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태(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이 세상의 지도가 유토피아라는 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도를 들여다볼 가치란 전혀 없다."

- 오스카 와일드


이송희일 감독은 일찍이 <후회하지 않아>(2006)에서부터 ‘퀴어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대도시의 게이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수민(이영훈)’은 시골 고아원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개울가에서 고아원 동생과 나체로 유영을 즐길 수 있었던 그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계급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왜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대도시를 떠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돈을 필요한 만큼 충분히 모으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이미 ‘돈의 맛’, 즉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과연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게이들에게 있어 유토피아가 지닌 의미를 짚어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토피아는 공간적 차원뿐만 아니라 ‘현재와의 단절’을 통해 미래로 나아간다는 시간성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는 ‘아직 여기에 있지 않음’이라는 미래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게이들에게는 이중의 불가능성이 미래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미래에도 신자유주의의 폭력적인 자본과 그에 따른 계급 착취가 불가피하다는 부정적 전망이다. 그리고 미래가 담보하고 있는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 즉 이성애규범적 미래성과 게이들의 삶은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보다 근원적인 전망이 있다. 재생산에 기반한 미래는 온전히 아이들 것이기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게이들에게 미래는 있을 수 없다. 이델만에 따르면, 이처럼 ‘미래 없음no future’은 ‘퀴어 부정성queer negativity’의 핵심을 이룬다.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남쪽으로 간다>

 

‘미래 없음’의 태도는 이송희일 감독의 최근 퀴어 연작인 <백야>, <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의 주인공 게이들에 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백야>에서 퀵서비스를 하는 ‘태준(이이경)’이 번개로 만난 승무원 ‘원규(원태희)’에게 자꾸 지구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욕망하는 것도 미래를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들이 비로소 제대로 된 섹스에 돌입하게 된 계기 역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을 던진 후이다. 죽음을 앞둔 섹스 속에서 그들은 절정의 쾌락에 도달한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는 고등학생인 ‘상우(한주완)’는 담임교사 ‘경훈(김영재)’을 귀찮게 쫓아다니며 그에게 ‘오늘 하루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남쪽으로 간다>에서는 군인 ‘기태(김재흥)’은 휴가 복귀를 거부한 채 자신이 게이임을 부정하는 옛 선임병 ‘준영(전신환)’에게 마지막으로 ‘단 한 번의 섹스’를 요구한다. 이들은 모두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조급하게 사랑을 갈구한다. 여기에는 죽음충동이 늘 도사리고 있다. 미래를 부정하고 과거에 연연하는 이송희일의 영화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서조차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이제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게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회하지 않아>의 수민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단순히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의 개울가라는 공간이 아니라 ‘어린 시절’이라는 시간성이 더 중요한 의미를 띤다. <백야>의 태준이 게이들이 살기 좋은 북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동경하는 것도 그곳이 ‘인류의 기원’이라는 태곳적 시간성에 근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쪽으로 간다>에서 기태가 그토록 갈망하는 그 ‘남쪽’이 끝까지 익명의 추상적 유토피아로 남아있는 것도, 과거 기태와 준영이 부대 안에서 서로 사랑했던 시절에만 진정한 가치를 지녔다는 시간성의 부각을 위한 것이다. 결국 <후회하지 않아>에서 수민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근거는 과거로의 회귀가 지닌 불가능성에 있다. 게이들에게 유토피아가 있다면 그곳은 ‘아직 여기에 없는 곳’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 있었던 곳’이다. 즉 부지불식간에 이미 사라져 버린 곳,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이러한 과거로의 회귀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라볼 때, 이송희일의 퀴어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사랑과 갈등은 나르시시즘적 특징을 띤다. 한 남자에게 있어 그보다 어린 남자는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다가와 자신을 유혹한다. 적극적으로 동성애적 욕망을 드러내는 그 ‘과거의 나’는 그것을 감추고 억누르는 ‘현재의 나’에게 있어 달콤하지만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것이 동성애적 욕망을 가시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욕망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안에서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에게 있어 과거의 그 노골적인 유혹에 응하는 것은 동성애를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과거로의 회귀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 과거의 나에게로 돌아가면 유토피아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상우의 집요한 구애와 협박에도 경훈은 끝까지 그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것도, <남쪽으로 간다>에서 기태가 준영을 납치하면서까지 사랑을 갈구하지만 기태가 마지막까지 함께 남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백야>에서 태준이 원규에게 전화번호를 건네지만 원규가 끝내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그 나르시시즘적 사랑이 지닌 현실적 한계 때문이다. 기껏해야 이들 사이에는 섹스만이 가능할 뿐이다. 과거를 회상할 수 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그 어딘가를 유토피아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게이들은 영원히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까? 이송희일은 퀴어 유토피아의 재현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타협점을 찾는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현재와의 단절을 넘어 시간이 완전히 정지된 곳에 유토피아가 있다. 그런데 그처럼 확장하고 생성하는 시간성의 부정은 궁극적으로 죽음충동과 닮아있다. 죽음충동 자체가 유토피아적 열망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송희일의 죽음충동에 대한 집착과 변주는 교착상태에 빠진 퀴어 유토피아의 형상과 일별하기 위한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는 정지된 시간을 포획하며 퀴어 유토피아의 오랜 흔적을 찾는다.


그의 영화들 속에서 유토피아는 순간적으로 출몰했다 이내 사라진다. 그것은 시간의 정지라는 환상의 도입으로 출현하는 유사 유토피아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경훈은 한강 위를 떠다니는 유람선 위에서 상우가 씌워준 헤드폰의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빌딩숲과 한강 위의 대교를 응시한다. 그가 듣는 음악에 맞춰 대도시를 분절한 일련의 몽타주 시퀀스가 한동안 화면을 채운다. 한편 <백야>에서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태준과 원규가 공원 위의 공중 화장실에서 ‘지구의 종말(시간의 소멸)’을 가정한 채 하는 격렬한 섹스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을 벗어나 화장실 내부를 훑고 지나가 창밖의 눈 내리는 밤풍경을 잠시 관조한다. 이상에서 감독이 포착하려는 것은 현재와의 단절이자 정지된 시간이다. 그 시간의 소멸 안에서 유람선과 공중화장실도 유토피아로 둔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퀴어들에게 감독이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위안이다. 


  1. 2012.12.01 11:19 신고 [Edit/Del] [Reply]
    이송희일 퀴어연작 <백야> <지난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상영관 및 시간표!
    http://blog.naver.com/whitenight21/170641372
  2. 해밀
    2012.12.01 15:21 [Edit/Del] [Reply]
    무진장 흥미로우네요
  3. 달꿈
    2012.12.02 01:59 [Edit/Del] [Reply]
    경태님, 늘 글이 나올 때마다,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꼭 읽게 되기도 하구요. 영화는 아직 안보았는데,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듭니다!
  4. ㄷㅅㅅㅎ
    2012.12.02 03:29 [Edit/Del] [Reply]
    다소 긴 코멘트-
    자기위안 너머: ‘미래 없음’ 속에서 퀴어한 만남의 여정을 살피는 시도의 중요성


    좋은 비평 잘 읽었습니다. 몇 가지 의견을 덧붙이고 싶은데, 문장에 문장을 엮다보니 길어지기도 하고, 링크 걸 만한 변변한 주소도 없는데 막상 지우려니 아까워서(..) 졸렬하지만 ‘주제 넘는 오지랖’을 감수하고 제목 달린 긴 댓글로 남깁니다. 일독하시기 전에 강력한 스포일링이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합니다.

    리 에델만(Lee Edelman)의 화두인 ‘미래 없음’(no future)과 더불어 동성애 감수성의 클리셰로 부를 수 있는 ‘퀴어 유토피아’ 개념을 기둥삼아 영화를 분석한 위의 글을 읽으면서, 사회로부터 부정되는 삶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노스탤지어를 미화시키려는 자기연민의 유혹과 유토피아의 환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 속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좌절과 집착적인 유토피아의 양가성 속에서 반복하는 자기연민은 ‘끝없이 폐쇄적일’ 뿐입니다. 두 개념을 연결시켜 연작을 읽어내는 평자의 독법은 쉽지 않았지만 넘치는 영감을 줍니다.

    그럼에도 위의 독법만으로 영화를 읽는다면 절망의 교착된 상태만을 바라보게 될 뿐, 한정될지라도 주어진 시간 속에서 폭력과 사랑이 교차하는 중의적 지점, 당장의 해석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시간의 구성방식들은 지나치지 않을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가령 각 작품들에는 공통적으로 다수의 관점들이 중첩되어 분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지난여름 갑자기(이하 ‘여름’)>의 유람선 씬에서 관조된 채 지나가는 서울의 풍경에 대해 평자는 일종의 일시적인 유토피아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경훈을 아웃팅하겠다 협박하면서 일회성 데이트(?)의 기회를 얻어낸 제자와 선생 사이 역전된 갑을관계가 전제됩니다. 불완전한 합의 속에서 이뤄진 ‘동행’은, 서로의 감정이야 어떻든 가정방문을 순회하는 경훈의 업무시간을 함께하는가하면 짬을 내어 유람선을 타고, 유혹과 거부 사이의 고조된 갈등이 경훈의 집에서 화해되는 기승전결로 전개되면서 누구나 상상하는 데이트와 비슷한 외양을 갖춥니다. 해석적으로 볼 때 둘의 만남은 (스승-제자, 동성애 관계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과거’이자 인정될 수 없는 조건부 만남일 테지만, 한정된 조건 속에서 제공된 둘의 하루는 노동시간에도 함께할 수 있는 일반적인(이상적인?) 데이트로서의 동선을 밟고 있습니다. 요컨대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유토피아의 유혹은 유람선 바깥의 관조적인 서울풍경 ‘너머’,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일상과 포개어져 모호한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남쪽으로 간다(이하 ‘남쪽’)> 또한 탈영을 무릅쓰고 전역한 고참에게 수면제를 먹이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긴장의 과정, 숲속에서 섹스를 하고 사진을 남기려다 들켜 벌거벗은 채 추격전에 난투극까지 벌이는 과정을 좇다보면 카메라가 시종일관 전원의 풍경과 인물들을 한데 담는데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지만, 남쪽을 향한 짧은 여로의 풍경은 긴장을 놓지 않는 가운데에도 퍽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이 모호함은 <백야>에도 계속됩니다. 원나잇으로 만난 두 인물은 반복적으로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거나 지금 여기를 떠나 아프리카와 같은 원시적 유토피아를 갈망하지만, 극이 전개되는 동안만큼은 서울하늘 아래서 밤을 새며 ‘묻지마 범죄’에 대한 복수의 여정을 밟고 있습니다. 평자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뤄지는 공원화장실의 섹스에 일시적인 위안으로서 유토피아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혐오범죄에 대한 복수의 과정, 미래가 담보되지 않은 폭력의 동선은 화장실에서 섹스를 하기까지 하룻밤새 정주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두 인물 간 ‘밀당’ 속에서 구성됩니다.

    종종 이 모호한 장면들은 폭력과 친밀성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등장하는 모습으로 전개됩니다. 이는 ‘여름’의 마지막, 경훈이 폭발적으로 상우를 때리고는 곧장 다가가 키스를 건네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섹스를 하는 기태와 준영이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진흙탕을 뒹구는 ‘남쪽’의 이야기에도 친밀성과 폭력은 교차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이들 영화의 끝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낮과 밤의 중간쯤에 있지요. 밤사이의 공간을 담은 <백야>의 경우엔, 원나잇을 전제로 성사된 만남 속에서 복수가 동시에 전개됩니다. 낮과 밤의 경계, 또는 모두가 잠든 시간 영화 속 인물들이 생활습관이 밴 장소로부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변두리와 교외를 맴돌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들의 뒤틀린 관계를 시·공간화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듯 관계나 시공간에서 가시화되는 모호함은 ‘좌절’과 ‘유토피아’라는 극단의 짝패가 교차하는 가운데 온전한 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제시됩니다. 영화 속에서 유토피아는 동성애 혐오와 군대, 학교라는 폐쇄적인 사회적 위계로 좌절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인물들은 한정된 공간과 시간만을 제공받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주어진 시간의 한정 속에서도 소위 유토피아가 좌절된 풍경으로나마 시각화되는 여정을, 일종의 ‘유사-데이트’의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미래 없음’과 ‘퀴어 유토피아’에 대한 집착이 중첩된 닫힌 나르시시즘적 교착으로부터 ‘위안’의 제공을 강조하기보다, 그와 같은 교착된 환경 속에서 어떤 서사들이 만들어지는지 읽어내는 시도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에 대해 “퀴어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퀴어들에게 건네는 위안으로 삼는다는” 평가의 유효성에 공감하고 부분적으로 인정할지라도 쉽게 만족할 수 없다는 솔직한 감상을 고백합니다. <백야>에서 보여주는 공원화장실의 섹스장면이나 ‘남쪽’에서 홀로 터널에 남아 춤추는 마지막장면처럼, 미래 없는 현재와 도달 불가능한 과거가 섬광처럼 빛을 발하는 현실의 절망적인 교차지점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개되는 만남의 서사를- (협박이든 합의든) 조건부 만남을 만들고, 폭력과 사랑의 관계가 동시에 발발하는 긴장의 시간들, 미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간들’, 다가설 수 없는 과거와 대면하기까지의 과정들- 살피는 시도를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절망에 대한 위안보다 교착 속에서도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저의 의견이 유효하다면, 앞서 평자가 불가능한 ‘유토피아’ 앞에 붙였던 ‘퀴어’의 수식은 오히려 뒤틀리고 올곧은 해석이 불가능한, 그렇기에 더더욱 해석을 요구해야 하는 ‘여정들’에 붙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연작에서 드러나는 자기연민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작품들이 ‘퀴어’들에게 위안을 전한다는 평자의 설득력 있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저는 평자가 누락하고 있는 인물들 간 만남, 만남이 전개되는 과정들이야말로 실제 우리가 살아가며 누군가를 만나는 환경을 비춰보고, 반추하며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 과정들을 읽는 시도는 위안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지점에서 주어진 시간을 숙고하도록 하고, 더불어 우리가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요?

    • 경태
      2012.12.02 08:45 [Edit/Del]
      아 감동입니다. 이렇게 길고 훌륭한 피드백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영화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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