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편지

Posted at 2013. 2. 5. 11:03// Posted in 회원 이야기/재경의편지조작단


오랜만이야,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우린 어제도 만났었지. 어제도 함께 만나서 술을 마셨지. 미안해. 언니와 웃고 떠드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제 즐거웠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어. 언니와 다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는 이 말을 꼭 해야할 것 같았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많다고 해서 서로의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내가 매일 아침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는 사실을 언니는 알고 있지. 그래서 아침에 만날 때면 언니는 아메리카노를 내밀잖아. 내가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걸 좋아하는 걸 알잖아. 그래서 늘 언니는 내가 맥주를 마시면 담배를 내밀잖아.

하지만, 아메리카노 첫 모금을 마실 때 어떤 느낌인지, 클럽에 가서 맥주 한모금과 함께 담배를 피울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니는 모르겠지. 나도 모르잖아. 언니가 매일 커피와 함께 아침 첫 담배를 피울 때, 몸이 나른해지는지, 정신이 또렷해지는지 모르잖아. 하지만,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잖아. 그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잘 알잖아. 그거면 되는 거지.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그건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와 함께 동인련 행사에 가자고 했던 것 같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언닌 이렇게 말했지. 난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이런 곳에 가야할 이유가 있니? 그리고 말을 이었지. 네가 이런 곳을 왜 가는지 모르겠다. 커밍아웃도 하지 않고, 주말이면 클럽과 번개를 오가는 네가 이런 운동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어.

내가 그곳에서 무슨 말을 해야만 했을까?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 동인련 회원가입서를 들고 왔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했을까? 아니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욕심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해야만 했을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어. 아무도 모르는 괴물같은 사람, 그게 나였어. 연인은 늘 사람들에게 아는 동생이나, 아는 언니였고, 혹은 친구였지. 심지어 함께 사는 친구에게도 그들은 그냥 자주 놀러오는 친구일 뿐이었어. 신호등에 서서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다가도, 함께 웃다가도 사람들이 지나가면 웃음을 멈추고, 손을 놓았어.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자랑하고 싶을 때에도, 목구멍까지 말이 나오다가, 다시 들어갔어. 이 말을 뱉고 나면, 그들이 모두 떠나버리고,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나 혼자만 발가벗겨진 채,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 같은 기분. 무서웠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괴물인 것을 들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늘 가면을 쓰고 살았어. 그 누구도 내 옆에 오랫동안 머무른 적이 없었고, 누구도 나의 안에 들어올 수 없었어. 이게 내가 여태 살아온 삶이었어.

혼자만 입 다물고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었지. 누구도 나에 대해서 묻지 않을테고, 조용히 하루를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더럽게 외로웠어.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얼굴 맞댄 채 웃음을 짓고 있으면, 하루가 지나갈 테니까. 그런데 세상을 바꾸고 싶어져버렸어.

그게 우연히 흘러들어온 이곳, 동인련에서 내가 느낀 처음의 마음이었어. 어깨를 움츠리고, 벽을 치고 있지 않아도 되는 곳이 세상에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 가면을 쓰고, 살지 않아도 되는 것, 괴물이 아니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으며 웃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내가 원하는 세상이 뭐냐고 묻겠지. 미국에 있는 친구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려고 기다리는데, 문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대. 밖에서 스타벅스 안을 보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대. 조금 있다가 방금까지 매장 안을 청소하고 있던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더니, 그 여자를 꼭 껴안고 키스를 했대. 오래도록 둘이 안고 있었대. 사람들 중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대. 그리고 둘은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걸었대. 세 걸음 걷고, 키스하고, 또 걷고, 또 키스하고.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세상이야. 동인련에 와서 내가 꿈꾸게 된 세상이야.

이게 욕심이겠지. 욕심이라고 말하겠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언니는 나와 제일 친한 사람이니 함께 하자고 하는 건. 하지만 욕심이라고 하더라도, 함께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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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나령
    2013.02.05 19:59 [Edit/Del] [Reply]
    감동이 밀려온당 훈훈한 편지^^
  2. 김나령
    2013.02.05 20:00 [Edit/Del] [Reply]
    감동이 밀려온당 훈훈한 편지^^
  3. vlftns
    2013.02.06 11:22 [Edit/Del] [Reply]
    주인공 화이팅!
    그리고..이편진 왜이리 잘쓴거니 ㅋㅋㅋ
  4. -
    2013.02.06 11:26 [Edit/Del] [Reply]
    아침부터 눈물나네
  5. 이경
    2013.02.07 15:18 [Edit/Del] [Reply]
    나도 좀 사연을 보내야할 것 같아...
  6. 이미정
    2013.02.21 00:44 [Edit/Del] [Reply]
    주인공에게 화이팅이라고 말해주고 싶네! 언니와 꼭 함께 하길!
  7. 계영
    2013.03.16 23:29 [Edit/Del] [Reply]
    꿈꾸는 세상! 울이 모두 홧잉>.</
  8. 디케
    2013.07.28 00:58 [Edit/Del] [Reply]
    이 또한 내가 바라는 세상입니다.
    언젠가는 이런세상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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