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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퀴어 유토피아를 찾아서 -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연작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by 행성인 2012. 11. 30.


김경태(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이 세상의 지도가 유토피아라는 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도를 들여다볼 가치란 전혀 없다."

- 오스카 와일드


이송희일 감독은 일찍이 <후회하지 않아>(2006)에서부터 ‘퀴어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대도시의 게이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수민(이영훈)’은 시골 고아원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개울가에서 고아원 동생과 나체로 유영을 즐길 수 있었던 그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계급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왜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대도시를 떠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돈을 필요한 만큼 충분히 모으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이미 ‘돈의 맛’, 즉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과연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게이들에게 있어 유토피아가 지닌 의미를 짚어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토피아는 공간적 차원뿐만 아니라 ‘현재와의 단절’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는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는 ‘아직 여기에 있지 않음’이라는 미래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게이들에게는 이중의 불가능성이 미래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미래에도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자본과 그에 따른 계급 착취가 불가피하다는 부정적 전망이다. 그리고 미래가 담보하고 있는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 즉 이성애규범적 미래성과 게이들의 삶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보다 근원적인 전망이 있다. 재생산에 기반한 미래는 온전히 아이들 것이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게이들에게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델만에 따르면, 이처럼 ‘미래 없음no future’은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핵심을 이룬다.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남쪽으로 간다>

 

‘미래 없음’의 태도는 이송희일 감독의 최근 퀴어 연작인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의 주인공 게이들에 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백야>에서 퀵서비스를 하는 ‘태준(이이경)’이 번개로 만난 승무원 ‘원규(원태희)’에게 자꾸 지구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욕망하는 것도 미래를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들이 비로소 제대로 된 섹스에 돌입하게 된 계기 역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을 던진 후이다. 죽음을 앞둔 섹스 속에서 그들은 절정의 쾌락에 도달한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는 고등학생인 ‘상우(한주완)’는 담임교사 ‘경훈(김영재)’을 귀찮게 쫓아다니며 그에게 ‘오늘 하루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쪽으로 간다>에서는 군인 ‘기태(김재흥)’은 휴가 복귀를 거부한 채 자신이 게이임을 부정하는 옛 선임병 ‘준영(전신환)’에게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섹스’를 요구한다. 이들은 모두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조급하게 사랑을 갈구한다. 여기에는 죽음충동이 늘 도사리고 있다. 미래를 부정하고 과거에 연연하는 이송희일의 영화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조차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이제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게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회하지 않아>의 수민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단순히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의 개울가라는 공간이 아니라 ‘어린 시절’이라는 시간성이 더 중요한 의미를 띤다. <백야>의 태준이 게이들이 살기 좋은 북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동경하는 것도 그곳이 ‘인류의 기원’이라는 태곳적 시간성에 근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쪽으로 간다>에서 기태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남쪽’이 끝까지 익명의 추상적 유토피아로 남아있는 것도, 과거 기태와 준영이 부대 안에서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만 진정한 가치를 지녔다는 시간성의 부각을 위한 것이다. 결국 <후회하지 않아>에서 수민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근거는 과거로의 회귀가 지닌 불가능성에 있다. 게이들에게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곳은 ‘아직 여기에 없는 곳’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있었던 곳’이다. 즉 부지불식간에 이미 사라져 버린 곳,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볼 때, 이송희일의 퀴어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사랑과 갈등은 나르시시즘적 특징을 띤다. 한 남자에게 있어 그보다 어린 남자는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다가와 자신을 유혹한다. 적극적으로 동성애적 욕망을 드러내는 그 ‘과거의 나’는 그것을 감추고 억누르는 ‘현재의 나’에게 있어 달콤하지만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것이 동성애적 욕망을 가시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욕망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안에서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에게 있어 과거의 그 노골적인 유혹에 응하는 것은 동성애를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과거로의 회귀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 과거의 나에게로 돌아가면 유토피아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상우의 집요한 구애와 협박에도 경훈은 끝까지 그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것도, <남쪽으로 간다>에서 기태가 준영을 납치하면서까지 사랑을 갈구하지만 기태가 마지막까지 함께 남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백야>에서 태준이 원규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지만 원규가 끝내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그 나르시시즘적 사랑이 지닌 현실적 한계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들 사이에는 섹스만이 가능할 뿐이다. 과거를 회상할 수 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그 어딘가를 유토피아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게이들은 영원히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까? 이송희일은 퀴어 유토피아의 재현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타협점을 찾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재와의 단절을 넘어 시간이 완전히 정지된 곳에 유토피아가 있다. 그런데 그처럼 확장하고 생성하는 시간성의 부정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과 닮아있다. 죽음충동 자체가 유토피아적 열망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송희일의 죽음충동에 대한 집착과 변주는 교착상태에 빠진 퀴어 유토피아의 형상과 일별하기 위한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는 정지된 시간을 포획하며 퀴어 유토피아의 오랜 흔적을 찾는다.


그의 영화들 속에서 유토피아는 순간적으로 출몰했다 이내 사라진다. 그것은 시간의 정지라는 환상의 도입으로 출현하는 유사 유토피아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경훈은 한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 위에서 상우가 씌워준 헤드폰의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빌딩숲과 한강 위의 대교를 응시한다. 그가 듣는 음악에 맞춰 대도시를 분절한 일련의 몽타주 시퀀스가 한동안 화면을 채운다. 한편 <백야>에서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태준과 원규가 공원 위의 공중 화장실에서 ‘지구의 종말(시간의 소멸)’을 가정한 채 하는 격렬한 섹스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벗어나 화장실 내부를 훑고 지나가 창밖의 눈 내리는 밤풍경을 잠시 관조한다. 이상에서 감독이 포착하려는 것은 현재와의 단절이자 정지된 시간이다. 그 시간의 소멸 안에서 유람선과 공중화장실도 유토피아로 둔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퀴어들에게 감독이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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