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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전시리뷰] 김두진 <걸작(傑作)masterpiece> - 세상의 프레임을 지우는 삶을 빚어내기, 선컨템포러리, 2012. 12. 13- 2013. 1. 6.

by 행성인 2013. 2. 5.

웅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주문, 경계, 해골

 

빨간 마법의 구두를 세 번 부딪히며 ‘집만큼 좋은 곳은 없어(No place like home)’ 라고 주문을 외는 순간, 도로시는 이상한 나라에서 일상의 현실로 돌아온다. L. 프랭크 바움의 원작소설이지만 우리에겐 주디 갈란드의 영화로 친근한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문은 현실로 돌아오는 열쇠이자 모험의 끝을 알리는 신호로 작동한다. 오즈와 캔자스, 마법과 현실, 낯선 영토와 익숙한 공간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문지방처럼 주문은 두 세계 사이에 있다.

 

 

김두진, No Place Like Home, 19분 5.14초, (1939)원작, 2002. 동영상은 http://youtu.be/qaqPNCWcmuk 에서 볼 수 있다.

십여 년 전 김두진 작가는 영화에 다소 짓궂은 변형을 가한 영상작업을 선보인 적이 있다. 말하자면 구두 끝이 부딪치는 부분만 자르고 늘여놓음으로써 현실로 돌아오는 주문만을 끝없이 외도록 했던 것이다. 주문 한마디에 즐거운 모험이 맥없이 끝나버려 약이 올랐다는 작가의 작업의도에도 불구하고, 영상을 지배하는 장면은 모험과 마법의 세계의 귀환이 아닌 끝없이 반복되는 주문뿐이었다. ‘랙’에 걸린 듯 버벅거리는 주문은 현실에도, 현실과 괴리된 무지개너머 마법의 세계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거나 다다르지 못한 채 낯선 모습으로 얼룩져있다. 분리된 두 세계를 오가는 효과가 끝없이 연기됨에 따라 주문은 세계를 구획하는 메커니즘에 끊임없이 불안과 균열을 야기한다.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주문이 ‘경계 자체’로 재조명되는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서 경계로 출몰했던 도로시의 주문은 근래 들어 죽음과 삶 사이에 걸쳐있는 ‘해골’의 표상으로 변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3D 모델링 프로그램 ‘라이트웨이브’로 이뤄지는 그의 작업은 흔히 ‘고전’으로 평가되는 작품들을 패러디하여 원작의 이미지로부터 뼈대만 남은 형태를 묘사한다. 배경과 의복, 피륙을 거둬낸 결과 화면에는 앙상한 해골의 형상만이 빈 공간에 남아 있다. 빈 화면 속에 컴퓨터로 해골형상을 빚어내는 그의 작업은 죽음과 삶, 규범과 비규범, 원본과 모사를 분리하는 경계에서 세계를 구획하는 프레임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심화한다.

 

 

 

 

왼쪽) 김두진, Ken Moody and Robert Sherman,

디지털페인팅, 150 x 200cm, 2012.

오른쪽) 로버트 메플소프, Ken Moody and

Robert Sherman, Platinum print, 49.5 x 49.9cm,

1984.

 

 

 

 

 

얼마 전 막을 내린 개인전 <걸작masterpiece>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전시에서 작가는 세 편의 원작을 다룬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되는 장면을 그린 초기 르네상스 화가 마사치오의 <낙원에서의 추방>(1427-28)과 세계의 원천을 여성의 몸에 빗대며 여성의 신체일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쿠르베의 리얼리즘 회화 <세상의 기원>(1866), 흑백의 피부를 대극으로 삼아 신체를 정물화 하는 메플소프의 <Ken Moody and Robert Sherman>(1984)에 이르기까지 각 작품들은 천차만별의 제작시기와 양식을 갖는다. 그럼에도 원작들은 현세와 내세, 인간과 자연(또는 신),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을 나누며 세계의 질서를 구획하는 이분법적 프레임 위에 만들어진다는 성격을 공유한다. 더불어 작품 자체가 ‘걸작’의 칭호를 부여받으며 주어진 세계의 프레임을 극(단)적으로 재생산하는 점 또한 공통적이다. 이는 해골의 형상으로 원작을 패러디하는 그의 작업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위계를 나누는 인종, 젠더의 프레임을 ‘드러내고’ ‘벗겨내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구축을 해체하는 구축, 해골의 역설에 관한 재고

 

컴퓨터그래픽으로 해골을 제작하는 과정에는 여러 분야의 작업방식이 교차한다. 화면 속에서 형체를 만들고 색을 입히는 작업은 회화에 가깝지만, 3D 화면 속에서 다각도로 뼈를 모델링하는 행위는 조각의 특성에 부합한다. 그런가하면 최종적인 작품이 출력물로 주어진다는 점은 사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회화와 사진과 조각의 성격이 매끈하게 혼합되는 그의 작업은 일명 ‘디지털 페인팅’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다층적인 작업의 결과물은 앞서 교차되었던 각 작업들의 고유한 성격을 상쇄한 채 매끈한 색면들의 조합만을 보여준다.

 

일련의 이중성은 작업소재인 ‘해골’에도 반복된다. ‘얼굴과 신체가 소멸하고 최종적으로 남는 물질’이라는 사전적 의미 아래 해골은 신체조직으로서 ‘뼈’의 기본적 의미를 넘어 존재와 부재, 소멸의 경계에서 삶에 개입하여 죽음을 환기하고 각인시킨다. 그런가하면 경계의 대상이자 필요에 따라서는 파괴대상을 지칭하는 기호의 역할을 일임하기도 한다. 주변, 하위, 타자, 오염, 위험, 공포, 죽음은 해골의 얼굴에 붙어 다니는 다른 이름들이다.

 

 

 

왼쪽) 김두진, 세상의 기원,

디지털페인팅, 200 x 150cm, 2012.

오른쪽) 구스타브 쿠르베, 세상의 기원,

캔버스에 유화, 46 x 55 cm, 1866.

 

 

 

원작보다 훨씬 큰 스케일로 옮겨진 화면에 그려진 해골은 작가의 기술과 노고가 집약되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과 시간을 쏟아 빈 화면에 뼈를 구현하는 작업과정은 거꾸로 열심히 원본을 지우고 벗기고 떼어낸 결과와 다르지 않다. 이른바 형상을 ‘구축’하는 행위가 원본을 ‘해체’하는 시도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셈이다. 그 결과 해골에는 기존의 부정적 의미에 덧붙여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의미를 해체하는 적극적인 역할이 부여된다. 모든 관계를 지우고 의미와 연관된 피와 살점들을 깎아낸 결과 남은 해골의 형상들은 인종을 알 수 없고, 계층도 알 수 없으며, 성별마저 모호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오히려 성별의 경우 작가는 골반의 미세한 차이를 이용하여 인물들의 성별을 임의적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화면 속 인종과 계층, 젠더를 구분하는 기준과 프레임들은 지워진 채 원본과의 대조 속에서 사후적인 흔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세상을 벗겨내는 작업으로부터 해골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나아가 세계를 해체하는 무기로 귀환한다. 그러나 프레임을 벗겨내고 남은 잔여물로서 뼈의 실상은 원본의 그림자를 빌어 몇 겹의 얇은 색면으로 덧대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멸을 거부한 채 소멸을 표상하는’ 해골의 역설은 ‘금속성 허상’으로 시각화된다. 하지만 작가의 손길이 빈 화면 위로 분주하게 오간 결과, 응집된 얇은 색면들은 단단한 금속의 질감으로 해골의 허상을 포장하여 관객의 눈을 속인다. 특히 이번 전시에 선보인 해골들은 근래 작가가 작업한 어떤 뼈대들보다도 클로즈업되어 뚜렷한 윤곽과 밀도로 어둠 속에서 도드라져있다. 해골은 어떤 의미도 허락지 않을 듯한 ‘냉정함’으로 빛을 발하지만, 동시에 중첩된 색면체로서 여전히 숨길 수 없는 부실한 내면을 노출하며 아래의 배경을 투과한다.

 

 

위) 김두진, 아담과 이브 Ⅰ-ⅩⅩⅤ, 디지털페인팅, 50 x 40cm, 2012.

아래) 1층 전시장 풍경

   

반복되는 빨간 구두의 주문이 시간을 잠식하듯, 복제된 화면들은 전시장을 채운다. 3D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구축된 해골은 사이즈와 시점의 변화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반복적으로 배치된다. 가령 <아담과 이브>에서 클로즈업된 흉골과 척추는 색을 달리하며 열과 횡이 앞뒤로 번갈아 쌍쌍이 배열됨으로써 어느 것이 아담이고 이브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아니 분간의 의미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런가하면 <낙원의 추방>은 각기 다른 시점에서 묘사된 추방의 반복적인 풍경을 전시장 사방에 채움으로써 1층 전시장을 추방의 장면들로 가득 메운다. 그 결과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회한과 절규가 향하는 전시장은 추방의 장면들로 가득 채워진다. 추방만이 존재하는 공간, 전후 시나리오가 주어지지 않은 추방의 주문에 사로잡힌 공간은 탈출구나 미래의 장밋빛 약속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가로막는다. 지워지고 벗겨진 추방의 풍경을 다시 읽는 작업이 관객에게 요청된다.

 

추방의 계보, 부정의 반복

 

여기서 ‘추방’은 경계와 금기, 더불어 위반의 욕망을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작용한다. 이는 추방이 작가에게 단순한 작업소재일 뿐 아니라 중요한 작업 모티브로 작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왼쪽) 마사치오, 낙원에서의 추방, 프레스코화, 1424-28. 오른쪽) 김두진, 낙원에서의 추방, 디지털페인팅, 80 x 120cm, 2012.

작가의 작업을 어느 정도 숙지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작업초기 그가 미켈란젤로의 <낙원에서의 추방>(1509-10)역시 패러디했던 전적을 떠올릴 것이다. 나아가 미켈란젤로 역시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의 추방테마를 제작하는데 앞서 마사치오의 작품을 참고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기억한다면, 작가가 앞서 두 걸출한 작품들을 참조함으로써 추방의 ‘계보’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할지 모른다.[각주:1]

 

하지만 계보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두 원작들이 보여주는 추방의 모티프가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종교에서 현세로, 신적 계율에서 인간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정신의 렌즈로 <창세기>를 재독해한다면,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된 추방의 장면은 배제와 헐벗음을 함의하면서 지금껏 구축되어온 인간사회의 프레임 자체를 벗겨내기 때문이다. 이는 오히려 계보를 파괴하는 것, 혹은 파괴적으로 계보를 잇는 것에 가깝다.

 

게다가 작가의 두 패러디 작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원작에 접근한다. 전작 <우리는 그들과 함께 태어났다>(1998)에서 작가가 이성 커플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동성애 욕망의 유혹과 위험을 상기하고 있다면, 최근의 시도는 원작의 소재들을 아예 벗기고 잘라냄으로써 해골만이 남은 화면에 남성-여성, 동성애-이성애의 이분법이 들어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전작의 패러디가 여전히 이분법 아래 동성애를 유혹적이지만 위험하고 병리적이며 주변적인 반대쌍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우려를 남긴다면, 최근작은 이분법의 프레임을 구성하는 살들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전작의 변형에 전제되고 있는 프레임의 흔적조차 걷어냄으로써 보다 깊숙이 프레임의 경계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왼쪽) 미켈란젤로, 낙원에서의 추방,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中, 1509-10. 오른쪽) 김두진, 우리는 그들과 함께 태어났다, 캔버스에 안료, 248 X 345cm, 1998.

 

현실에도 무지개너머에도 머무르지 못한 채 빨간 마법의 구두를 끝없이 부딪치며 주문을 계속 읊던 불안함은 이제 원작을 지우고 세계의 프레임을 벗겨내며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얼룩져있는 해골의 모습으로 반복된다. 앙상하고 차가운 면모로 걸작을 흉내 내고, 냉소적으로 규범을 패러디하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결기’에도 불구하고, 규범을 부정함으로써만 자기 정체를 간신히 드러낼 수 있다는 불안정한 입지 때문에 해골의 냉소는 처절할 수밖에 없다. 자기 존재를 올곧이 갖지 못한 채 존재한다는 것은 슬픔을 함의하지만, 그마저도 금속성 표면에 부딪히고 투과되며 냉정을 잃지 않는다. 그렇게 원작의 제스처를 고고하지만 허상의 얼굴로 흉내냄으로써 해골은 영원한 침묵과 소멸로부터 간신히 존재의 그물에 매달린다.

 

 

차갑고 우스꽝스러우며 기괴하고 슬픈

 

작가의 해골은 작품을 채우고 있는 피륙뿐 아니라, 원작이 지향하는 메시지와 그 가치 또한 벗겨낸다. 해골이 흉내 내고 있는 자세들은 원작이 전하는 성스러움과 성적 매력, 감동과 진지함을 배제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벗겨냈더니 그 몰골이 ‘걸작’이라는 전시제목이 함축하는 중의적 의도처럼, 과잉된 벗기기 작업으로 뼈다귀만 남아버린 ‘살아있는 해골’의 앙상한 몸짓은 당장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함’을 전한다.

 

원작들로부터 뒤틀린 해골의 모습을 읽어내면서 작가는 스스로를 유령과 같은 존재로 설명한다. ‘게이 동성애자 작가’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겪는 주변적 입지는 위반과 일탈, 위협과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스스로를 부정적 존재로 인식하도록 압박하지만 온갖 의미를 규정하는 세상의 프레임을 벗겨낼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작가의 작업을 ‘게이 동성애자 작가’ 라는 ‘정체성’과 동일시하는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규칙에 끊임없이 회의하고 물음표를 붙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해골은 부정과 회의를 거듭하여 빚어낸 형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패러디가 원본으로부터 무관할 수 없듯이, 자신의 존재양식을 재구축하려는 성소수자들의 대안적인 실천은 이미 주어진 이성애 젠더규범의 양식과의 대면을 무시하거나 피할 수 없다. 심지어 이들의 실천은 사후적으로 이성애 젠더규범을 하나의 원본으로 소환함으로써 자신들을 줄곧 ‘표준’의 관점에서 부정과 일탈의 존재로 규정하고, 문란하고 혐오적인 존재로 고착시키는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 속에서 이분법적 구분에 물음표를 버리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삶의 양식은 온갖 사회적 위계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온전히 해석될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채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포박되기 쉽다. 규범에 물음표를 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행위조차 대상화되거나 일시적 소비로 ‘오독’될 때, 나아가 소수자의 존재가 혐오 속에서 묵인되고 거부될 때 세상은 그들에게 공인된 신체를 허락지 않거나, 그들의 실천을 ‘변형’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정형화한다.

 

신체와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환경으로부터 성소수자의 존재는 허상의 금속성 해골, 슬픔을 안고 냉정함을 가진 채 규범으로부터 뒤틀린 모습과 중첩된다. 슬픔과 우스꽝스러움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가운데, 해골의 낯선 얼굴과 몸짓은 혐오의 대상으로 존재를 부정당한 채 경계에 매달린 이들의 모습을 시각화한다.

 

경계는 세계를 분할하고 구획할 뿐 아니라, 무엇이 드러나고 드러나지 말아야할지를 결정하고 드러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은폐한다. 하지만 위험과 경계로 각인되어 있는 해골이 자신의 존재적 무게를 요구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할까? 더구나 해골의 이미지가 사회의 경계에 매달려 있는 주변부 구성원들의 얼굴과 겹쳐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재독해해야할까? 존재적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해골은 존재를 지탱하는 앙상한 관절들로 규격화된 삶의 무게를 벗겨내며 그 나름의 존재양식을 구축한다. 엷고 앙상하고 기괴하지만 단단하게 반짝이는 해골의 자태는 당장이라도 허공 속에 흩어져버릴 것만 같음에도 강단을 잃지 않고 규범을 벗겨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어쩌면 작가는 ‘주변부’로 불릴 수밖에 없는 취약한 삶의 고군분투를 해골의 얼굴로 새겨내며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 감상이다.

 

오프닝 퍼포먼스 <아주 평범한 커플>, 이미지출처: 선컨템포러리갤러리

 

P.S 전시기간동안 1층 전시장에서는 두 남자 배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몸짓을 주고받는 퍼포먼스가 하루 두 차례씩 진행되었다. 관객에 둘러싸여 ‘동성커플’을 연출한 그들의 모습은 (귀여운, 오글거리는 따위의 개인적인 감상은 뒤로 하고) 겉보기엔 퍼포먼스 이름 그대로 ‘아주 평범한’ 역할극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 무리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서로 간 주고받는 눈빛과 몸짓들의 ‘달콤함’에 대한 판단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퍼포먼스는 관객들로 하여금 낯설어하고 당황하고 놀라고 흥미로워하는 자신들의 태도를 관찰할 것을 요구한다. 주어진 공간과 상황 속, 의미에 묶여있는 태도와 반응을 내려놓으라 할 때, 우리에겐 어떤 판단의 지표들이 요구될까? 벗겨진 추방의 풍경들이 사방에 펼쳐져 있는 전시장 한가운데, 틀에 박힌 그들의 역할놀이 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눈빛과 몸짓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1. <낙원의 추방>과 관련한 ‘계보’의 아이디어는 미술평론가 임근준(이정우)의 텍스트로부터 얻었다. 그의 저서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 - 광기와 집착으로 완성된 현대미술 컬렉션』(2006) 김두진 편에는 초기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작가의 작업이 정리되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