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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재경의편지조작단

일곱 번째 편지

by 행성인 2013. 7. 18.


재경 (동성애자인권연대)



음악을 듣고 있어. 아마 네가 옆에 있었다면, 나는 이어폰 한쪽을 빼서 네 귀에 꽂아줬겠지. 그러면 너는 책을 읽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을 거야. 곡이 끝날 때까지, 나를 바라보았겠지. 천천히 희미하고 환하게 웃었을 거야. 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희미한 미소였어. 아마, 네 이름을 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미소 만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넌 절대 환하게 웃지 않았거든. 그 희미한 웃음만으로도, 난 그저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널 내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어. 너에게 환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나라면, 나여야만 한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었어. 그게, 너에게 갖는 마지막 마음이라고 생각했어. 


넌 참 신기했어.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고, 아들처럼, 딸처럼 엄마와 늘 함께 다니고, 부모님과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고,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았지. 네가 누구를 만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로, 친구들과 가끔 술을 마시고, 밥을 먹었거든. 어딜 가나 네 주위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어. 너는 나를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사람들을 만났어. 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이야.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누구에게 마음을 품는 지를 알기 시작할 때,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 난 늘 슬펐어. 친구들을 만날 때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고,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멈췄지. 친구들은 날 이상하다고 말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어. 늘 외로웠어. 


그래서 내가 선택한 삶은, 말하는 거였어. 내가 마음에 누구를 품고 있는 지를 말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거든. 그러면서 세상과 맞설 용기를 가지게 되었어. 나와 같은 사람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조금은 깨닫게 되었거든. 조금씩 슬픔이 사라졌어. 외롭지도 않았어. 행복했어. 행복할 수 밖에 없었어.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옆에는 네가 있었으니까.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


너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댔지.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 울면서 말했다고 했지. 어머니께 긍정도 부정도 못했다고 말했어. 너는 울고 있었어. 


누군가 그러더군. 아름다운 것들은 빨리 사라지고, 세상에 남는 것은 우리처럼 추하고 늙은 것들 뿐이라고.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날, 그 말을 생각했어. 그 말을 중얼거렸어. 네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어.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어. 아니, 이미 사라져버렸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을 때, 네 대답은 그거였어. 나와 헤어지겠다고,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너 하나를 설득할 수도, 네 마음을 치료할 수도 없었어. 함께 싸워주겠다는 내 말을 들으면서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네가 무슨 일이 생겨도 곁에 있겠다고 말했는데도,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용기는 세상에서는 필요가 없는 거더군. 너와 전화를 끊고, 하루 종일 누워서 하늘을 보았어. 무척 맑았어. 여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창했지. 조만간 장마가 시작될 거라고 했는데, 하늘의 어떤 것도 장마가 시작될 징조는 보이지 않았어. 장마가 시작되는 대신,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보다 더 작아진 나에게, 용기 따위는 사라져버린, 입이 있어도 네 대신 어떠한 목소리도 못 내는 나에게 중요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고, 너와는 이별을 했어. 너에게 가장 환한 웃음을 주고 싶다는 내 마음 따위는 이제 필요 없는 게 돼 버렸지. 


괜찮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핸드폰에 저장돼 있는 네 사진을 하나도 지우지 않았어. 그대로 가지고 있을 거야. 아마, 내가 어디에 있든, 언젠가 나를 만나게 되면 넌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보여줄 테니까. 내가 그렇게 세상을 만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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