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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재경의편지조작단10

아홉 번째 편지 넌 늘 전 연인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정확히말하면, 전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지. 난 늘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어. 그냥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주말이면 정오가 되도록, 낮게 코를 골며 자는 그 사람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말하지 못했어.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와 나는 오 년을 만났어. 우리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나왔지. 내 대학교 졸업앨범을 보면,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무척 친했던 사이 같은데 왜 한번도 본적이 없느냐고 물었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할 수가 없잖아. 너에게 전 연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 그냥 이제는 싸워서 더 이상 보지 않는다고 .. 2013. 10. 22.
여덟 번째 편지 넌 옆에서 잠을 자고 있어. 나는 지금 술에 취해 있고,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있어. 난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 남은 집에 돌아오기 싫어서 이렇게 밖에서 술에 취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는데 말이야. 미안해, 지금 네 머리에 놓인 베개를 치우고, 내 팔을 베게 하고 싶지만, 술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네가 깨버릴거야. 게다가 잠투정이 심한 너는 아마 다시 화를 내버릴지도 몰라. 화를 내지 않는 지금의 너를, 조금 더 보고 싶어. 넌 사흘째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어. 처음에는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다가, 나중에는 답답해서 내가 도망가버리거나 큰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했어. 혼자 안절부절하다가 밖으로 나가버린거였어. 미안해, 난.. 2013. 9. 5.
일곱 번째 편지 재경 (동성애자인권연대) 음악을 듣고 있어. 아마 네가 옆에 있었다면, 나는 이어폰 한쪽을 빼서 네 귀에 꽂아줬겠지. 그러면 너는 책을 읽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을 거야. 곡이 끝날 때까지, 나를 바라보았겠지. 천천히 희미하고 환하게 웃었을 거야. 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희미한 미소였어. 아마, 네 이름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미소 만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넌 절대 환하게 웃지 않았거든. 그 희미한 웃음만으로도, 난 그저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널 내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어. 너에게 환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나라면, 나여야만 한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었어. 그게, 너에게 갖는 마.. 2013. 7. 18.
여섯 번째 편지 당신은 비가 오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었죠.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당신은 수업을 하다가 말고 창밖을 쳐다보았죠. 설레는 표정이었어요. 그때 오래도록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이 바라보던 창가 맨 앞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는 것도, 당신이 빗소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기 위해 창문에 가까이 오는 순간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는 것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도.한 번도 당신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요. 꿈에서 늘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이름 뒤에 습관처럼 붙어 있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지워보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지워지지 않았어요. 당신의 이름 뒤에 중얼거리던 나의 마음도 지워보려고 했어요. 당신도 지우려고 했는데, 지워지지 않았어요.그래서,.. 2013. 5. 30.
다섯 번째 편지 오랜만이야,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우린 어제도 만났었지. 어제도 함께 만나서 술을 마셨지. 미안해. 언니와 웃고 떠드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제 즐거웠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어. 언니와 다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는 이 말을 꼭 해야할 것 같았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많다고 해서 서로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가 매일 아침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사실을 언니는 알고 있지. 그래서 아침에 만날 때면 언니는 아메리카노를 내밀잖아. 내가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걸 좋아하는 걸 알잖아. 그래서 늘 언니는 내가 맥주를 마시면 담배를 내밀잖아. 하지만, 아메리카노 첫 모금을 마실 때 어떤 느낌인지, 클럽에 가서 맥주 한모금과 함께 담배를.. 2013. 2. 5.
네 번째 편지 나에게 왜 이곳에 왔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 만을 보았어요. 바닥에는 보풀이 일어난 빨간 카페트가 깔려 있었죠. 선생님이 내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연습실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내가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만 가득했죠.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죠. 무슨 단어를 쓴다고 해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이곳에 온 내 마음을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니깐요. 아니, 그 반대였어요. 입을 열기 시작하면 수많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어요. 이곳까지 달려오는 지하철 안, 마을버스 안에서 나의 마음은 그랬어요. 버석거림, 삭막함, 외로움. 누군지 대상도 명확하지 않은 그리움이 가득차서, 비쩍 마른 쭉정이처럼 흔들거렸어요. 이렇게 비가 .. 2012. 11. 30.
세 번째 편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캔맥주를 꺼내면서 말씀하셨죠. 어른이 되었구나, 우리 딸, 축하해. 엄마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여자의 집에서는 올해 안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에 있는 남자들이 모두 죽는다는 점괘를 받았다고 해요. 그 마을에서 가장 용한 점쟁이에게 말이죠. 여자의 집은 난리가 났더랬죠. 사대 독자가 죽고 나면 누가 집안을 이끌어 가겠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동네에서 결혼하지 않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했어요. 여자는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해야 했죠. 남편에게는 늘 숨겨둔 애인이 있었고, 여자는 울면서 집을 지켰다고 했죠. 옷장에 여행 가방을 싸둔 채,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도망가지 못하고 그 집에서, 남편은 여전히 집에 들.. 2012. 9. 25.
두번째 편지 두 번째 편지 미안해. 제육볶음을 먹으면서 네 생각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미안한 것은 아니야. 제육볶음과 내가 좋아하는 체리 사이의 거리만큼, 너와 나 사이의 거리에 대해서 생각하는거야. 그래서 미안한거야. 그 마음 때문에,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면서 잠시 울었어.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어.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네 핸드폰 번호를 일곱 자리까지 누르다가, 종료버튼을 눌렀어. 도저히 너에게 전화할 용기 따위는 나지 않았어.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알기 시작했더라? 아마 고등학교 시절부터였을 거야. 네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다가갔거든. 그게 뭐였는지, 어떤 이유였는지도 모른 채.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이었어. 반갑게 손을 흔드는 나.. 2012. 8. 2.
첫 번째 편지 오랫동안 망설였어. 이 망설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거야. 하지만 그 시간동안 내가 생각했던 건 너뿐이었어. 울면서 사랑한다 말하던 나에게 바보같다, 고 말하던 그 목소리와 편지함에 들어 있던 너의 편지, 그 안에 적힌 너의 손글씨, 너의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어질러져 있던 책상과 침대 위, 부끄럽게 웃던 너의 웃음. 나는 늘 울고 있었어. 처음 잔디밭에 앉아 음악을 깔깔대던 때부터, 아니, 내가 너와 짝이 된 후, 친해지지 못하고 늘 보고만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울음은 어느 날은 기쁜 것이기도 했고, 슬픈 것이기도 했지. 어떤 날은 그 둘을 구별하지 못했어. 나의 울음은 늘 중구난방으로 흘렀어. 너에게 처음 장미꽃을 건네던 날에도 그랬었지. 열다섯밖에 안 된 내가 무슨 생.. 2012. 5. 3.
재경의 편지조작단 공지 술자리에서, 카페에서, 직장에서 마음에 드는 그/그녀에게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 살포시 전해주고 싶었는데, 편지를 잘 못쓰시겠다구요? 걱정 마세요! ‘재경의 편지조작단’에서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멋진 편지를 써드립니다. 친구와 그/그녀와 싸우고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구요? 차마 ‘미안해’ 세 글자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구요? 걱정 마세요! ‘재경의 편지조작단’에서는 10년간의 편지 대필 경력으로 다져진 솜씨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과편지를 써드립니다. 주저 말고 사연을 보내주세요! 사연 보내실 곳: hydo48@gmail.com 웹진기획팀 재경 2012.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