. 종종 설득에 실패하는 모습을 띄면서 ‘마지못해’ 연출자의 권위에 의존하여 연기를 지시하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따라서 꼼꼼한 감상을 위해서는 작가와 배우 사이의 입장차, 그들 사이 거리와 역학관계까지도 읽어낼 필요가 있다.

<거울단계The Mirror Stage>(2009)에서 그는 11살의 네덜란드-중국 혼혈의 소년배우를 섭외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재현하도록 한다. 배우에게 작가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빙의’시키기 위해 그는 세인트아이브스(St. Ives)에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들려준다.

세인트아이브스에 테이트갤러리가 들어서고 영국화가 패트릭 헤론(Patrick Heron)의 전시가 개최되었을 때, 후지와라는 처음으로 헤론의 <수평의 스트라이프 회화: 1957, 11- 1958, 1(Horizontal Stripe Painting: November 1957- January 1958)>(그림10)를 접했다고 전한다. 붉은 색 계열과 흰색, 푸른 색 물감들이 줄무늬를 이루는 추상회화작품에 대해 작가는 ‘몸(물질)이 배제된 채 색면만 존재했다’고 회상하며 작품을 대면한 직후 스스로 추상화가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뒤이어 순수한 색들만이 존재하는 추상회화와 마주했을 때 말을 잃고 ‘눈이 아닌 발기된 음경으로 그림을 더듬었다’고 술회하면서 그림 앞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던 경험을 소년에게 들려준다. 소년은 작가의 경험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그의 연출을 수행한다(그림11,12).


왼) (그림10) 패트릭 헤론, <수평의 스트라이프 회화(Horizontal Stripe Painting)>, 1957년 9월– 1958년 1월. 가운데와 오른) (그림11,12) <거울 단계(The Mirror Stage)>, 2009, 혼합 매체, 비디오, 27분 41초. Photo by Marcus Lieberenz.


<거울단계>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개념을 차용한 작업이다. 라캉에 따르면 아이는 거울에 비쳐진 온전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 과정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지만, 동시에 거울의 나와 실제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거울단계는 개별적인 자아가 구성되는 과정 자체가 애초에 분열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이는 추상회화를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경험이 소년배우에 의해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기억은 반복되어 재현되지만, 기억은 당시의 온전한 의미까지 반복할 수 없다. 앞서 백인 배우가 작가의 아버지일 수 없었듯, 소년배우는 어린 시절의 작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추상회화를 보고 동성애자임을 깨달았다는 작가의 경험을 온전히 옮겨낼 수 있단 말인가.

재현은 타자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과정 속에서 수행된다(참고로 이 작품은 다른 전시에서 <양치기소년(The Boy Who Cried Wolf)>으로 직접 상연되기도 했다). <거울단계>에서 어린 시절 작가로 연기하는 소년이 작가가 될 수 없듯이 부자관계를 재조명하는 시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근친상간이 암시하는 화해와 위반의 의미에 ‘거울단계’의 렌즈가 개입하면서 근친상간에 함의된 ‘위반’의 의미는 분열된다.


근친상간의 삼각형을 거꾸로 읽어나가는 ‘이야기’의 역량


후지와라의 작업은 자전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부권질서와 근친상간의 개념들을 탐구한다. 그의 스토리텔링 전략은 상징언어를 해체하는 탐구의 결과로 나타난다. 작가는 부권질서를 해체하고 남겨진 아버지와 관계의 잔여들을 그러모아 재접합한다. 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삼각형’ 속에서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딸’을 누락시킴으로써 탈-생물학적 증식을 야기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아버지-어머니-아이가 그리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닫힌 삼각형’이 부권질서 아래 고립된 순환의 역사를 그려나간다면, 작가의 작업은 개입과 해체, 위반과 분열의 열린 구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하지만 그의 전략은 다시금 ‘자전적 이야기 팔이’ 전략으로 수렴된 채 픽션의 유희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체제의 위기 속에서 개별 기억에 침잠하고, 개인 가족으로 후퇴하는 시류에 편승하면서 거시적 질서를 뒤틀린 채 소비하는 전략으로 해석될 우려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픽션화할 뿐 아니라 무대에 옮겨놓는 작가의 전략은 일종의 ‘거리두기’를 이끌어내는 명민함을 보여준다. 작가는 자신의 무대에 제3자로서 배우를 배치하여 그가 자전적 이야기에 끝없이 맴도는 것을 경계토록 한다. 자서전적 과거와 현재 무대의 시차에서, 그리고 작가 개인과 작가를 연기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열은 규범을 해체하는 위반의 고립적인 자아도취, 주체의 자기만족적 지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이후의 서사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는 그의 작업을 만만히 볼 수 없는 이유이며,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작업을 지켜보는데 따르는 즐거움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